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에 서툰 채로

by 송지영

피가 싱크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손을 베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뎌진 칼날에 스친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살이 생각보다 깊게 벌어져 있었다. 반창고를 감아도 소용없었다. 손끝의 묵직한 통증은 몸 안쪽으로 계속 번졌다.

마음이 앞설 때, 실수는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칼을 쥔 손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갔고, 손놀림은 평소보다 거칠었다. 몸은 부엌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식탁을 지나 침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상처 난 손으로 썰어 둔 재료들을 냄비에 넣고 불을 올렸다.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반창고 아래에서 다시 붉은 흔적이 번지다 결국 넘쳤다. 쓰라림은 가라앉지 않고, 손끝에 매달린 채 따라다녔다.

“나 좀 도와줘.”

남편과 아들이 뛰어왔다. 아들은 우리 집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큼직한 거즈를 찾아와 손가락을 감쌌고, 남편은 그 위를 반창고로 단단히 돌려맸다.

“손을 위로 들어.”

그 말에 괜히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올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잠깐 새어 나왔다. 시키는 대로 손을 번쩍 들었다.


손가락 하나 다친 것뿐인데 역할이 바뀌었다. 나는 환자처럼 침대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통증이 가라앉자, 집 안의 소리들이 또렷해졌다. 싱크대에서는 물줄기 아래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젖은 금속의 울림이 짧게 이어졌다. 익숙한 동선들이, 내가 빠진 채로도 부엌을 채웠다.

그 기척은 이상하게도 지금의 부엌에만 머물지 않았다. 같은 박자, 다른 무게를 가진 이전의 저녁을 데려왔다. 내가 하루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의 저녁을.


어릴 적 나는 아침보다 해가 기울 무렵을 더 기다리던 아이였다. 언덕 위 벽돌집에서 내려다보던 저녁의 색과 공기가 유난히 좋았다. 방 창문은 늘 열려 있었고, 창문턱에 걸터앉아 하늘이 낮아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숙제를 질질 미루다 저녁상 앞에 앉기 직전, 허겁지겁 공책을 펼쳤다. 연필이 사각거리는 동안, 주방도 분주했다.

우리 집의 저녁은 소리로 열렸다. 압력밥솥이 먼저 “칙, 칙” 신호를 보냈고, 도마 위에서는 엄마의 칼이 일정한 박자를 만들었다. “탁, 탁, 탁, 탁.” 말발굽이 흙길을 박차는 듯한 그 리듬은, 어떤 음악보다 듣기 좋았다. 물줄기가 지나가고, 수저가 부딪히면 마지막 순서였다.

“다들 밥 먹으러 나와요.”

부엌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하루를 닫아 주는 신호였다. 그때의 나는 무탈했던 날의 끝을 말이 아니라 청각으로 먼저 알아차리던 아이였다.


저녁 밥상을 기다리던 아이는 이제 없다. 결혼을 하고 친정에 가면, 밥 짓는 소리는 잠을 깨우는 신호처럼 들렸다. 부엌의 소음이 먼저 하루를 일으켰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다 못 참고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엄마, 잠 좀 더 자자고.”

엄마는 태연하게 답했다.

“일어날 때 됐어.”

같은 부엌, 같은 손놀림이었는데 감각은 전혀 달랐다. 저녁의 나는 느슨했고, 아침의 나는 팽팽했다. 달라진 것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는 위치였다. 그때의 나는 일과를 마친 아이였고, 지금의 나는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부엌일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다. 부엌은 내게 편안한 공간이라기보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가야 하는 작업대에 가까웠다.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순간에도, 정해진 시간에 온기를 내어주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나는 그 요구 앞에서 늘 조금 모자랐다. 어긋난 칼질처럼, 박자는 자주 빗나갔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이 서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더듬어 본다. 엄마의 역할은 그리움의 얼굴로 다가오면서도, 동시에 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 "너도 그런 엄마가 될 수 있느냐"라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이미 받은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담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물음 앞에서 자주 작아졌다.


거실에서 아들의 엉성한 설거지 소리가 이어지고, 거기 남편의 말소리가 겹쳤다. 저리 오래 걸릴 일이냐며 몸을 일으킬까 하다 이내 다시 누웠다. 그 소란 속에서도, 저녁은 내가 빠진 채로도 문제없이 잘 굴러갔다.

무던히도 애쓰던 나를, 이제야 삶의 한쪽으로 옮겨 둔다. 욱신거리는 손끝 위로, 잘 해내고 싶어 팽팽하게 당겨두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