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가려는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구미(歐美) 자본주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 위협(10)을 높여가고 있었다. 이웃 나라 일본도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메이지(明治) 유신(11)을 일으켜 부국강병의 기치를 높이며, 조선의 강화도 해안침투와 불평등수호통상조약(12)을 강요하는 등 여러 가지로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역관, 의원 등)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 조선 사회의 사회, 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 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13)이 형성됐다. 19세기 중엽 조선의 선각자인 박규수(14)·오경석(15)·유홍기(16)가 주도한 개화사상과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일부 젊은 관료들은 서구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 및 서구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사회의 개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러한 개화사상에 따라 조선의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한 젊은 관료들의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17)·박영효(18)·서광범·홍영식·서재필 등의 양반 출신 청년지식인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한 이후,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해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세력 즉 개화파를 형성했다. 그런데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하면서도 실현 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냈다.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의 온건 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민씨 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나라 안팎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忠義契)를 통해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운동의 수단으로 당시 서구 근대문물에 관심을 보이던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 정부의 해외 시찰 정책, 즉 일본 수신사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 청나라에 영선사 파견 등에 김옥균·박영효·김홍집·김윤식 등 개화파가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 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청년을 모집해서 일본의 군사사관학교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등에 유학하게 함으로써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 등을 배우게 했다. 일본을 다녀왔던 박영효의 주청으로 1883년 8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해서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19)를 발행했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군주제와 삼권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했다. 그런데 민씨 정권이 부분적인 개화 정책에 국한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 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이러한 와중에 1882년 7월 일어난 임오군란(20)은 수구적인 민씨 정권과 급진 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해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속방화(屬邦化)를 획책했고,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해 정권 유지를 도모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씨 정권이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민씨 정권은 청국에 구원 요청했으며, 청국은 이때 군대를 파견해 임오군란을 진압한 다음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키로 결정했다. 그래서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해 주둔시키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청국 군함에 초청한 후 납치해서 청국의 톈진(天津)으로 유폐시켰다. 청국은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민씨 정권을 다시 수립했지만 청군을 철수시키지 않은 채,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속방화를 위한 간섭정책을 자행하고 조선의 자주독립권을 침해했다.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 1834~1884)과 위안스카이(21)(袁世凱, 1859~1916, 1911년 신해혁명 이전은 한자음으로 이후는 중국어로 인명을 표기)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陳樹棠)도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청의 실권자 이홍장(李鴻章, 1823~1901)(22)이 직접 파견한 묄렌도르프는 해관(海關, 현 세관)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권까지 장악하려 했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얼마나 심하게 침해했는가는 다음 몇 가지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청국은 임오군란 진압 직후인 1882년 음력 8월 28일 민씨 정권에게 압력을 가해가장 불평등하고 수많은 특권을 허용하도록 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게 하고 전문(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써넣었다. 심지어 재정 고문 진수당은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榜文)을 공공연하게 남대문에 붙이기까지 했다. 또한, 청국은 조선 정부에 대해 “무릇 외교에 관한 일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라고 강요했으며, 청장 오장경은 고종을 면전에서 협박까지 했다. 또한 한성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매우 심했다. 뿐만 아니라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했다. 그 결과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치적 지위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또한 민씨 정권도 임오군란에 의해 정권이 한번 붕괴됐다가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하자, 청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순응해 나라의 독립이 크게 침해되고 자주 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정권 유지를 위한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들에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가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도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1884년 봄 안남(베트남) 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나라와 프랑스의 대립은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 줬다. 마침내 1884년 8월 안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3,000여 명 중절반을 철수시켰다.
2. 정변의 준비
급진 개화파는 이러한 정세변화와 일본의 접근에 다시 용기를 얻었다. 1884년 9월 17일, 박영효 집에서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제 민씨 정권의 친청(親淸) 수구 정책에 대항해, 종래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에서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해 개혁을 실현키로 했다. 그들은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던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 종래의 신식 군대 가운데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 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정변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켰을 때 민씨 정권을 비호하는 청군의 반격에 대한 군사 문제와 개혁 정책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재정 문제를 일본을 이용해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 역시 개화파의 군사·재정 문제를 도와 조선 진출에 걸림돌이던 청과 민씨 정권을 내몰고 조선 침략에 우위를 차지할 속셈으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1884년 11월 25일 김옥균과 만나 정변에 대한 세부 계획을 협의했다. 이때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정변 시 일본 군대의 동원과 이후 개혁 정책에 필요한 차관 지원을 약속했다(23).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오후 6시경,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해 민씨 척족 세력과 수구파를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과 왕비를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일본 일본군 200여 명과 50여 명의 조선 군인으로 호위토록 해 정권을 장악했다.
3. 갑신정변 새 정부 구성과 14개 조(條) 정강
급진 개화파는 이튿날인 12월 5일 새 정부의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새 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조선 왕실과 연합한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개화파가 개혁 추진을 위한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 급진 개화파의 권력이었다. 최고 권력기관인 의정부의 좌의정에는 홍영식이, 군사·사법·경찰·외교·통상·인사·재정 등 정부 중추 기관의 자리에는 김옥균(호조 참판)을 비롯해 박영효(전후 영사 겸 좌 포장), 서광범(좌우 영사·우 포장 겸 외무독판 대리), 서재필(병조 참판 겸 정령관), 박영교(도승지) 등이 배치됐다. 이어 12월 6일에는 새 정부가 앞으로 단행할 개혁정치의 내용을 담은 14개 조로 된 ‘신정강’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①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해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해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 된 죄인을 다시 조사해 석방시킬 것, ⑪ 4 영을 합해 1 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해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토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정강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그동안 조선의 개혁을 위해 발전시켜 온 개화사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개혁 활동의 총체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은 12월 5일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한 경기도 관찰사 심상훈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왕후 민 씨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그들의 계획을 전하도록 했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왕후 민 씨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을 강하게 주장하자 국왕 고종도 이를 지지했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를 분명히 했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경우궁 옆 이재원(고종의 사촌 형)의 집인 계동궁으로 국왕과 왕후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었으나,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왕후는 계속해 창덕궁 환궁을 요구했고 국왕인 고종 또한 왕후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끝까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12월 5일 국왕과 왕후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겼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왕후 민 씨가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12월 6일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공격했다. 이때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개화파와 약속을 어기고 창덕궁을 수비하던 일본 군인을 철수시켰다. 결국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피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이른바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 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 정부에 물었고, 1885년 1월 9일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 원, 일본공사관 개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24)을 체결했다. 또한, 일본은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됐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파병 구실이 됐다. 한편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은 일본에서 10여 년 동안 망명을 하면서 일본 정부의 냉대로 갖은 고초를 겪다가, 당시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을 만나 자신의 복안을 담판 짓고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94년 3월 27일 상하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이일직이 포섭한 홍종우(25)에게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암살당했다.
4. 의의와 한계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개혁운동이다. 신(新) 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했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해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을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상공업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정권 탈취와 개혁에 일본을 이용하려던 그들의 주관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침략자를 원조자로 끌어들이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갑신정변은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진 근대 한국의 정치적 개혁운동이었다. 그것은 첫째, 세계사적으로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정열적으로 중세국가 체제를 청산하고, 부강한 자주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최초의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둘째,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줬다. 갑신정변이 추구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문화와 자주적 근대 국방의 건설은 그 뒤 모든 개화운동과 민족운동이 계승해 추구한 것이었다. 셋째, 한국 민족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기원을 만들어 줬다. 즉 갑신정변의 정치적 독립운동은 당시 중국의 조선 속방화 정책에 대한 저항 형태를 가진 것이었지만, 이 운동의 내부 성격은 모든 외세의 자주권 침해와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추구가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이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을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넷째,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그 뒤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해 그것을 비판하고 반성한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한편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는 청군의 무력 개입이다. 조선 주둔군 총독의 부하였던 위안스카이는 본국의 훈령이 없다는 상관의 주저에도, 일본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전격적으로 무력 공격해, 개화파가 지휘하는 소수의 군사들을 진압했다. 둘째는 정변을 지원하기로 사전에 밀약했던 일본의 배신이다. 즉 정변 초기에는 일본군 200여 명을 경우궁으로 파병해서 고종과 왕후를 경호토록 지원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한 1884년 12월 6일,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의 내정에 더는 개입하지 말라는 훈령을 받은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군을 창덕궁에서 인천항으로 철군시킨 것이다. 셋째는 김옥균 등 젊은 개화파 인물들을 이용해서 국정 장악력을 높이려 했던 고종이 막상 정변이 진행되자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다고 느끼고 정변을 진압하는 태도(26)로 나왔다. 넷째는 정변 자체가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몫을 했다. 예를 들어 지조법 개혁방침은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당시 반봉건 투쟁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민중을 고려하지 못했고, 그 결과 정변 당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는 급진 개화파의 대다수가 봉건 대지주에 기반을 둔 계급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정변 참여자 중 막내 격인 서재필은 후일 갑신정변 회고에서 “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앞뒤 재지 않고 반대만 내세운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함 때문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됐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하기는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라며 일반 민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탄식했다. 이후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이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돼 1895년 12월 귀국하자, 민중계몽(독립신문), 청년교육(배재학당 강연), 자주독립(독립협회)에 전념한 것도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의 계몽과 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이러한 한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단편적이나마 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개혁 운동이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5. 정변 주역 김옥균에 대한 평가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실로 다양하다. 갑신정변 동지인 박영효와 서재필도 엇갈리게 평가한다. 한국 근대사 초기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김옥균에 대한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평가야말로 갑신정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김옥균을 심도 있게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1886년 일본 정부로부터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000여 km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된다. 이때 일본 바둑의 일인자 슈에이(秀榮) 혼인보(本因坊)가 찾아와 3개월 동안 머물며 김옥균과 수담(手談)과 담론(談論)을 나눴다. 당시 일본의 혼인보(本因坊)는 바둑 실력뿐만 아니라 인품도 갖춰야 하므로, 슈에이(秀榮) 혼인보(本因坊)가 깊이 존경한 김옥균의 도량과 인품을 대체로 짐작할 수가 있다. 박영효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청지기 이규완은 “김옥균은 사람을 처음에는 소홀히 대하다가도 나중에 애지중지했으며, 박영효는 처음에는 친근하게 대하다가도 나중에 소원하게 대했다”라고 말한다. 즉 김옥균은 비교적 대범하나 박영효는 깐깐하게 간섭했다고 두 사람을 평가했다. 박영효의 심복마저도 김옥균을 더 높이 평가한 셈이다. 또한 조선 정부에서 김옥균의 암살을 위해 파견한 송병준(27)은 김옥균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식과 포부에 압도당하여 암살을 포기하고 스스로 귀국했다. 갑신정변 동지인 서재필은 “김옥균은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하게 바란 위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반면 박영효는〈동광〉1931년 3월호의 춘원(이광수)과 대담에서 정변 실패의 책임을 김옥균에게 돌리면서 “김옥균은 기획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계획대로 실행하지 않은 것이 실패 요인”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김옥균은 심려장지(深慮長智)가 부족하고, 맡은 일에 책임감이 부족하며, 남의 일에 잘 간섭해 일을 망치는 예가 빈번했다”라며 김옥균을 폄하했다. 갑신정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시찰단으로 함께한 후 개화파의 일원이 돼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하게 지낸 윤치호(28)도 김옥균에 대해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러운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해 학문뿐 아니라 문장과 시, 글씨, 그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했다. 말년에 김옥균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박영효도 “김옥균의 장처(長處)는 교유(交遊)라고 할 수 있소. 교유가 참 능하오.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 잘 쓰고, 글씨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오”라고 한 것을 보면 김옥균이 얼마나 다재다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옥균의 마지막이 된 상하이행을 오랜 후원자인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29)와 외무차관 하야스 다다스, 심지어 박영효마저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 만났던 일본인 미야자키 도오텐에게 “이홍장이 단 5분 만이라도 담화를 허락한다면 그를 설복시켜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라고 자신했다는 것처럼, 김옥균은 매사를 결정하고 처리하는데 과신할 뿐만 아니라 계획하는 일을 유리하게 해석하고 그 결과마저 낙관적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그의 지나친 자신감과 낙천성이 정변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데 흠결이 아니었는지, 정변 이후 사이가 멀어진 박영효의 신랄한 비판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0)
① 병인양요(1866년 10월):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를 학살한 병인박해(1866년)를 보복하기 위해 주중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 점령한 사건이다. 이때 프랑스함대는 강화도에 있는 많은 문화재(고도서 345권)와 은괴(19 상자) 등을 약탈했다.
② 남연군묘 도굴사건(1866년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866년 조선을 방문해 2번이나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2년 후 중국 군함을 용선해 독일 군대로 위장한 후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서 통상의 협상 도구로 이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③ 신미양요(1871년 6월): 1866년 대동강에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방화 사건의 보복과 강제 개항을 위해 미국 함대 5척(로저스 사령관, 군인 1,230명)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11) 일본 메이지(明治) 왕 때 막번 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변혁과정이다. 그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8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7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때 일본 막부는 미국의 위세에 눌려 1854년 3월 미·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 7월 28일 미국, 8월 18일 네덜란드, 8월 19일 러시아, 8월 26일 영국, 10월 9일 프랑스와 통상조약(당시 고메이 왕 때 연호를 따서 안세이조약이라고 함)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일본 왕의 칙허 없이 막부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도사번의 무사인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 조슈, 도사번이 동맹(삿조·삿도 맹약)해 막부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상소하고 통치권을 일왕에게 이양했다. 하지만 11월 15일 대정봉환을 주도했던 사카모토 료마가 막부에 의해 피살되자, 12월 9일 메이지유신 3 걸로 불리는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반란을 일으켜 막부를 붕괴시킨 후, 이듬해인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로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다. 이후 메이지 신정부에서 실권을 장악한 유신 3 걸이 서로 반목해 1877년 2월 내전인 세이난(西南) 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패퇴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9월에 자살하고, 이듬해인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도 암살돼 사쓰마 번 세력은 몰락하고, 1878부터는 조슈번 세력들이 메이지 정부의 실권을 장악케 됐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본격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구미를 모델로, 관 주도의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했다. 이때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됐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됐다. 또, 국제적으로 제국주의가 되어 천황제의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 분야에 실현케 됐다.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 태도와는 달리 주변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도발이 대표적이며, 그다음 단계가 1910년 무력으로 한국을 병합한 것이다.
(12)
① 운요호사건(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를 핑계로 강화도 앞바다에 침투한 후, 조선 수군을 공격해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이다.
② 강화도조약(1876년 2월): 1875년 9월 일어난 운요호사건을 트집 잡아 체결한 불평등 수호통상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제물포가 개항됐다.
③ 제물포조약(1882년 8월): 1882년의 임오군란에 개입한 일본이 자국의 피해배상금과 경비병 주둔, 수신사 파견 등을 요구한 불평등 조약이다.
(13)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 문물의 수용과 근대적 개혁을 주장했던 정치사상이다. 개화사상은 실학(實學)의 사상적 영향을 바탕으로 청의 양무운동에서 나타난 자강론(自强論)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나타난 문명개화론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의 북학파(北學派) 사상을 주로 계승했으며, 19세기 중엽의 김정희·이규경·최한기 등의 사상과도 닿아 있다. 1850∼60년대에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1870년대에 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 등에 의해 발전됐다.
(14) 박규수(1807~1877)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평안감사 재직 때인 고종 3년(1866)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온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처리하고 우의정까지 오르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또한 국정 운영과 두 차례 중국 방문(1861ㆍ1872년) 등 여러 경험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풍부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박규수는 고종 11년(1874) 우의정에서 물러난 뒤 김옥균· 박영효·박영교·김윤식·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 그 뒤 개화파의 핵심 인물이 되는 젊은이들을 지도하면서 지냈다. 1875년 일본 군함의 운요호사건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1876년) 2월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박규수는 자주적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신의 식견을 젊은 개화파에게 전수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고종 14년(1877년 1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개화파에게 충분하고 강력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5) 오경석(1831~1879)은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33인)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중인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에 왕래, 신학문에 눈을 떠서 "해국도지" "영환지략"등 선진서적을 들여와 벗인 유홍기에게 읽게 하고,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소장 정치인들을 지도해 개화파를 형성했다. 1869년 통정대부, 1873년 가선대부, 1875년 자헌대부가 되고 이듬해 한학당상역관으로 좌의정 박규수와 함께 나라의 문호개방을 주장,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1877년 숭정(崇政) 대부를 거쳐 숭록(崇祿) 대부가 됐다.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흥선대원군의 위협을 받았다.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는 전자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명성을 얻었다. 편서(編書)에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이 있다.
(16) 유홍기(1831~1884?)는 중인 역관의 집안에 태어나 한의업에 종사했다. 불교를 깊이 신앙했고, 역사에도 통달했다. 신체가 장대하고 언변이 유창했다. 이웃에 살던 벗 오경석이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등 다수의 서적을 연구해 오경석에 이어 일찍이 개화사상을 가지게 됐다. 오경석과 상의해서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뽑아 그들의 개화사상과 오경석이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서적들을 교육시켜 나라에 혁신을 일으키는 정치를 계획했다. 1869년 박규수가 평안감사에서 한성판윤으로 전임돼 상경하자, 오경석과 함께 박규수에게 개혁 방안을 제안해 수락받았다. 이에 1869년 말 개화사상의 세 거두인 오경석·유홍기·박규수는 개화사상의 동지로서 결합했다. 1870년 초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김윤식·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 다수의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했다.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로서의 초기 개화파가 형성됐다. 그는 박규수·오경석과 더불어 초기 개화파의 스승이며 지도자가 됐다. 강화도조약 이듬해인 1877년에 박규수가 죽고, 오경석도 1879년에 죽었다. 개화사상의 세 거두 중 홀로 남아 청년 개화당들을 지도했다. 그가 당대의 뛰어난 청년 개화당들이 모두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렀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자신이 다니던 서대문 밖 봉원사로 만남의 장소를 옮긴다. 그들은 봉원사에서 은밀하게 만나 개화에 관련된 책을 강독하고 의식을 심화하는 토론을 계속했다. 비밀을 유지키 위해 수유리 화계사와 동대문 밖 보문사로 장소를 옮기기도 했다. 1878년 봄 무렵 부산 범어사 승려 이동인(1849~1881? )이 상경해 봉원사에 머물렀다. 이동인은 1877년부터 일본 불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부산의 초량에 설치된 일본 본원사 별원에 출입하면서 일본 승려 오쿠라 엔싱과 교우하며, 일본어와 일본의 근대적 개혁을 알게 된 선구적 개혁 승려였다. 사회 개혁과 지성의 피가 끓어오르는 승려 이동인은 일본의 사정을 전할 겸 한양으로 상경한다. 서대문 밖 봉원사에 머물며 불자인 유홍기와 알게 됐다. 유홍기는 조선의 최고 엘리트인 김옥균 박영호 등의 개화파 인사들을 소개하고, 그들은 이동인으로부터 최신 일본 정세와 지식을 듣고 놀랐다. 이제 개화의 바람은 청이 아니라 일본에서 불게 됐다. 때마침 1876년 일본과의 수교가 이뤄지고 1차 수신사로 김기수가 다녀온 영향도 있었다. 그들은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켜 개혁의 실상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이동인에게 여비를 제공했다. 1879년 6월 이동인은 일본 본원사의 주선으로 부산에서 일본 교토로 입국한다. 교토에서 9개월 체류하며 교토-오사카-고베를 연결하는 철도(1872년 개통)를 보고 깜짝 놀랐다. 1880년 3월에는 도쿄의 본원사로 이동한 이동인은 더욱 놀랐다. 도쿄-요코하마까지 철도는 물론, 서양 기선과 과학기술 등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정치는 메이지유신을 이뤄, 천황을 정점으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내각은 유럽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동인은 이때 일본의 지성이라 불리는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근대화에 대한 강론을 들었고, 서양 외교관들도 접촉하게 된다. 초대 조선의 일본공사 하나부사도 부임 전에 그를 찾아온다. 때마침 1880년 7월에 2차 수신사로 일본 방문을 한 김홍집 일행과도 만난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동양 정세에 정통한 이동인의 일본 방문 경위를 듣게 된 김홍집은 감탄하게 된다. 김홍집 일행과 같이 귀국한 이동인은 정부에도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이동원은 봉원사에서 개화파 인사들을 재회하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저술한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을 전달하고 램프, 석유, 성냥도 소개했다. 후일 서재필은 회고록에 “이동인이 선물한 성냥을 처음 봤는데, 그으면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요술을 보는 듯했다”라고 적었다. 부싯돌 문명 조선에는 성냥 문명이 대단한 쇼크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부터 김옥균은 노쇠한 중국보다 신흥 강국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게 된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만난 김홍집의 주선으로 당대 실권자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1860~1914)을 만난다. 민영익은 민비 집안이지만 젊고 개혁적이어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도 공감하고 있었다. 이후 민영익은 이동인을 고종에게 추천해 임금을 만나게 된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중이 왕을 만나는 상전벽해의 사건이다. 그해 9월 고종은 이동인에게 밀서를 주며 2차로 일본을 방문하게 한다. 일본 주재 청국 공사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해 달라”라는 내용이었다. 이동인의 실력을 인정한 고종은 조선의 승려 신분으로는 최초로 통리기무아문(외무부)의 참모관이라는 직책에 임명한다. 승려를 일본으로 보내 미국과 수교를 부탁하고 관리로 임용했다는 사실에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수구파는 분노하면서 이동인의 제거를 다짐했다. 1881년 2월 고종의 부름을 받고 일본에서 군함과 무기 구입의 비밀명령을 하달받았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그의 존재가 홀연히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그의 실종과 관련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흥선대원군의 사주로 수구파에게 암살당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민영익과 밀착에 대한 시기로 김옥균 등의 개화파에 의한 암살설도 있다. 한편 유홍기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마침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신정부를 수립해 혁신정강을 공표하고 대대적인 혁신정치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과, 일본의 배신, 그리고 민중의 외면으로 12월 6일 실패함으로써 개화당의 신정부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 등을 비롯한 수많은 개화당 인사들이 청군과 수구파에게 참살당했다. 개화당의 정신적 지도자인 유홍기도 갑신정변의 실패를 알고 12월 6일 밤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됐다. 10년 후 갑오경장 때 그의 제자들이 집권해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갑신정변의 지도자들을 모두 복권했을 때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1908년 개화파 인사들이 추도회를 열었을 때 그를 순국한 애국자로 추도한 것을 보면, 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수구파들이 개화당 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할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7) 김옥균(1851~1894)은 공주에서 서당 훈장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인 1856년 안동 김씨 세도가 재종숙 김병기에게 입양됐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 부교리로 임명됐다. 이 무렵부터 그는 정치적 결사로서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해 동지들을 모아 지도자가 됐다. 1881년 12월 고종의 윤허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키 위해 메이지유신의 과정을 돌아봤고, 1882년에는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재출국해 일본의 재야 정객들과 면담했으며, 같은 해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견되는 수신사 고문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신문물을 접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돼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옥균이 일본을 1차 시찰할 때인 1881년 12월 일본의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다. 이때 후쿠자와는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문명개화론을 강론하고 가이노우에 카오루, 이토 히로부미, 오오쿠마 시게노부, 시부자와 에이이치, 고토 쇼지로 등 일본 정부 및 민간의 유력인사를 소개했다. 이후부터 후쿠자와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대부분 외면했지만 후쿠자와만은 진심으로 맞이했고, 일본 정부가 그를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 보낼 때도, 정부를 성토하고 언론에 그의 해금을 호소했다. 또한 김옥균이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후쿠자와는 자신의 집에 위패를 안치했으며, 청일전쟁 와중에도 일본군을 통해서 그의 처와 딸을 찾아 도와주기도 했다. 한편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에 망명한 것은 1884년 12월이고,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된 것은 1886년 8월이다. 이 짧은 기간에 김옥균이 일면식도 없던 일본 최대 바둑 가문 본인방가의 수장인 슈에이(秀榮, 1852~1907)와 어떻게 그토록 속 깊은 친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슈에이가 오가사와라 섬까지 찾아가서 석 달이나 머무르면서 같이 지냈다. 이후 그가 홋카이도로 옮겨질 때도, 요코하마에서 마중하러 배에 올랐다가 차마 내리지 못하고 홋카이도까지 갔다는 그들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아무튼 그의 친화력이 실로 놀랍다. 그는 바둑도 잘 뒀다. 본인방 슈에이와 6점 접바둑 기보를 보면 지금 기력으로 아마 5단 정도 된다(한국인 기보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는 불과 10년간 일본에서 살았을 뿐이지만 이 동안 일본의 거물 정객, 외교관 등 명사들과 사귀고 수많은 지인, 추종자들을 두었다. 아들딸도 여럿 낳았다. 김옥균이 죽은 후 위패를 모시겠다고 나선 여인만도 7명이나 됐다고 한다. 김옥균은 1894년 3월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가 동행한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민씨 정권은 그의 시체에 능지처참 형을 가하고 역적으로 효수했다. 1894년 7월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에 의해 사면, 복권됐다. 저서로 "기화근사" "치도약론" "갑신일록"이 있다.
(18) 박영효(1861~1939)는 인생의 부침을 통해 한 인간의 신념과 권력욕의 불행한 조우를 극명케 보여주는 인물이다. 조선 후기 명문가이던 반남 박씨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2살 나이에 일족인 우의정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 옹주의 남편이 됐다. 영혜 옹주가 결혼 후 3개월 만에 요절하자 어린 나이에 홀아비가 됐다. 왕실의 사위는 재혼을 금하므로, 이를 측은하게 여긴 고종이 궁녀 몇 명을 하사해 그들로부터 자녀를 얻었고, 벼슬도 많은 혜택을 주어 18세에 오위도총부 도총관, 19세에 혜민서 제조, 20세(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제수했다. 젊은 시절, 그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 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했고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그가 보여준 행보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과 거금의 공채를 받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이 됐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로 취임했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해 여러 친일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26년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 의장, 1932년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말년을 친일파 거두로 산 그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 353명 중 한 명으로 포함됐으며 사망하자 일본에 의해 정 2위 훈 1등으로 추서 됐다.
(19)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1883년 10월 1일(음력) 박문국에서 월 3회 간행했다. 1882년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로 일본에 머무르면서 민중계몽을 위한 신문 필요성을 절감해 제작을 도울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과정에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키자와 유키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신문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박문국 사옥과 활자·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1년 만에 종간했다. 그 뒤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로 제호를 바꿔 주간신문으로 다시 발간했다. 이 신문은 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외세에 대한 경계와 자국에 대한 국민 의식을 높이는 한편, 개화 문물과 지식 등을 소개해 개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 1882년 7월 23일 구식 군대가 별기군과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왕조에 대해 일으킨 군란이다. 별기군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데 비해 구식 군대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 한 달 급료를 받게 됐으나, 그마저도 선혜청 고지기의 농간으로 양이 부족하고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군인들이 고지기를 폭행하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키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가 탄원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군인들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을 시켜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을 지휘하게 했다. 그리하여 군인들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됐다. 군인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해 일본공사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 순사 등 13명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이 폭동으로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공관원들은 인천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이후인 1882년 8월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조선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면서 무력을 앞세워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21)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제독 오장경의 막료로 수행했다. 대원군을 납치했고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사들과 전투에도 참전했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25세인 그는 상관의 주저에도 일본군과의 전투를 개시하고 승리해 정변을 좌절시켰다. 이 공으로 1885년 11월 이홍장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에 취임하면서 조선 정부의 내정·외교를 적극적으로 간섭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퇴한 뒤 ‘직례안찰사’가 됐고, 톈진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했다. 1898년 무술변법 때 개혁파를 좌절시키고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산둥순무’로 승진했다. 1900년 의화단 난 때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함으로써 열강의 신임을 얻었다.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뒤 이어 ‘직례총독·북양대신’이 돼 세력을 확대했으나 귀족들의 시기를 받아 좌천됐고, 1908년 선통제가 즉위 후 섭정왕의 명령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다시 군권을 장악하고, 11월 내각 ‘총리대신’이 돼 황제를 퇴위시켰다. 또한 혁명파인 임시 대총통 손문을 사임시키고 1912년 3월 자신이 임시총통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정식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해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 선거법을 개정해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황제가 되려는 야심으로 황제 추대 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황제라고 선언했다. 1915년 윈난성 봉기로 반 위안스카이 운동이 일어나자 주변국들도 황제 취소를 권고했고, 결국 1916년 3월 황제 취소를 한 후 6월에 죽었다.
(22)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청(淸) 말의 관리이자 정치가이다. 1850~1864년까지 약 15년 동안 휩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후 실권자로 부상한 후 외교를 장악해 이이제이로 열강들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양보·타협정책을 취했다. 시모노세키조약, 청·러 밀약, 베이징조약 등에 관여했다. 또한 서양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양무운동을 주도했으나 안팎의 장애로 제한된 성과를 거두는데 그쳤다.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내정과 외교에 관여키 위해 막료인 오장경과 위안스카이를 주둔시키고 세관을 장악키 위해 측근인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파견했다.
(23) 1882년 8월 체결한 제물포조약에 따라 임오군란 때 일본 피해에 대한 사과 사절로서, 그해 9월 박영효, 김만식 등이 수신사로, 홍영식, 서광범 등이 수행원, 그리고 고종의 밀명(차관도입)을 띤 민영익, 김옥균 등의 15명이 일본으로 갔다. 이때 박영효가 태극기를 사용했고(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 조약 때 태극기 도안을 사용한 문서가 2017년 미의회 도서관에서 발견됨으로 그동안 태극기의 최초 고안자가 박영효라는 통설에 이견이 발생함), 이듬해인 1883년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해 공표했다. 일본은 사절단을 극진히 대접하고 체류비까지 전액 부담했다. 또한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해,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사절단을 환대하고, 5년 완납의 배상금 50만 원을 10년 기한으로 연장했으며, 차관 17만 엔도 부산 세관의 수입과 서천 사금 광산을 담보로 잡고 연리 8부로 빌려줬다. 이는 일본 정부가 조선 침략에 대한 우위에 서고자 사절단에게 파격적인 선심을 베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본 정부의 계략에 빠져 친일 성향을 갖게 된 이들은 귀국해서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의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24) 갑신정변 뒤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은 조약. 1884년 12월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청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자, 흥분한 민중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 거류민들을 죽였다. 이에 일본은 이노우에를 전권 대신에 임명하고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 대신으로 한 조선 정부와 협상했다. 결국 일본의 무력 위협에 조선 정부가 굴복함으로써 11월 24일 조약이 맺어졌다. 내용은 조선의 사과와 손해배상, 일본인 살해범 처벌, 일본공사관 신축부지 제공과 비용부담이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 정부에 강압하는 위세를 회복해 이후 조선 침략의 기초를 다지게 됐다.
(25) 본관 남양(南陽)이며 1854년 안산에서 출생했다. 쇠락한 가문을 타개하고자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에서 정치인들과 교우하며 아사히 신문사 식자공으로 취업하는 등 2여 년 머문 뒤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해 법률을 공부했다. 파리에서 "춘향전"을 번역해 "향기로운 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후 "심청전" 등을 번역·출간해 조선의 문화를 유럽에 알리는데 역할을 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개화파와 달리 유교적 전통과 왕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부심과 애국심이 강했다. 1893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 도중 일본에 들러,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를 암살하러 온 자객 이일직을 만나 사주를 받고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이듬해 상하이로 떠나는 김옥균을 동행해 숙소에서 암살했으며 조선 정부의 교섭으로 귀국했다. 그해 특별 과거에 급제한 후 교리가 됐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헌납 등 요직에 올랐다.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왕권을 위협하는 개혁을 주장하자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해 독립협회의 활동을 저지했다. 평리원 판사로 임명된 후 민씨 척족의 소행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돼, 1903년 제주 목사로 좌천됐다가 1905년 사직했다. 1909년 경술국치 직전 신변의 위협이 느껴지자 상하이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1년여 만에 귀국해 어린 시절 한때 보냈던 무안에서 궁핍하게 지내다가 1913년 사망했다.
(26) 고종은 정변 며칠 전까지도 김옥균에게 자신의 신임을 표시하는 밀지를 써주고(“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 거사를 도왔다. 그런데 정변 후 발표한 공약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게 됐다. 자신과 의논도 없이 공약을 작성한 것도 불쾌했지만, 자극할 만한 내용이 담겼다는 것이 괘씸했다. 공약 제1조는 청나라에 연금돼 있는 대원군을 조만간 모셔온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인 동시에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고종은 1873년에 민씨 집안을 앞세워 아버지를 실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청나라군이 아버지를 중국 톈진으로 끌고 가는 것도 묵인했다. 그래서 고종 입장에서는 대원군은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김옥균이 대원군을 국내로 모셔오겠다고 발표했으니,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다. 공약에 넣은 인민평등권도 여간 불쾌한 일이었다. 입헌군주제를 통해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고종은 정변의 철저한 방해자로 돌변했다. 청군의 첩자였던 경기도 관찰사 심상훈을 통해 개입을 요청했다. 청군이 정변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렇게 고종이 청군과 손을 잡게 되자, 고종의 지원에 김옥균을 따르던 정부군 약 2천 명도 등을 돌리게 됐다. 청군이 김옥균을 공격하려 하자 정부군 절반은 자리를 피해버렸고 나머지 절반은 청군에 합세했다. 이렇게 해서 청군을 상대하게 된 소수의 김옥균 부대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김옥균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고종의 변심이 결정적이었다. 그런 뒤에 고종은 자신이 지원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일본을 상대로 김옥균 신병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암살할 자객들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고종의 집요한 추적은 계속돼, 결국 10년 만인 1894년 3월에 홍종우가 중국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했다.
(27) 송병준(1858∼1925)은 함경도 장진에서 법을 가르치는 하급관리인 율학 훈도 송문수의 서얼로 출생했다. 1871년 무과에 합격해 사헌부 감찰, 중추부 도사, 흥해군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제국 때는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 일진회 총재 등을 역임했고, 정미칠적으로 지탄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과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다.
(28) 윤치호(1865-1945)는 천안 출신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머무르면서 신학문을 배웠고,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사상의 선구자 후쿠자와·나카무라 등과 교류했다. 1884년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정변의 주역들과 친밀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위험을 느껴 1885년 1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에 가담해 서재필·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이끌었으며,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1898년 제2대 회장이 돼 그해 10월에 1만여 명이 참석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20년부터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친일 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전시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상무이사 등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 1941년 친일 세력을 총망라한 조선 임전 보국단의 고문과 1945년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29)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나카쓰 번 하급 무사의 아들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본 근대의 사상가·저술가·교육자이다(현 일본 만 엔 권 초상화 인물). 1860년대부터 일본의 개항과 개화를 주장하고 자유주의, 공리주의적 가치관을 확립했다. 특히 그는 자연과학과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해 일본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대표저작인 "서양 사정"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은 당대를 대표하는 저술이며 사회적으로도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조선의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김홍집, 어윤중 등)에게도 많은 가르침과 후원을 했다. 그는 청년 시절인 1853년부터 1858년까지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을 공부했고, 1858년에는 에도에 난학숙을 열었다. 그가 난학에서 공부한 것은 의학과 물리학이었는데, 이때 경험은 그에게 서구의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자연과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일 수호조약에 따라 1860년 1월 비준 조약을 위해 막부 사절단이 미국 군함 포해튼호로 출발했고, 그도 사절단을 호위하는 간린마루의 함장이자 사절단 부사인 기무라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막부 사절단에 합류한 후 한 달여 동안 미국을 견학했다. 이후 1862년 1월 30일에는 유럽 6개국 파견 사절의 수행원으로, 1867년에는 막부의 견외 사절로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그가 1860년 미국에서 돌아올 때, 구해온 영어 서적을 자신의 학숙에서 가르치며 공부했고, 이때 일영사전을 최초로 발간했다. 1868년에는 자신의 학숙을 게이오의숙으로 개칭했는데 오늘날 게이오대학의 전신이다. 그는 1866년 "서양 사정"을 발간한 후 1870년까지 외편 등을 추가로 발간했다. 그는 저술과 학술단체(1873, 메이로쿠사) 활동으로 democracy(민주주의, 하극상으로 번역했다가 이후 민주주의로 변경), nation(국민), society(사회), speech(연설), right(권리), civilizatio(문명), freedom(자유), liberty(자유), competetion(경쟁), insurance(보험) 등 수많은 영어 단어를 오늘날까지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통용되도록 번역했다. 그와 같은 학술단체(메이로쿠사) 회원으로 일본인 최초 서양에 유학(1862~1865, 네덜란드 라이덴대학)한 니시 나마네(1829~1897)도 art(예술), reason(이성), science(과학), philosophy(철학), technology(기술)과 같은 영어 단어를 번역했다. 1869년 1월 메이지유신 후 일왕과 총리대신이 되는 이토우 히로부미가 그에게 여러 번 입각을 제안했으나 거부하고 오로지 저술, 언론, 교육에만 전념했다. 그는 1872년 "학문의 권장"을 발표했다. 이는 그가 실천하던 계몽 프로젝트를 전 일본인을 대상으로 시행코자 하는 의도가 담긴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권장"은 당시 300여만 부가 팔린 초 베스트셀러였다. "하늘은 사람 위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학문의 권장"은 알기 쉬운 표현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담아 당시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그는"학문의 권장"에 이어 1875년 "문명론의 개략"을 펴냈다. "학문의 권장"이 일반인의 계몽과 교육에 중점을 둔 책이었다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일본이 나가야 할 문명론에 대해 저술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서양의 문명과 일본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일본이 궁극적으로는 서양과 같은 수준의 문명을 이뤄 자주적인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가 저술한 "문명론의 개략"은 ‘일본 독립 유지를 위한 방법론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 논쟁(征韓論爭)’이 일어나면서 일본 정부 내 대립이 격화됐다. 이에 대해 그는 정한 반대의 논지를 펼쳤는데, 그 이유는 아직 개화가 완전치 못한 일본이 섣불리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고, 만약 일본에 위기가 온다면 그것은 중국이나 조선이 아닌 서구 열강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1882년 3월 1일 "시사신보"(현 산케이신문)를 발간하고, 이 신문의 정치평론과 사설 등으로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했다. 특히 그는 정치 사설에서 1882년 7월에 일어난 조선의 임오군란에 대해 ‘완미 고루(玩味固陋)’라던가 ‘문명의 적’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조선의 현상을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나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정변에 필요한 폭약, 도검, 자객 등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의 조선에 대한 문명화 구상으로부터 이뤄진 일이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조선에서 다시 청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자 그는 조선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붓고 "이제 함께 문명으로 나아갈 나라가 아닌, 일본의 지도를 통해야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라"라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1885년 3월, 그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차라리 그 대열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이웃 국가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결국 1894년 청일전쟁에 대한 노골적 지지로 이어졌다. 그에게 청일전쟁은 ‘근대 문명’과 ‘고루와 구폐’가 동아시아에서 맞선 싸움이었고, 개화 노선을 걷는 일본과 유교 사상에 안주한 청나라의 대결이었다. 그러므로 청일전쟁의 승리는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간 일본의 승리이며, 그의 오랜 주장의 필연적 결말이었다. 그는 청일전쟁 이후로도 메이지 정부의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행보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립을 중시하며 정부와 대립하는 그의 자세는 마지막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 역시 국가라는 틀 안에서 이뤄진 것이므로 정부에 비판적이었다고 해서 국가를 뛰어넘는 시민주의나 보편적인 이상주의 태도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 근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며, 실제 근대 일본의 행보를 보면 그가 제시한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큰영향을 받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독립이라는 문제에 얽매여 모순된 태도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결코 친정부, 군국주의에 찬성하는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당시 일본의 여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청일전쟁을 찬성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모든 사고의 전제에는 ‘일본의 자주독립’이라는 문제가 내포한 까닭에, 다른 문제나 인식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합리화시켜 버리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시대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근대 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