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헌법」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제2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제2항에 명시된 국민주권주의는 국가의 의사결정이 종국적으로 국민에 의해서 이뤄짐을 의미한다. 즉「헌법」을 제정하는 힘은 국민만이 독점하며, 공동체 의사결정은 항상 국민에게 그 근거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주권주의 사상은 서구의 절대왕정 시기에 전제군주제에 대항하는 성격으로부터 시작됐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1)를 계기로 권리청원(2)과 권리장전(3)의 과정을 거쳐 미국의 버지니아 권리장전(4)과 독립선언서(5)에 구체적으로 명문화됐다. 이처럼 국민주권론이 처음으로 규정된 것은 미국의 버지니아 권리장전과 독립선언서이며 이후 프랑스 인권선언(6)과 각국의 헌법에 규정됐다. 정치·철학적으로는 근대 독일의 법학자이며 정치철학자인 요하네스 알투시우스(7)("체계적 정치학")가 국민주권론의 창시자이고, 뒤를 이어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8)("통치론")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장자크 루소(9)("사회계약론")에 의해 국민주권론의 이념이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도 1948년의 제헌헌법 이후에 줄곧 국민주권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이러한 국민주권주의를 형성하기까지는 여러 과정이 있었으며, 비록 제헌헌법부터 명문화됐지만 실제적 의미의 국민주권주의가 실현되었는지 의문스러운 시기도 많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글쓴이는 우리나라 근·현대사(근대사 기준 1863년 고종 즉위부터, 현대사 기준 1945년 광복 이후부터)에 발현된 국민주권주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우리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국민주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제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을 갑신정변으로 보고 이때부터 고찰한다.
(脚註)
(1) 1215년 영국 존왕이 귀족들의 강압에 따라 승인한 칙허장으로, 대헌장(大憲章)으로 불린다. 1214년 프랑스 내 영지를 모두 빼앗겨 실지(失地) 왕이라 불린 존왕의 실정(失政)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존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들의 요구 사항에 관한 문서이다. 본래는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문서였으나, 이후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에 대항해서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典據)로 이용됐다. 특히 일반 평의회의 승인 없이 군역 대납금과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근거로, 또 자유인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 의한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체포·감금할 수 없다고 규정한 제39조는 보통법재판소에서의 재판 요구 근거로 이용됐다. 이처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에서 항상 생각게 하고 인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됐다. 미국에서는 이 대헌장을 현대적 자유의 주춧돌로 생각하며, 영국에서도 영국 의회와 헌법의 중요한 기초로 여긴다.
(2) 1628년 영국 하원에서 기초해 그해 6월 7일 찰스 1세의 승인을 얻은 국민의 인권에 관한 선언이다.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부왕 제임스 1세의 절대군주제를 따라 과중한 과세와 강제공채, 군대의 민가에서 강제 숙박, 군법의 일반인 적용 등을 통하여 계속적인 전제정치를 행사했다. 1628년 에스파냐 등과의 전쟁 비용에 궁색해진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하자, 의회는 강제공채와 불법투옥 문제를 둘러싸고 왕과 대립했고, 하원의원이었던 E. 코크 등이 중심이 돼 국왕에게 청원이라는 형식으로 권리선언을 한 것이 곧 권리청원이다. 그 내용은 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과세나 공채도 강제되지 않는다는 것,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체포·구금되지 않는다는 것, 육군 및 해군은 인민의 의사에 반해 민가에 숙박할 수 없다는 것, 민간인의 군법에 의한 재판은 금지한다는 것, 각종의 자유권을 보장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 청원은 많은 선례를 인용해 영국인 전래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고 당면한 사태를 구제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주권이 국왕으로부터 의회로 옮겨지는 계기가 됐고, 이에 영국 헌법상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후에 W. 피트는 이 권리청원을 마그나카르타 및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헌법의 성경(聖經)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왕은 권리청원을 승인한 이후에도 국정을 독단으로 운영했으며, 1629년 의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의회의 지도자를 투옥한 뒤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정치를 했다. 이것이 영국 청교도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3) 권리장전은 영국의 명예혁명의 결과로 이루어진 인권선언이다. 1642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의회 파는 전제적인 찰스 1세에 맞서 청교도혁명을 일으켰다. 오랜 내전을 거쳐 1649년 의회 파는 마침내 국왕인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국을 선언했다. 크롬웰이 죽은 후 1660년 왕정복고에 성공한 찰스 2세는 의회와의 충돌을 피했으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전제정치를 감행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쫓겨났고,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남편인 신교도 오렌지 공 윌리엄을 공동 통치자로 추대했다. 이들은 권리선언을 수락하고 왕위에 올랐다. 1689년 의회는 의회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권리장전을 요구해 통과시켰다. 권리장전은 국왕과 의회가 주권을 둘러싸고 10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립한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또한 입헌군주제를 확립함으로써 영국의 절대왕정을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영국 헌정사상 큰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미국 독립선언과 프랑스 인권선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4) 버지니아 권리장전은 미국인 조지 메이슨이 기초해 1776년 6월 12일 버지니아 의회가 채택했다. 기본권에 대한 웅변적인 내용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모방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이후 프랑스 인권선언문에 크게 기여했다. 버지니아 권리장전은 총 16조로 구성됐으며 국민주권에 관한 내용은 제1~3조에 있다. 제1조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게 자유롭고도 자주적이며 일정한 천부의 권리들을 갖고 있는 바, 인간들이 한 사회의 성원이 될 때, 예컨대 생명과 자유의 향유와 같은 그러한 권리를 후손들로부터 박탈할 수 없다. 제2조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귀속되며, 따라서 인민으로부터 나오며, 그리고 행정 장관들은 인민들의 수탁자이자 종복이며, 인민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제3조 정부는 인민, 국가, 혹은 지역사회를 위한 공동의 편익과 보호와 안보를 위해 제도화되며, 혹은 마땅히 제도화돼야 하며, 그리고 어떠한 정부라도 부적절하거나 혹은 상기의 목적들에 위배될 때에는 그 공동체의 대다수 성원은 그들의 정부를 개혁하거나 개편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는 의심의 여지도 없고, 양도할 수 없고 무효화할 수 없다.
(5)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1801년 제3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해, 1776년 7월 4일 대륙의회에서 의결했다. 이 선언서는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가지며 자유, 평등과 인민주권의 확립을 이루려는 시도에서 천부인권을 천명하고 로크의 사회계약설의 영향을 받아 인민주권과 저항권을 명시했다. 그 주요 내용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또는 폐지해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오늘날 미국은 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7월 4일을 독립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6) 프랑스혁명 중인 1789년 8월 26일, 국민의회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명칭으로 선포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총 17조로 구성되며 제1조는 국민의 기본권, 제2조는 저항권, 제3조는 국민주권에 관한 내용이다. 즉 제1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로우며 평등하게 태어나고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일반적인 선에 기초해 마련된다. 제2조 모든 정치적 단결의 목적은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자연권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권리란 자유, 재산권, 안전 및 억압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국민으로부터 직접 유래하지 않는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프랑스 인권선언은 1791년 프랑스 헌법의 전문에 채택됐고, 이후 세계 각국의 헌법과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7) 요하네스 알투시우스(1557~1638)는 독일의 법·정치철학자로 사회계약설 수립자의 한 명이다. 칼뱅파 특유의 인민주권론과 저항권 이론 등의 통치계약설을 전개했으며 근대 대륙법 개념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1581년까지 쾰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하고, 바젤에서 로마법을 연구했다. 1586년 헤르보른시의 칼뱅주의적 고등법원 학교의 교수가 되어 로마법과 철학을 가르쳤다. 1604년 이후 죽을 때까지 엠덴시의 시장을 지냈다. 주저 "체계적 정치학"(1603)에서 칼뱅주의 입장에서 반군주주권 이론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즉, 사회구성의 기초를 계약에서 구하고 이것을 사회계약과 통치계약으로 구별해 사회단체를 가족·조합·도시·주(州)·국가의 5단계로 나눴다. 그리고 각 단체는 작은 단체의 계약적 연합이 되는 것이라고 규정해, 국가를 다원적 사회구성의 하나로 생각했다. 또 주권은 공동체로서의 인민에 있다는 ‘인민주권론’과 ‘저항권’을 인정하고, 그것은 개인의 권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체의 장에 의해 행사돼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계약설을 중심으로 사회·국가의 구성을 설명한 점에서 H. 흐로티위스나 J.J. 루소와 같다. 그러나 칼뱅파 특유의 인민주권론과 저항권이론 등 통치계약설을 폄으로써, 왕권의 절대주의에 관한 J. 보댕의 설과는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는 근대 대륙법 개념론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8) 존 로크(1632~1704)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로서 계몽철학 및 경험철학론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공부했다. 특히 데카르트 철학과 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가졌고 반스콜라적이다. 그의 주요 저서인 "통치론"에 드러난 로크의 철학은 여러 면에서 홉스의 것과 대조된다. 비록 홉스로부터 자연권에 대한 영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 상태와 절대왕정에 대한 견해에 이르기까지 홉스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홉스도 사회계약을 ‘동의’라는 방식을 통해 설명했다. 즉 ‘다중’을 하나의 통합된 ‘인민’으로 전환시키는 개인들 사이의 계약, 그리고 한 사람의 주권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복종하기로 하는 약속을 정치체제의 형성에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다. 문제는 권리를 양도받은 주권자의 변경은 불가능하고, 절대적이며, 불가분 한 권력이다. 반면 로크는‘명시적인 동의’를 사회계약의 전면에 부각하고 있으나 어떤 권력도 인민이 동의한 목적에 상응하지 않을 때에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때 주권자가 향유하는 권력은 정치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신탁된 것일 뿐이며, 홉스가 옹호했던 절대왕정은 부정했다. 로크의 정치사상은 근대 자유주의에서부터 현대 자유 지상주의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원용되고 있다. 특히 근대 자유주의 전통에서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다. 그의 자연권 사상은 천부인권으로 발전했고, 그가 말했던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우위는 삼권분립으로 진화했다. 아울러 로크가 언급한 ‘저항권’은 자유주의의 정신이 됐다.
(9) 장자크 루소(1712~1778)는 스위스 출신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로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매여있다”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이므로, 대신 사회계약으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의지 중 공동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들이 모여 보편의지를 이루게 되며 보편의지가 법으로 나타난 형태인 주권은 항상 국민에게 속하며, 양도될 수 없으며 국가는 대리인으로서 법을 집행할 뿐이다”라고 설파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방식은 작은 사회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 수준의 큰 단위로 넘어가면 실현되기 어렵다. 한편 개인은 일반의지를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고, 법은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므로 개인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 따라서 이 보편의지의 실현을 위해 루소는 강력한 직접 민주주의를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