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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스미 Nov 15. 2024

멍석 깔린 밤


나가보지도 못하고 많이 갑갑하지?

미안하다 얘들아

지금 내 상황이 좀 그래










지난 내 상황들을 보면

정장이 필요한 직업들이었다.





' 용모단정, 품위유지 '

 조건에 들어맞는 차림을 하다 보니

내 옷장의 모습은 마치..

칼군무를 보는 느낌이랄까?





마트를 가거나 동네 산책을 하거나

아이 학교, 학원을 데려다줄 때에 적합한

그런 옷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난 매니쉬 스타일을 좋아한다.

블라우스보단 빳빳한 셔츠

카디건보단 재킷

청바지보단 슬랙스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일상에 유용하다 라기보다

목적에 유용한 옷장이 되었다.





내 일을 다 놓고 미국에 오게 되었을 때

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난,

한국에 돌아가는 줄 알고

그럼 다시 수업을 나갈 줄 알고

그럼 나갈 옷이 또 필요할 줄 알고

그럼 미리미리 사놔야 되는 줄 알고

옷장의 정체성을 더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 입을 옷들은

맨날 그 밥에 그 나물

교복처럼 정해 놓고 그것만 입는다.





여기서야 뭐

만날 사람도 없고 볼 사람도 없으니 뭔 상관인가.





그러다 돌아가지 않기로 상황은 역전되었고

칼군무를 추던 옷들은 설 무대를 잃었다.





이것들을 입고 설거지를 할 순 없잖아?!





바라보기만 하고 쓰다듬기만 하는

이런 시간이 이어지니

나도 좀 차리고 나가 보고 싶더라.

그 밥에 그 나물 엎어 버리고

예전처럼 용모단정, 품위유지하고 싶더라.





그런데 뭐 껀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러다가

 남편에게서 받은 카톡 메시지 하나.





"초! 대! 장!"





뭐 또 광고지를 찍어 올렸나 싶어 확대해 보니

회사 이름이네?!





이게 뭔가 싶어 요리조리 살펴보는 동안

설명이 도착했다.





회사에서 연말 파티를 하는데

모두를 위한 건 아니고

직원들 중

5년, 10년, 15년, 20년, 25년 차수만 참석하여

 축하받는 자리라고 한다.





YES!!!!!!!!!!!!!!

조아써!!!!!!!!!!!!!

바로 이거야!!!!!!!!!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내 옷들.

2층 옷방으로 뛰어 올라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





선착순 한 명!!!!!





드디어 오늘이다.

칼군무를 무대에 올리는 날.





내가 끝장나게 꾸며주겠어





말라비틀어진 화장품 더 쥐어 짜내서 발라본다.

사용 기한이 무슨 의미냐

화석이 된 색조품도 오늘은 현역이 된다.

목에 이름표도 떼지 않은 신입을 걸치고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액세서리를 깨워

그만 자고 너도 가자.

몇 센티의 굽에 올라 탈지 재어 본 후

오랜만이라 낯선 느낌을 즐기며 출발.





백 년 만에

예전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과 섞여 있으니

이곳이 내 세상이구나 싶다.

내가 내 이름으로 불리며

어른 대 어른의 대화가 이뤄지는 곳.

게다가

남이 차려주는 밥 먹고

남이 따라주는 와인 마시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밤이다.





와...

콩쥐는 두꺼비에게 얼마나 고마웠을까

신데렐라가 이래서 구두를 흘렸겠구나.





이런 날이 또 있겠지?

그렇겠지??





두꺼비를 정규직으로 채용해야겠다.

유리구두를 많이 쟁여 놔야겠다.





오늘 밤

멍석 깔린 무대 위에 올린 내 칼군무는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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