떠날 수 있는 용기

by yuri

엄마의 편지, 열번 째 장


사랑하는 딸아.


엄마가 첫 발령을 받은 학교는 승진 가산점이 있는 학교여서 승진을 생각하고 오시는 선생님들이 유독 많았단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런 기간제 경험도 없이 곧바로 이 학교에 신규 발령을 받았지. 그러니 무엇이든 하나하나 새로 배우며 버텨야 했어. 하지만 그 배움의 과정이 늘 따뜻한 것만은 아니었어. “이런 것도 몰라요? 도대체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 거예요?”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지. 그 말 속에는 불만과 짜증이 섞여 있었고, 그 앞에서 엄마는 늘 움츠러들었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단다. 학부모님께서 선도 위원회 결과를 너무 궁금해 하셔서, 정식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담임으로서 “아마 이 정도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하고 조심스레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 그런데 선도 위원 중 한분이 엄마에게 와 교무실 한가운데에서 “누구 죽일 일 있어?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는 말을 하셨지. 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얼굴이 달아올랐어. 수많은 눈이 나를 향하고 있는데,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더라. 그저 굳어버린 채 울면서 그 자리를 버텼어.


가장 난처했던 사건은 강사 선생님이 디지털 피아노 위에 올려둔 물병을 학생이 건드려 피아노가 고장 난 일이었어. 수리비가 백만 원이 넘게 나왔는데 학교에서는 그 돈을 강사와 학생에게 받아오라고 했지. 강사와 학생 모두 "이게 왜 내 책임이예요?"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음악실 담당자이자 해당 교시 임장을 맡았던 엄마에게 책임이 돌아오더라.


이런 사건들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사방이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학교 안에서는 늘 “제 잘못입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았어. 그렇게 사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점점 작아지고,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단다.


너무 힘들어 외할아버지께 “아빠, 나 너무 힘들어”라며 울먹이면 “학교 일은 잘 모르니 외할머니에게 얘기해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 외할머니께 털어놓으면 “너만 힘든 거 아니다. 다들 그 정도는 견디며 산다. 그것 하나 못 버텨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고 하니”라는 말씀을 하셨지. 물론 두 분 다 엄마를 걱정하셨지만, 그 말들은 위로가 되지 못했어. 오히려 마음속에 응어리만 더 크게 자리 잡게 했단다.


그 무렵 엄마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어. 출근길에는 늘 가슴이 답답하고, 학교가 있는 동네만 들어서도 숨이 막히는 듯했지. 한 번은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길을 건너다가, 멀리서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엄마에게 다가온 적이 있었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재빨리 피했겠지만 엄마는 그저 멍하니 ‘아, 트럭이 오고 있구나’ 하고 서 있기만 했어. 몸은 얼어붙었고, 생각은 정지된 듯했지. 뒤늦게 ‘안 되지, 피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겨우 몸을 옆으로 뺄 수 있었어. 그 순간 트럭 운전기사님이 창문을 열고 크게 욕을 하셨는데, 그조차도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단다. 입술 모양만 보고 ‘아, 욕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때 깨달았어. 내가 더 이상 건강하지 않다는 걸,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걸 말이야. 출근길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걸음 같았어. 어디에도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지.


딸아, 엄마가 늘 말하지? 도망치기보다는 버티는 게 중요하다고. 맞아, 때로는 버팀으로써 얻어지는 성장도 있고, 인내가 주는 결실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리를 끝까지 버티는 게 옳은 것은 아니란다.

『손자병법』에는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이라는 말이 있어. 여기서 ‘지(地)’는 땅을 의미하는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땅이 중요하다는 말이야.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하면 아무리 애써도 이길 수 없는 땅이 있기 때문에 그때는 싸움을 피해야 된다는 말이지. 질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는,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음이 될 수도 있단다.


엄마가 가장 후회하는 건 그때였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다른 학교로 옮겨볼 걸, 다른 선택을 해볼 걸… 그 깨달음은 결국 타의에 의해 학교를 옮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


그러니 사랑하는 딸아. 노력은 분명 필요해. 하지만 그 노력이 너 자신을 무너뜨릴 만큼의 짐이 되어서는 안 돼.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다면, 그 자리는 과감히 떠나도 괜찮아. 도망치는 것이 반드시 비겁한 건 아니란다. 때로는 그것이 너를 지키는 가장 현명한 길이 될 수도 있어.

엄마는 이 사실을 아주 늦게야 깨달았지만, 너는 부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너는 엄마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래.

목, 금 연재
이전 09화힘을 빼야 들리는 삶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