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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uff Aug 28. 2024

홍상수의 믿음에 관하여.

홍상수의 믿음 (tistory.com)


1.

특권과 믿음은 사랑을 행할 때 필수가결이다. 


"나는 모든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어떤 당연한 것(특권)은 이미 자신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특권을 혹은 믿음을 인지하냐 마냐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인지하려면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가령 연애에 비유해서, 어떤 사람이 '특별'하기 때문에 사랑할 이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들뢰즈는 


"선택은 그것을 제외한 선택받지 못한 것들의 관점"


이라고 말한 바, 다른 사람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 특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권이라는 것은 특권을 갖지 못하는 사람의 관점이다. 매우 계급적인. 하지만 마찬가지로, 선택받지 못한 것들은 그것이 권리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석을 통해서나, 어떤 증거를 통해서 선택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의 주제에서는 벗어나지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통해서 이와 비슷한 무언가를 도출해내고 싶다. 욕망이 없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과 욕망은 동일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 이후'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욕망 이후라는 것은 욕망의 굴레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하고자 꺼낸 것은 아니고, 특권이나 믿음 같은 건데, 평범하게 사람은 생각하고 싶은대로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욕망 이후'에 욕망을 가졌던 본인을 의심하기 쉽사리다. 욕망의 증거는 항상 행동과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욕망 이후'의 증거는 욕망의 표현이 없어졌을 때라고 우리는 쉽게 이해한다. 

그냥 "사랑의 증거가 어딨어?"같은 건데, 우리는 그것이 항상 표현되어야 인지한다.



2.

그래서 여기에서 믿음과 특권이라는 주제가 등장할 수 있다. 내가 어떠한 믿음을 가졌다거나 특권을 가졌다라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믿음과 특권은 뭔가 이상한데, 예시로 


"작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글에 대해서 생각하면 작가가 아닌가?"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솔직히 그러한 대답말고 작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예시로 추상적이지만 표현적인 '숭배'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숭배의 이미지는 아주 센티멘탈하다. 하지만 숭배한다해서 그것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될 수 없는데, 홍상수 감독이 말한대로 '온전한 상태'라는 가정은 믿음의 속성을 나타낸다.



3.

그래서 믿음은 징후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믿음의 징후 이전, 혹은 믿음의 운동인 '숭배'라는 것이 특권이다. 그리고 그것의 조건은 선택받지 못한 것들이다. 

"자기가 느낀 것, 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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