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스토리: 미완성의 저

Ep1. 제1화 – 달 없는 밤의 뱀파이어

by sama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으, 여긴……?”


미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은 어두운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마치 몽환 속에 들어온 듯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책장을 통해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눈앞에는 고성(古城)이 우뚝 서 있었다.


기이하게 붉은 달도, 별도 없는 밤.

달 없는 세계.

그녀가 쓰다 만 첫 번째 로맨스 소설의 배경이었다.


『달 없는 밤의 뱀파이어』.

고딕풍의 판타지 로맨스.

미나는 지금, 그 소설의 1장으로 진입한 것이다.


“진짜…… 들어온 거야?”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을 껌뻑이던 그때,

쨍그랑—

등 뒤에서 유리 구슬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작가님이시죠?”


미나가 놀라 돌아보자,

어깨 위로 작은 요정이 반짝이는 날개를 퍼덕이며 떠 있었다.


“……너는, 틴커벨……?”


“정확히 말하면, ‘틴커벨 패러디 라이선스 요정 3호’입니다. 이번 던전의 조력자 역할이에요.”


작은 요정은 명랑하게 웃으며 날아올랐다.


“지금부터 ‘달 없는 밤의 뱀파이어’ 스토리를 완료하셔야 해요. 엔딩을 만들어야 작가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잠깐, 나 여기서 죽진 않겠지?”


“죽으면 소설 자체가 폐기돼요. 작가님이 스스로 포기했다는 뜻이 되죠.”


“……미친……”


미나는 머리를 싸쥐었다.

그녀는 이 소설의 결말을 단 한 번도 완성한 적이 없었다.

초반 설정만 요란했고, 뱀파이어 남주를 감정 불능 캐릭터로 만들어놓은 상태.

여주인공은 늘 도망치기 바빴고, 고성엔 비밀이 숨겨져 있었지만 풀기 귀찮아서 놔뒀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걸 어떻게 클리어하라고……?”


“작가님이니까요. 누가 만든 세계겠어요?”


틴커벨은 눈을 반짝이며 덧붙였다.


“참, 주의하세요. 이번 보스는 바로 그 뱀파이어 남주님이에요.”


“……그 냉혈한을 내가 이겨야 해?”


“아뇨. ‘이해’하셔야 해요.”


“…뭐?”


“그게, 이 세계의 룰이에요.”



고성의 커다란 문이 스르륵 열렸다.

검붉은 카펫이 깔린 긴 복도, 촛불이 하나씩 켜지며 그녀를 맞이한다.


“어서오라 작가여.. 아니 나의신이자 창조주여..“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바이올린처럼 음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고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촛불이 켜진 복도를 지나자, 고성의 중심부, 검은색 대리석이 깔린 넓은 홀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곳,

왕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창백한 피부.

검은 셔츠 위에 버건디 벨벳 코트를 걸친 우아한 실루엣.


미나는 숨을 삼켰다.


‘라우렌스…’


자신이 만든, 그리고 끝내 감정을 부여하지 못한 남자.

무조건적인 냉정, 불사의 외로움, 그리고 —

작가인 자신조차 그에게 마지막 장면을 줄 용기를 내지 못했던, 미완의 남주.


“네가… 작가인가.”


라우렌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는 듯 바라본다.


“이 세계는, 네가 만든 감옥이다.”


“…뭐?”


“날 이곳에 가두고, 감정을 주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지도 않았지.”


그의 말은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

그래서 더 아팠다.


미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그게… 그냥…”


“무서웠나?”


그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간다.


“네가 감정을 줘버리면, 이야기가 너무 아파질까 봐. 네가 만든 여주가 나를 떠나면, 그걸 네가 못 견딜까 봐.”


그 말에 미나는 한순간 숨이 막혔다.


‘…맞아. 난, 그게 무서웠다.’


라우렌스는 천천히 왕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 넌 돌아갈 수 없다. 내가 있는 이 던전의 끝엔 결말이 있어야 하니까.”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넌, 나에게 감정을 줘야 해.

나를 설득하든, 나를 사랑하든, 나를 죽이든.”


발소리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울린다.

그의 존재감은 설정해뒀던 그대로였다.


‘이 세계를 통제하는 최종 보스’


하지만 그는, 작가가 버린 존재였다.



“작가란 대체 무엇이지?”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에, 미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그녀가 글을 쓰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직면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 순간, 틴커벨이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작가님, 첫 번째 선택지가 떠올랐어요.”


[1] 감정을 줘본다

[2] 대화를 시도한다

[3] 도망친다


세 개의 선택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게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현실처럼 느껴지는 세계에서—

그녀는 지금, 진짜 작가가 되어야 했다.


“…대화를 시도하겠어.”


미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선택이 적용되었습니다.]


틴커벨의 말이 귓가에서 울렸고, 동시에 라우렌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말을 해볼까, 작가.”


그는 미나와의 거리에서 멈춰서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그 질문.

미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던 문장이었다.


“…네가 너무 완벽해지는 게 무서웠어.”


“…완벽?”


“처음엔 단순히 뱀파이어 로맨스를 쓰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너를 계속 쓰다 보니까…

네 감정을 쓰면, 내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았고,

그러다 보면, 그 이야기를 내가 감당 못할까 봐 겁났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우렌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듯했다.


“그래서, 너를 멈췄어.

그러면 나도 안 아프고, 이야기도 안 망가질 줄 알았거든…”


진심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감정이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저 설정만 남긴 채 그를 버려두었다.


“……흥미롭군.”


라우렌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제, 네가 나를 ‘인정’하러 왔다는 건 알겠다.”


그 순간, 고성의 공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틴커벨이 조용히 속삭였다.


“작가님, 던전 영향도가 5% 감소했어요.”


“라우렌스의 신뢰도가 +3 상승했습니다.”


게임 같기도, 현실 같기도 한 이 세계의 법칙.

하지만 분명한 건, 미나의 선택이 세계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럼, 다음 질문이다.”


라우렌스는 계단을 내려와, 그녀와 마주 선 채 물었다.


“너는 이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낼 생각이지?”


그 말에 미나는 멈칫했다.


‘엔딩…’


늘 회피해왔던 마지막 장면.

늘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뒀던 결말.


그녀는 작가로서,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나는 감정을 가지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라우렌스의 말은, 차갑지만 묘하게… 슬펐다.


그는 고성의 창가에 섰다.

창밖은 어둡고, 하늘은 여전히 달이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 네가 나를 만들었을 때 기억하지?

첫 문단에서 나는, ‘감정을 제거당한 뱀파이어’로 설정되어 있었지.”


“…응.”


“그래.

나는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어.

사랑도, 분노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아무도 내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지.

나를 사랑하던 여주들은, 결국 나를 떠났고.

나는 늘 혼자였어.”


미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한 ‘여주들’은 그녀가 반복적으로 만들었다 지운 여자 주인공들.

매번 이야기가 길어지면, 미나는 부담을 느껴 주인공을 없애버렸다.

그 흔적이 고성의 역사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작가인 네가 나타났어.”


라우렌스가 다가와 미나의 손끝을 스치듯 바라본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네 이야기를 끝낼 준비가 됐다는 뜻이겠지.”


“…후훗. 작가답게 말하네.”


라우렌스는 조용히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어딘가 익숙했다.

미나는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캐릭터’지만,

어쩌면 미나는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투영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억누르고, 완성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



그때, 고성 안쪽 벽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브 퀘스트 해금: 과거의 방 – 라우렌스의 기억 속으로]


틴커벨이 경고하듯 말한다.


“작가님, 이 던전의 첫 번째 핵심 기억이 열렸어요.

저 방에 들어가면, 라우렌스가 처음으로 감정을 억제당했던 기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보고 싶지 않으면요?”


“그럼 이야기의 해답을 못 찾게 되겠죠.

선택은 작가님 몫이에요.”


미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성 깊숙이 열려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너머에는,

어린 시절의 라우렌스가 있었다.


그는 너무도 조용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웃지 마라. 울지도 마라. 감정은 흡혈귀에게 독이 된다.”

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미나가 과거 소설 3화쯤에서 썼던, 단 한 문장이었다.

대충 만든 설정 하나가, 한 캐릭터의 운명을 이렇게나 왜곡시켜버린 것이었다.



미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걸, 고쳐줄게.”


라우렌스의 이야기도,

과거의 설정도,

자신의 무책임한 글쓰기 습관도—


지금부터 다시 써나가기로…..


“…그걸, 고쳐줄게.”


미나의 그 한마디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벽에 가득 새겨졌던 ‘금기’의 문장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감정은 흡혈귀에게 독이 된다.”

“사랑은 파멸로 가는 길이다.”

“그는 외로움을 선택했다.”


모두, 그녀가 과거에 아무렇지도 않게 써버렸던 설정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나의 발밑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오르더니, 작은 스크롤 하나가 공중에 떠올랐다.


[시스템 알림]

새로운 설정 편집권이 부여되었습니다

대상: 뱀파이어 라우렌스

항목: 감정 상태 활성화 여부



“이건… 내 설정을 직접 바꿀 수 있다는 건가?”


미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스크롤이 빛을 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작가님, 라우렌스에게 감정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이거 선택한다고 뭐가 바뀌는 거지?”


그 순간, 라우렌스가 그녀 뒤에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 천천히 미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내 감정을 허락한다면,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될 거야.”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나도 아플 거고, 기뻐질 거고, 결국은— 네가 날 어떻게 끝낼지 몰라 불안해질 거야.”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두려움.


감정 없는 남주였던 그가,

지금은 자기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떨고 있었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와 웃어보고 싶었어.”


그 말에 미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럼 허락할게.”


[선택 완료 – 예]


스크롤이 사라지고, 푸른 빛이 라우렌스를 감쌌다.

그의 심장 위, 붉게 빛나는 문양이 천천히 퍼져나가며 사라진다.


그 순간, 라우렌스가 미세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게, 감정이군.”


그는 놀란 듯 자기 손을 바라봤다.


“내 안에, 뭔가가… 움직여.”


미나는 뭔가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마치 진짜 사람처럼 살아 숨 쉬는 느낌.


그는 더 이상 ‘죽은 설정’이 아니었다.



“근데, 미나.”


“……?”


“내가 너를 보면, 가슴이 아픈데.

이것도 감정인가?”


그 말에, 미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틴커벨이 작게 속삭인다.


“작가님… 조심하세요.

감정은, 사랑을 부를 수도 있고… 비극도 부를 수도 있어요..“


쿵—!


지면이 갑자기 흔들렸다.

천장이 울리고,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건… 뭐야?!”


미나는 중심을 잡기 위해 벽에 손을 댔다.

틴커벨은 빠르게 허공을 날며 외쳤다.


“작가님, 던전이 반응하고 있어요!

라우렌스가 감정을 얻으면서, 원래 설정된 세계의 고정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 당신이 만든 플롯은 ‘비극’으로 끝나는 고정 엔딩이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감정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결말이 불확정 상태가 됐어요!”



미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성 바깥을 향해 달려나왔다.

눈앞엔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고성 뒤편, 폐허처럼 잊혀졌던 공간들이 뿌연 안개 속에서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그곳은… 그녀가 과거에 썼다가 버린 삭제된 설정들,

‘초기 스토리’에서 빠졌던 인물들과 폐기된 플롯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하나가 미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미나가 경계하듯 물었다.


틴커벨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작가님이 한때 주인공으로 설정했다가,

‘매력 없어서 폐기’한 캐릭터예요.”


“…뭐?”


“이 세계에서 폐기된 설정은 던전의 오염 영역이 돼요.

그녀는 지금, 당신의 책임으로 인해 **‘재앙화’**된 상태예요.”



그 여자의 입가가 천천히 비틀리며 웃는다.


“작가님.

기억… 나시나요?”


“…아니, 말도 안 돼… 너는… ‘엘리사’?”


그 이름.

라우렌스와 처음 엮으려다, 너무 평면적이라는 이유로 설정을 전부 지워버린 첫 번째 여주인공.


“당신이 버린 캐릭터들, 이제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끝낼 수 있게 도와줄게요.”


“…끝낸다고?”


“당신의 세계를요.”



그 순간, 엘리사의 발 아래에서 검은 안개가 치솟으며 괴기한 형상이 그녀의 등을 감싼다.

한때 로맨스 소설의 여주였던 캐릭터가,

이제는 스토리 자체를 파괴하는 ‘반(反)작가 시스템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작가님!”


틴커벨이 미나의 팔을 끌었다.


“지금 이 오염을 막으려면,

엘리사의 ‘삭제 이유’를 마주하고,

그녀에게 당신의 ‘진짜 해명’을 해야 해요.

그게 이 던전의 중간 보스전 조건이에요!”



미나는 말없이 라우렌스를 돌아봤다.

그는 조용히 미나의 곁으로 다가오며, 짧게 말했다.


“…내가 널 지킬게.

이번엔, 너 혼자 쓰게 두지 않을 거야.”


“이름, 기억해 주셨네요?”


엘리사는 섬뜩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주위엔 검은 안개가 뱀처럼 휘감기고,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던전의 바닥이 금이 갔다.


“그땐, 고작 세 문단짜리 캐릭터였죠.

‘주인공을 지켜주는 착하고 조용한 여자’.

한 줄 설명으로 요약 가능한.”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러더니 어느 날, 당신은 나를 지워버렸어요.

재미없다는 이유로.

임팩트 없다는 이유로.

라우렌스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그게 뭐였나요?”


엘리사의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증오가 아니었다.

철저한 상처의 색이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끝까지 살아본 적이 없어요.”



그 순간, 라우렌스가 미나 앞에 섰다.


“…그만하지.”


“…라우렌스?”


엘리사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젠 당신도 작가 편인가요?”


“나는 감정을 가진 이상, 선택할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를 지키기로 선택했어.”


그의 한 손이 검은 안개를 밀어낸다.

감정을 얻은 이후,

라우렌스의 힘은 구조적 변화와 함께 소설 내 법칙을 덮는 설득력으로 바뀌고 있었다.


“엘리사.

널 만든 사람은 미나지만,

너를 ‘버렸던 이유’는, 그녀가 널 이해할 준비가 안 됐던 거야.”


“…변명으로 들리네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녀는 널 마주하고 있어.

다시 쓰기 위해서.”



엘리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럼, 그 증거를 보여주세요.

나를 없앤 이유.

그리고… 지금이라도 나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걸.”


미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좋아, 엘리사.

그럼 다시 한 번 널 소개해볼게.”



『엘리사.

조용하지만 어리석지 않은 여자.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그래서 더 강하고, 고요한 물처럼 깊은 사람.

비극이 아닌 이해를 선택하는 인물.

그리고— 한때 내가 외면했던 이야기의 일부.

이제는, 반드시 완성되어야 할 주인공 중 하나.』



그 순간, 검은 안개가 걷히고 엘리사의 몸에서 빛이 피어났다.

눈동자의 색이 붉은빛에서 연한 청록으로 바뀌고,

그녀의 표정에서 슬픔이 해방되기 시작했다.


“…이제야… 진짜로, 내 이름을 들은 기분이네요.”



[시스템 알림]

중간 보스전 종료

‘엘리사’ 캐릭터 복원 완료

오염된 스토리 1개 정화

던전 안정도 +15%


틴커벨이 두 손을 모아 기뻐하며 외쳤다.


“성공이에요, 작가님!

당신이 글을 다시 써준 덕분에, 이 세계의 틈이 닫히기 시작했어요!”



엘리사는 미나를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나처럼 잊히지 않길 바라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원래 자리, 즉 설정상의 역할로 돌아갔다.


미나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진짜, 이제야 알겠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게, 단순히 ‘플롯을 짜는 것’이 아니란 걸.”



그녀의 곁에서 라우렌스가 말했다.


“네가 날 만든 것처럼,

너도… 너 자신을 다시 써나가면 돼.”



다시현실…


“출판사에서요?”


미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잠깐 멍해졌다.

‘상상출판 이정 팀장’

그 이름이 발신자에 찍혀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미나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상상출판의 이정 팀장입니다.”


“아, 네! 맞아요… 제가 미나입니다.”


— “다름 아니라, 지난 공모전에 올려주셨던 샘플 원고 보고 연락드렸어요.

심사위원 평가에서 굉장히 신선하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정말요?”


미나는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원고는, 던전에서 ‘달 없는 밤의 뱀파이어’를 클리어한 직후,

무언가에 이끌리듯 새벽에 단숨에 정리해서 제출했던 작품이었다.


그때는 별 기대도 없이 보내놓고는,

‘또 묻히겠지…’라며 스스로를 달랬던 그 원고.


— “스토리 구조가 치밀하다는 피드백이 있었고요,

특히 캐릭터의 감정선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그래서… 정식 출간 제안 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저요? 제가… 진짜 출간해요?”


— “네.

작가로 데뷔하실 수 있어요, 미나 씨.”



그 말이 끝나자, 미나는 눈앞이 흐려졌다.

어릴 적부터 꿈꿨던 그 순간.

단 한 번도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들 속에서

늘 ‘미완’으로만 남았던 그 이름.


‘작가.’


그 단어가,

이제 현실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뒤, 미나는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됐다. 드디어 한 권, 완성했어.”



그 순간—

책장에서 다시금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또야…?”


미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이번엔 『이혼하지 못하는 마법사』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소설은,

과거의 ‘감정 잔재’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중단했던,

코믹하지만 뼈아픈 이야기.



“작가님!”


틴커벨이 작은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던전 클리어 보상이에요!

선한 카르마 +15, 금전운 +10, 체력 회복 +30!”


“그런 RPG 같은 수치 뭐야…”


“이 세계는 작가님의 내면 세계니까요!

현실도, 이야기도 다 연결되어 있어요!”



미나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 안엔 한 장의 카드와, 작은 메모가 있었다.


“한 편의 이야기를 끝냈다는 건,

한 조각의 삶을 완성한 것과 같다.

계속 써 내려가라.

너는 이제, 이야기의 신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책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좋아.

다음 세계, 받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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