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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취향백과 29화

목적전도:싫은 일 사이에 기다림을 끼워 넣는 기술

스스로를 속여서 달래는 방법에 대하여

by 오늘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원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작은 기척에도 귀신같이 반응하는 이 섬세한 감각이 생존에 아주 유리했겠지만, 아쉽게도 정보화시대에 태어난 탓에 불편한 감정을 남들보다 자주, 빨리 알아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죽고 사는 위험에서는 조금 벗어났으나 남들보다 더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싫은 것도 많습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귀찮고, 어렵기 마련이지요. 그렇다고 사는 동안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서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은 하기 싫은 것을 기다리게 하는 나름의 기술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싫은 일을 기다리게 되는 나만의 목적전도 기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하기 싫은 일 앞에, 하고 싶고 즐거운 일을 슬쩍 끼워 넣는 반칙으로 스스로를 속여 꼬드기곤 합니다. 생각보다 사람의 감정은 순서를 바꾸는 일에 쉽게 속기 마련입니다. 그 사소한 순서의 도치가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앞 단의 수단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전복되어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버티는 힘이 됩니다.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출근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공짜로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받고 다니는 것임에도 뭐가 그렇게 싫은지.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심할 때는 전날 밤 침대에 눕는 순간부터 싫었던 것이 출근길이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완벽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과 그렇지 못한 현실이 부딪히면서 생긴 균열들이 불편함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 의지로, 마음대로 안 되는 공간에 앉아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던 것도 같고요.

하지만 회사를 다니기로 한 것도 내 결정이고, 그렇다면 결정에 책임은 져야 하니 어쨌거나 그만두기 전까지는 출근이라는 것을 계속해야 하는데 몇 날며칠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축 늘어져서 시간 내에 자리에 골인하는 게 목표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했지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목적전도의 기술입니다.


출근이 싫다면 출근하는 길을 즐겁게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출근길 동선이 겹치는 좋아하는 동료 두 분에게 모닝 맛집탐방 제안을 했습니다. 출근길에 1시간 일찍 나와 회사 근처 카페, 베이커리, 아침밥 맛집을 찾아 힐링타임을 갖자고요. 유유상종이라 했던가요. 다행히 취향도, 감성도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복은 있었던 덕에 출근길 목적전도 프로젝트는 쉽게 수락이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맛있는 음식의 조합은 환상적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아침에 잘 떠지지도 않던 눈이 번쩍번쩍 떠지고 내일은 뭐 먹으러 갈까 고민하느라 퇴근도 출근도 즐겁고. 조금 바쁜 날에는 그냥 커피로 때우고 지하철역에서 만나 회사까지 셋이 함께 걸어가는 10분이 전부였는데도 그 10분 때문에 다음날 출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끼워 넣었더니, 그 과정이 마음에 들어서 본래 목적을 잊고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겁니다. 물론, 출근은 지금 생각해도 불편한 감정이 큰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싫은 감정을 살짝 가려주는 필터 같은 게 생겼달까요.


감정이란 것은 참 영리하면서도 단순한 구석이 있어서 순서 하나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하루로 기억되곤 합니다. 예민하다는 것은 싫어하는 것도 많지만 좋아하는 것도 잘 알아채는 법이지요. 싫어하는 것 앞 뒤로 좋아하는 것을 슬쩍 끼워두면 싫은 감정이 조금 순화되는 맛이 있습니다.


여전히 싫은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못되지만,

그래도 싫은 것만 계속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너무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가끔 하기 싫은 일 앞에 좋아하는 일 하나씩을 끼워 넣습니다.


청소하기 너무 귀찮아서 마치 내가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된 것처럼 유튜브로 시티팝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혼자 일인극을 하듯 연기톤으로 움직이면서 내가 하는 건 청소가 아니라 연기다 세뇌하는 것 같은 일들 말입니다. 그럼 청소한 게 아니라 혼자 논게 되잖아요. 뭐, 비록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기 머쓱한 취향이긴 합니다만...


스스로를 속이고 달래는 이 목적전도의 기술 덕분에

나는 싫어하는 일을 무작정 참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조율해 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좋아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덜 싫어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피로도가 조금 더 낮아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 앞에 작은 설렘 하나를 살짝 끼워 넣어보세요.

감정은 순서에 약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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