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초의 지방간 치료제는 갑상선호르몬을 응용해 개발되었습니다.
2. 지방간은 매우 흔한 질병입니다. 국내 지방간 유병률은 연구에 따라 25.2%에서 51.4%까지 보고됩니다. (진단 방법에 따라 다름) 진단 기준을 초음파로 한정하면 한국인 유병률은 약 30~33% 수준인데, 이는 전 세계 유병률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역시나 남성이 여성보다 유병률이 더 높게 나옵니다.
3. 지방간은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간세포에 지방이 축적되는 (fat accumulation) 현상을 의미합니다. 학계에서는 꾸준히 지방간을 지칭하는 명칭을 바꾸고 있는데, 초기에는 간 손상이 술과 연관이 있냐 없냐가 기준이었다면, 최근에는 비만, 인슐린 저항성과 같은 대사질환(MASLD, Metabolic dysfunction-Associated Steatotic Liver Disease)과의 관련성에 더 주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4. 최근 FDA의 허가를 받은 최초이자 유일(?)한 지방간 치료제, 레즈디프라에 대한 소개로 지방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5. 갑상선 기능이 떨어진 환자에게 이상지질혈증이 자주 동반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반대로 갑상선 기능 항진증 환자는 중성지방과 LDL 콜레스테롤이 낮게 나오는 경향이 있고 지방간도 적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체중 변화와 관련해 나타나는 간접적인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6. 그런데 연구를 진행할수록 갑상선이 콜레스테롤과 지질 대사를 직접 조절할 수도 있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습니다. 마침내 갑상선 호르몬과 결합하는 수용체를 가진 기관, 즉 갑상선의 명령을 받는 기관 중에 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갑상선은 간을 통해 지질 대사에 관여했던 것입니다.
7.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갑상선의 기능은 대부분 THR-알파 수용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장, 뇌 등에 많이 분포한 알파 수용체는 갑상선 호르몬과 결합하여 심박수와 체온을 올리는 등 스트레스에 대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명 활동을 조절하는 데 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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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간에 있는 갑상선 호르몬 수용체는 THR-베타로 종류부터 다른 장기와 다릅니다, 하는 일도 이색적(?)입니다. 갑상선 호르몬이 간의 THR-베타 수용체에 결합하면, 간은 LDL 수용체를 많이 만들어 혈액을 순환하던 LDL 콜레스테롤을 조기퇴근시켜 담즙으로 변신시키고 (마치 불포화지방산처럼), 지방산을 합성하는 과정도 억제되어 출고 패키지인 VLDL도 줄어듭니다. 갑상선 항진증 환자분들이 콜레스테롤 수치가 잘 나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9. 이뿐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갑상선 호르몬은 간에 존재하는 지방을 태워 에너지로 쓰게 만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간 미토콘드리아가 갑상선 호르몬의 명령을 받아 그 수가 늘어나고 더 활발히 작동해 지방산을 연료로 삼아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10. 반대로 지방간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THR-베타 수용체의 기능이 손상되어 있거나 현격히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발견됩니다. 갑상선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간에서는 갑상선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됩니다. 선후가 어찌 되었든 간에 지방간 환자들은 간에서 지방을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지방산이 계속 축적되어 지방간이 심화됩니다.
11. 과학자들은 지방을 태우는 갑상선 호르몬의 효과에 주목했습니다. 뾰족한 수가 없었던 지방간의 치료제로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저용량의 갑상선 호르몬을 지방간과 당뇨 치료제로 써본 연구도 있었습니다. 물론 알파 수용체도 함께 자극되는 바람에 가슴 두근거림, 발한, 불면 등의 증상이 동반되어 널리 쓰이진 못했습니다.
12. 그래서 과학자들은 간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그러니까 갑상선 호르몬 베타 수용체에만 결합하는 약을 개발해 내는데 집중했습니다. 넘치도록 많이 쌓여버려 간을 번질번질하게 만들 정도인 지방을 태워주는 효과라니, 개발만 된다면 지방간의 이상적인 치료제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13. 2024년 3월, 갑상선 호르몬 베타 수용체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신약, 마드리갈 파마슈티컬스(Madrigal Pharmaceuticals)의 레즈디프라가 FDA의 가속 승인을 통해 최초의 공식적인 지방간 치료제로 허가받습니다. 임상 3상을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겨우 중간결과만 나왔을 뿐인데도 시판 허가가 나왔으니 말 그대로 파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14. 그럴 만도 했습니다. 지방간의 치료제가 전무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지방간이라는 병명을 흔하게 자주 접하다 보니 기껏해야 ‘복부 비만’ 동의어 정도로 여기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지방간은 간경화와 간암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질환입니다. FDA는 가속 승인의 이유를 설명하며 생명을 위협하거나 심각한 질환임에도 불가하고 치료제가 전혀 없다 (Unmet Medical Need)는 점을 들었습니다.
15. 레즈디프라의 1년 중간 결과 또한 대단했습니다. 실제 조직 생검을 통해 간 섬유화 정도를 1단계 이상 되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흉터처럼 딱딱해져 버린 간 조직을 회생하게 만든다니, 이것은 추후 간경화나 간암의 발생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을 의미했습니다.
16. 앞서 말씀드렸듯이 레즈디프라는 현재 가속 승인된 약물이므로 추후 장기 임상 결과를 통한 추가적인 효과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지방간의 치료제가 하루빨리 도입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