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관운(출세나 성공과 관련된 운)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매우 불운이었던 제 첫 직장은 승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고 싶은 "승진 가산점"이 있는 학교였습니다.
가산점이 있는 곳들은 보통 외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그곳은 버스를 타고 몇 분만 나가면 지하철역이 있고 교통도 나쁘지 않아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모든 곳이 그렇겠지만 승진을 하려면 윗사람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데 이곳은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승진을 생각하고 오셨기 때문에 관리자분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그래서 관리자분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에서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승진해야지"였습니다.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부장경력과 담임 경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즘같이 부장과 담임을 안 하려고 하는 시대에도 매년 부장자리를 두고 치열한 자리싸움이 일어나고 관리자분들 눈밖에 나면 바로 담임에서 제외됩니다. 그렇다고 담임을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일이라는 건 잘하는 사람에게 더 몰리니까요.:)
"윗사람이 의욕적이면 아랫사람이 피곤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안 하는 추세인 연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다들 여러 기관과 함께하는 프로젝트형 과제를 진행하느라 바쁘셨습니다.
"이걸 잘한다고 승진에 도움이 되느냐?"라고 물으시면 글쎄요... 관리자분들이 원하시니까 한 것 같습니다. 다른 학교 교장, 교감 선생님들 앞에서 "우리 학교는 이런 것도 합니다"라고 말씀하실만한 자랑거리를 만들어 드려야 했습니다.
미술 전공도 아니지만 포스터, 플랭카드 디자인 시안을 1안. 2안, 3안을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일러스트를 다룰 줄 몰랐던 저는 어느새 그림판마스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신규라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주위에 고경력 능력자분들이 넘쳐나니 더 현타가 강하게 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기안문을 올리고 보고서 쓰는 건 제 경력대의 다른 분들보다는 조금 잘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뭐든 혼나면서 배우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안 가고 싶습니다.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뭐만 하면 다들 "승진"하셔서 그때는 당연히 승진을 해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대우를 해줘야 했기 때문에 일이 특정 몇 명에게 몰리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나도 선생님 나이 때는 선배들 모셨어"라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연차 선생님들과 같은 과목, 같은 학년, 같은 교과군이 되면 뭐랄까요 "나는 말할 테니 너는 귀를 열고 들어라"라는 상황이 자주 연출 됐습니다.
성과급 기준을 정하는 날이면 눈앞에서 서류랑 큰 소리가 오갔습니다.
성과급 기준표를 보면 누가 성과급을 받을지가 업무 분장을 받은 그날 거의 결정 나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하는데 목소리가 작거나 안내는 사람들은 낮은 성과급을 받았습니다.
교장실을 들어가려면 교장실문이 아닌 행정실을 통해서 들어가야 했고, 부원은 부장에게, 부장은 교감과 교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어쩌다 부장에게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담당자가 대신 보고를 들어가면 위계관계를 무시하고 들어왔다고 혼났습니다.
힘들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데 승진이라는 보상이라도 받지 못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더 승진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교무실에 앉아있으면 "여기 있다가 만기 되면 여기로 가서 가산점을 채워라", "연구대회에 나가서 점수 따라" 등의 말을 주로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찾아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반에 일이 생겼고 모든 책임이 다 저에게 돌아와 있는 상황을 마주하고 '내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내 똥물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야 승진하는 구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승진이라는 말 자체에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여기저기서 담임한테 "교권 보내, 담임이 총대를 메야지", "담임이 학부모한테 이런 말 꺼내야지 누가 하겠어"라고 하셔서 꺼냈다가 민원이 들어오니 다 제 책임이고 저의 불찰이 되더군요.
업무 관련해서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자와 독대를 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저에게 그 말을 꺼내신 분은 제가 벌인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하는 사람으로, 저는 생각 없이 말을 꺼내서 일을 크게 만드는 사람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저희 반 아이 중 몇 명이 제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머리카락을 잘라주겠다고 하길래 제가 "괜찮다. 필요 없다"라고 거절 의사를 표시하자 저의 양팔을 잡고 가위로 앞머리카락을 잘라줬습니다. 당시에는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제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사실에 화가 났는데 결과적으로 머리카락을 예쁘게 잘라주기도 했고 본인들이 반성하고 있어서 교권침해로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 그다음 해, 그 그다음 해에도 담임에서 제외됐습니다.
처음에는 배려해 주신 것 같아서 좋았는데 자꾸 담임에서 제외되는 게 이상하기도 했고 교장선생님 면담을 다녀오라고 하셔서 교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들었습니다. 몇 년간 제가 담임에서 제외된 이유는 그때 그 아이들을 교권보호위원회에 안 올려서라는 것을요.
면담 과정에서 교장 선생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보고 과정에서 왜곡이 되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잘못 기억하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제가 겪었던 많은 일들이 다 저의 독단적인 판단과 잘못으로 알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전 "앞으로는 잘하겠다"는 확답을 교장선생님께 하고 나서야 담임을 다시 하게 됐습니다.
승진을 준비하고 승진을 한 분들을 보면서 '와 멋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렇게 해서라도 승진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학교를 옮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존경하고 싶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관리자는 이래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관리자의 표본 같은 분도 만났습니다.
정년퇴직까지 몇 년 안 남으셨는데 대우받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업무를 대신 맡아주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학생들이랑 스스럼없이 지내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평교사로 퇴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조금 바꾸니 교사를 하면서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니시고, 유튜브도 하시는 N잡러 선생님들이 참 많이 계시더라고요. 승진 외에 멋지게 나이 드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새삼 매년 배우고 있습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승진을 하게 되면 밑에 사람들이 뭘 힘들어하고 뭘 도와주기를 바라는지 아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승진을 안 해도 어떻게 행동해야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지 알고 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지를 미리 봤으니 풀이과정에서 실수만 안 하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