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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Sep 02. 2024

동학농민운동

2. 동학농민운동

      

1.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됐다. 전라도는 예전부터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조선의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 시대 내내 관리들의 수탈 대상이 돼,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30)이 가혹하게 수탈하는 바람에 이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해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는 만석보(31)의 수세 징수 사건에서 비롯됐다.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는 대로 온갖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했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한 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收稅)했다. 또한 부유한 군민을 체포해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각종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도 2만여 냥(兩)에 달했으며,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강제로 거둔 돈이 1,000여 냥이나 됐고, 대동미를 정미(精米)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품질이 나쁜 쌀을 사서 상납해 차액을 착복하기도 했다. 특히 만석보는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동진강에 건설한 수리시설로 이를 이용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받는 수세(水稅)가 너무 과중해 자주 경감을 청원한 바 있었다. 그런데 조병갑이 여기에 덧붙여 강 하류에 필요하지도 않은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써 700여 섬이나 착복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 형식으로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 접주 전봉준(32)을 지도자로 삼아 군수인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전봉준은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해 봉기를 맹약했다. 동시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에 있는 송두호의 집에 도소(都所)를 정하고 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②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③ 군수에게 아첨해 인민을 수탈한 탐리(貪吏)를 격징(擊懲)할 것, ④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直向)할 것 등의 4개 항을 결의했다. 이듬해인 1894년 2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정익서·최경선 등과 함께 봉기해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됐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했다. 군수 조병갑은 간신히 난을 피해 전주감영에 이르러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보고하고, 김문현은 이를 조정에 알리게 됐다. 조정은 조병갑의 죄상을 알게 되자 그를 파면하고, 새로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고,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민란 등이 발생했을 때 수습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직책)로 삼아 사태를 수습케 했다. 하지만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 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해 오히려 그들의 격분을 샀다. 


2. 경과 및 결과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손화중·최경선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전북 무장현(현 고창군)에 모여 민간에 포고해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輔國安民)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倡義文: 의병으로 일어날 것을 호소하는 글)을 발표했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이름으로 된 '무장동학포고문'(33)으로도 불리는 이 창의문에서 과감히 봉기할 것을 요청하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 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됐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됐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됐다. 전봉준은 같은 해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해 고부 백산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춘 후 전봉준이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했다.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인 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③ 일본 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을 선포했다. 그리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해 농민들의 호응을 요청했다. 무장·백산에서의 봉기는 지역적인 민란의 성격을 탈피해 이제는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외세와 집권층에 대한 도전이며 개혁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5월에 들어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부안 관아를 점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營將) 이광양과 초군(哨軍) 이재섭 등에게 명해,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 방면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게 했다. 관군은 5월 10일과 11일 새벽에 걸쳐 도교산에 근거를 둔 동학농민군과 황토현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해 그 일대를 점거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로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알게 된 조정은 5월 6일 홍계훈(34)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한 후 경군(京軍)을 보내 진압키로 결정하고 현지로 출동하게 했다. 홍계훈은 장위영병(壯衛營兵) 약 800명을 3개 대대로 나눠 해로를 통해 군산포에 이르렀다. 그러나 5월 11일 전주에 입성한 경군은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고 도망자가 속출해 병력이 반감됐다. 이 병력으로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초토사 홍계훈은 조정에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는 동시에 청군(淸軍) 지원도 아울러 주청했다. 조정은 그의 증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5월 19일 장위영병 300명과 강화병 500명을 증파했다.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헌주가 증원군을 이끌고 인천을 떠나 영광 법성포에 이를 무렵, 동학농민군은 이미 영광 일대를 점거했다. 한편 고종은 5월 23일 직접 전라도민에게 윤음(綸音)을 내려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여론에 따라 시정할 것을 선포했다. 또한 위협에 못 이겨 가담한 사람은 아무런 벌도 주지 않을 것을 약속해 난에 참가한 농민들이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타이르는 회유책을 썼다. 전주성 내에서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던 홍계훈은 증원군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2일 동학농민군 추격 작전에 나서 전주를 출발해 남진을 했다. 3대(隊)의 경군을 거느리고 정읍·고창을 거쳐 영광에 이르렀으나 동학농민군은 이미 그곳을 떠나 장성 방면으로 이동한 뒤였다. 27일에 이르러 증원군과 합류한 초토사의 경군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해, 드디어 장성 남쪽인 황룡촌에서 접전을 벌였다. 처음에 이학승이 거느리는 경군의 별동대는 동학농민군에게 기습 포격을 가해 사상자 수십 명을 내게 했으나, 즉시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여세를 몰아 5월 28일에는 장성을 떠나 북상의 길에 오르고 5월 31일에는 드디어 전주성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황토현에서 패배한 뒤 전주는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어서 전라감사 김문현과 판관 민영승은 성내에 남아있던 군졸과 백성을 동원해 성문을 지키려고 했으나,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라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도망했다. 전주에 무혈 입성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성내를 지키면서 사태에 대비했다. 이 무렵 조정의 구원요청에 따라 청군이 출동하고, 이어 일본군도 출동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북접의 최시형은 처음에는 거사를 반대하고 순수한 종교운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 중진들이 농민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게 되자 이를 받아들여 5월 6일에는 교주 최시형의 이름으로 각처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이 띄워졌다. 5월 10일 충청도 청산현 소사리에 집결한 동학교도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곧 행동을 개시해 공주목과 진잠현의 경계인 성전평을 점거하고 이어서 회덕현을 습격했다. 충청감사 조병호는 우선 아전과 지역민, 보부상 등을 모집했으나 여의치 않아 은진 파수병 100명을 급파하는 한편, 충청병사 이용복에게 청주 영군 200명을 파병해 주도록 연락하고 다시 전주에 머물러 있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그동안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공주·청주 이남의 여러 지방은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이 없었으나 5월 14일 공주와 진잠 사이에서 갑자기 해산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교주 최시형이 무력으로 봉기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동학농민군이 전주 입성에 앞서 장성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그들은 폐정개혁을 위한 13개 조목의 요구 사항을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제시해 탐관오리의 배격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반대했다. 이러한 농민들의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봉건사회 모순에 대한 개혁 요구는 사태의 진전에 따라 보충되고 또한 수정돼 주장한 것이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거느린 경군은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6월 1일에는 전주성 밖에 이르러 서로 대치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그동안 6월 4일과 6일의 두 차례 접전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나와 선제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동학농민군이 큰 패전으로 동학농민군이 도리어 전의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 기회를 이용해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공작에 착수함으로써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曉諭文)을 성내의 동학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했다. 이에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두 차례에 걸쳐 양호순변사 이원회에게 제시했다. 제1차 원정서는 14개 조목으로 됐고 제2차 원정서는 24개 조목으로 됐다. 그 내용은 그 일부가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래 여러 차례 제시한 바 있는 개혁 요구 조목과 중복됐으니, 대체로 탐관오리 숙청과 개항 이후 나타난 외국 상인의 횡포와 국내 특권 상인의 배격, 그리고 물가등귀의 원인이 됐던 미곡의 국외 유출 방지 등을 주장한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했다. 여기에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1일 전주 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 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산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봉준은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전주와 인접해 있는 순창·남원에 남아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관군도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지 며칠 뒤, 강화병 200명만 남겨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대부분은 철수해 한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전라도 일대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 상태에 있었고 어떻게 하든지 복구해야 할 형편이었다. 양호순변사 이원회는 6월 22일에 효유문을 내려 민폐의 근절과 관리의 탐학을 엄금할 뜻을 밝히는 한편, 각자 면리(面里)에 집강(執綱)을 둬 민간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집강을 통해 영문(營門)에 호소토록 했다. 이에 따라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을 감영으로 초청해 치안의 복구와 관민의 화합에 대한 방책을 상의했다. 동학교도의 협력 없이는 지방행정의 질서와 수령의 위신을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 기관이었다. 이 집강소의 설치로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돼 지방의 치안과 행정은 사실상 이들이 담당하게 됐다.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집강소에는 분장을 나눠 집강 밑에 서기·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蒙) 등의 임원을 둬 행정사무를 분담하게 했다. 전봉준은 수천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 등지를 근거로 해 전라우도를 관할하고,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해 전라좌도를 관할했다. 그리하여 수령들은 형식상 지위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서리들은 동학에 입적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집강소에서는 동학농민군의 개혁 요구였던 폐정개혁 12조(35)도 추진했는데, 그 요강은 이때까지 주장이 수정 정리된 12개의 조목으로 됐다. 이 조목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일부 학자(유영익, 한동대 교수)에 의해 부정되고 있으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동학교도 오지영(36)의 기록(東學史)이며,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됐던 강령·격문·포고문·원정서 등의 내용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개혁안 제시를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 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 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 요구와 일본 세력의 배격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정강보다도 훨씬 더 혁신적인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반천인(七般賤人)(37)의 대우 개선도 요구해 노비해방과 함께 모든 천민의 해방을 추진했다. 한편 집강소에서는 그들이 제시한 12개 조목의 개혁안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따랐다. 이미 관에서 작성된 문부(文簿)를 그들 자신이 검열해야 했고, 농민들의 소장(訴狀)도 처리해야 했다. 동학 교도들은 이미 전주성에서 철수해 각자의 출신지로 돌아갔을 때 마을마다 포(包)를 설치한다는 구호로 조직망을 침투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포교에 힘써 전라도에서는 청소년의 대부분이 동학에 입교해 접(接)을 조직하게 됐다. 이와 같은 추세는 주변의 각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강원도는 물론 경기·황해·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이 확대됐다. 이보다 앞서 조정은 스스로 힘으로 동학농민군 봉기를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깨닫고 먼저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전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조정의 요청은 위안스카이를 통해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전해지고, 그는 즉각 파병을 명해 섭지초(葉志超, 1838~1901년)로 하여금 1884년 6월 8일과 12일 사이에 아산만에 도착하게 했다. 한편 청국이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 파병을 통고해 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해 한성으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이 짙어져 갔다. 국내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에서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키 위해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를 부르짖으면서 거병하자, 이에 호응해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10월 말을 전후해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 명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북접은 종교적 입장을 고수해 처음에는 무력 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특히 북접은 농민군의 2차 봉기에 반대해 남접과의 관계 단절을 알리는 고절문(告絶文)을 각 포에 돌리고, 남쪽 농민군을 토벌하자는 벌남기(伐南旗)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중도파 교도인 오지영 등이 조정에 나서 항일 구국 투쟁이라는 명분으로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최시형은 북접의 각 포의 두령들에게 9월 18일 보은의 청산으로 모이라는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초유문(38)을 발령하면서 신속하게 진영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또한 손병희를 종군통령으로 임명해 각 포를 지휘토록 했다. 이에 따라 손병희가 북접군의 총사령이 됐다. 그 결과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청산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해 공주로의 북상 계획을 세웠다.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해 있을 무렵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항일전이 벌어졌는데, 목천·세성산은 김복용·이희인 등이, 수원은 김정현·안승관 등이, 홍천은 고석주, 공주는 최한규, 옥천은 정원준 등의 동학 접주들이 점거했다. 한편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했다는 소식은 충청감사 박제순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고, 곧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했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해 진격했으나 상당수가 이탈해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 북접의 김복명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부대가 목천 세성산(현 천안시)에 포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해 손화중 부대는 나주에, 김개남 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김복명이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퇴했다. 동학농민군을 참패시킨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진격해 전자는 우금치에, 후자는 이인과 효포에 진을 쳤다.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던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노성읍에서 공주의 경천점에 이르는 지역까지 전진했고, 다른 부대는 효포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했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략을 위해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지원토록 요청했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이두황이 이끄는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1일 동학농민군은 웅치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했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리 지점인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6, 7일간 머물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김개남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북상해 옴으로써 합세케 되자 기세를 올리게 돼 다시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정부군은 공주의 공주 본영과 계룡산 뒤편인 판치와 이천역 등으로 병력을 3진으로 나눠 배치하고 있었는데,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정부군은 쫓겨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했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됐다. 우금치 공방전(39)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 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태인을 거쳐 금구·원평까지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했다.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 부대도 북상해 청주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고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태인 방면으로 패주 하다가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또 손병희의 북접 부대는 순창까지 몰렸다가 본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했는데, 일본군과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충주에서 해산됐다. 그 뒤 일본군과 정부군에 쫓기고 있던 전라도 지방의 동학농민군은 순천에 집결해 여수의 좌수영을 향해 진격한 바 있으나 오래지 않아 패배해 해산됐다. 이 무렵 강원도에서도 동학교도가 봉기했다. 10월 초 영월·평창·정선에서 수천 명이 일어난 것을 신호로 강원도의 각 지방에 그 세력이 미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의 지도자인 접주·성찰 등이 체포돼 효수되자 이내 해산됐다. 황해도에는 동학이 비교적 널리 포교돼 1893년 보은 집회에 황해도 동학접주가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황해도에서 동학교도가 봉기한 것은 1894년 10월 하순 장연에서 수만 명이 일어나 해주성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재령·안악·평산·봉산·신천 등지에 세력이 크게 미치었으나, 이것 또한 일본군과 정부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한편 금구·원평 방면으로 후퇴했던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김덕명·최경선 등과 재기를 다짐하던 중, 1894년 12월 30일 밤 옛 부하인 김경천(40)의 밀고로 불의의 습격을 받아 관군에게 붙잡혀 한성으로 압송됐다. 이듬해 4월 23일 전봉준은 김덕명·성두환·최영남·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 고부 민란으로부터 1여 년에 걸쳐 전개됐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했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됐고, 그 맥락은 3.1 운동으로 계승됐다.


3. 동학의 발생

1860년 최제우(41)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세 교주인 최시형(42)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했다. 1894년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3세 교주인 손병희(43)가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했다.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은 서학(西學)에 대립한 것으로, 최제우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했다. 그리고 동학 창시는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열강 침략에 대한 위기가 고조됐던 19세기 후반의 사회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뤄졌다. 당시 조선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됐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 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돼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결국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됐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돼 미륵신앙, 도참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반봉건적 민중사상이 확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유(儒)·불(佛)·선(仙)과 같은 기존의 사상으로는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봤다. 때문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포덕문)을 내기 위해 천명(天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겨,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했다. 그는 유(儒)·불(佛)·선(仙)이 비록 뜻을 달리하고 있으나, 근원은 모두 하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학은 이 세 가지 도(道)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해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동학은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하므로 사람 대하기를 하늘 섬기는 것처럼 경건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동학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 주며,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이념으로 큰 역할을 했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당시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동학은 1894년 전봉준 등이 주도한 농민봉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동학과 이 사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동학이 주체가 되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는 견해에서는 이 사건을 ‘동학혁명’, ‘동학운동’으로 나타낸다. 반대로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불과하며 봉건사회와 외세 수탈에 맞선 농민항쟁이 주된 측면이었다는 견해에서 ‘동학’이라는 표현을 넣지 않고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등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반봉건, 반외세 농민전쟁이 주된 측면이지만 동학이 조직 동원이나 사상에 미친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으로 나타낸다. 본 저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한다. 


4. 동학의 역사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24년 경주의 쇠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재혼녀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는 오랜 수도 끝에 1860년 5월 7일(철종 11년) 깨달음을 얻어 동학을 창시했으며 포교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경주·영덕·대구·청도·울산 등 14곳에 접소(接所)와 접주(接主)를 두고, 전체 교인의 수가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동학의 교세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최제우는 1864년 1월 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돼, 4월 15일에 대구에서 처형됐다. 최제우에게 도통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동학이 불법화 되어 탄압받는 상황에서도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최제우의 글을 모아 경전을 편찬하는 등 조직 확대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1880년대 동학의 교세는 영남 지방을 벗어나 호남·충청·경기 지방까지 확대됐고, 1890년대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의 삼남 지방을 거의 포괄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동학은 포접제로 교도들을 조직했는데, ‘포(包)’와 ‘접(接)’마다 포주(包主)와 접주(接主)를 뒀다. 일부에서는 대접주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포(包)와 접(接)의 운영에는 육임제(六任制)를 실시했는데,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 등의 여섯 가지 직임(職任)으로 나눠 교화와 조직 관리 등을 맡게 했다. 1871년 영해에서 교조 신원을 내세워 동학 교도들을 모아 민란을 일으키려 했던 이필제(44)처럼 당시 동학에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동학 조직을 사회 개혁에 이용하기 위해 입교(入敎)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1880년대 후반 이후 교세가 급격히 확장된 전라도 지역에서는 빈농과 몰락 농민의 참여가 많았으며, 전봉준과 서인주처럼 신앙 경력이 짧은 새로운 지도자들이 교도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종교 활동보다는 부패한 관리들의 가렴주구 중단, 징치(懲治), 외국인 선교사와 상인들의 추방 등 농민의 이해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을 지향했다. 이들은 1890년대 들어서 최시형, 손병희 등의 동학 교단 지도부와는 독자적인 경향과 움직임을 나타냈는데,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학의 교단 지도부를 북접(北接)이라고 하고 전라도를 근거지로 한 전봉준, 서인주 등을 남접(南接)이라고 불렸다. 북접과 남접의 분화는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의 과정에서 뚜렷하게 진행됐다. 1892년 10월 최시형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만류했지만, 남접의 서인주 등은 공주에서 독자적으로 교도를 모아 집회를 열어 최제우의 신원과 가렴주구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11월에는 북접의 교단 지도부도 참여해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12월에는 충청도 보은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893년 2월 11일부터는 광화문 앞에서 복합 상소를 했다. 당시 손병희 등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고종의 전교를 받고는 3일 만에 서둘러 해산했지만, 전봉준 등의 남접은 미국·프랑스·일본 등의 영사관·학당·교회당 등에 ‘척왜양(斥倭洋)’의 괘서를 붙이며 정치운동을 벌였다. 또한 3월 10일 즈음에 충청도 보은, 전라도 원평, 경상도 밀양 등 삼남 지방에서 동시에 집회를 열었는데, 이들 집회는‘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 반봉건ㆍ반외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다.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한 최시형 등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선무사로 파견된 어윤중(45)에게 왕의 윤음을 전달받고는 집회를 해산시키고 잠적해 버렸다. 그리고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법소(法所)와 도소(都所)를 설치해 교단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중도파 동학교도인 오지영이 조정에 나서 남·북접을 서로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으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말았다. 농민전쟁이 패배함으로써 이후 동학은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고, 살아남은 북접 지도부는 도피 생활을 하며 조직의 명맥을 유지했다. 손병희·손병흠·이용구 등의 노력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교세를 넓히기도 했으나, 최시형마저 처형되면서 존립의 어려움을 겪었다. 1897년 최시형에게 도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교단 조직 정비에 나섰으나, 1901년 손천민·김연국 등의 핵심 지도부마저 관군에 사로잡히자 결국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4년 러일전쟁(46)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 등은 일본세력을 이용해 국내 활동의 기반을 넓히려 했다.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고, 경의선·경원선 철도를 부설하는데 동학 교도를 동원했다. 진보회도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나, 일본군 후원을 받던 일진회(一進會)의 압박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김연국을 비롯한 동학 교도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로써 동학은 포교의 자유를 얻었으며, 1904년 12월에는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그리고 1905년 12월 1일에는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꿨으며, 1906년 1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해 대도주(大道主)가 됐다. 그러나 1906년 8월 교단 내부의 갈등으로 이용구 등에게 출교 조치를 해 일진회와 분리했으며, 이용구는 김연국 등과 함께 따로 시천교(侍天敎)(47)를 만들었다.

 

5. 동학의 사상

동학사상은 1860년, 최제우가 민족 고유 사상인 경천사상(敬天思想)을 바탕으로 그 위에 유·불·선(도교)의 교리를 혼합해 만든 민족종교 사상이다. '동학'이란 서학(천주교)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동쪽 나라인 한국의 종교라는 뜻이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시천주(侍天主)'이다. 즉 하늘과 사람은 애당초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지기(至氣, 지극한 기운)는 모든 것에 내재돼 있으므로 사람도 누구나 지기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48) 사상으로 체계화됐다. 이처럼 동학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도주의를 천명했다. 이와 같이 인내천의 인본주의, 특히 평등주의는 국내적으로는 성리학 사상과 계급 관념으로 일관하던 조선의 봉건적 잔재를 타파하는 데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더불어 동학은 민족 보위의 이데올로기와 인내천의 유토피아를 향하도록 하는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49)을 담고 있다. 후천개벽(開闢)思想) 사상은 인류 역사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해, 5만 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했다며, 민중의 변화에 대한 갈망을 고취시켰다. 동학은 이러한 인내천과 후천개벽사상을 기반으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더불어 교주인 최제우가 포덕문(50)에서 밝힌 ‘포덕천하(布德天下)’를 내세우면서 당시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동학의 인간 존중과 현세 지향적인 교리는 19세기말 조선의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으며, 아울러 지배계층의 이념인 성리학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념으로 중요한 구실을 맡게 됐다.  


(30) 조병갑(1844~1912)의 본관은 양주이다. 고종 즉위 초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서질(庶姪)이다. 여러 곳의 수령을 역임하는 동안 탐학을 저질렀으며, 1892년 4월 고부 군수가 됐다. 1893년 흉년이 들자 강제로 세를 징수하는데, 부유한 농민을 잡아들여 갖가지 죄명을 씌워 약탈했으며, 태인 현감을 지낸 아버지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1,000여 냥을 거두기도 했다. 특히, 고부 군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탐학 행위는 만석보 개수에 따른 것이었다. 즉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구보 밑에 신보를 쌓게 하고 추수기에 수세를 거둬들여 700여 섬을 착복했다. 이에 농민들이 1893년 12월 전봉준을 앞세워 억울한 사정을 진정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4년 2월 농민들이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전주로 도망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사태를 보고했다. 그러나 고부 민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여러 탐학 행위가 밝혀져 귀양을 갔다가 1년 2개월 만에 사면된 후 곧이어 판사로 임용돼 동학의 2세 교주 최시형을 사형 판결했다. 노무현 정부의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현 이화여대 교수)이 그의 직계 증손녀이다. 조기숙은 2006년 11월 월간조선에 의해, 자신이 조병갑의 후손임이 드러나자, 처음에는 조병갑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다가 여론의 거센 질타를 받자 동학농민운동 유족들을 찾아가 조병갑의 후손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면서 사과했다. 

(31) 만석보는 현재 전북 정읍시 이평면 33-1에 있었던 보(洑)이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첫 도화선이 됐던 시설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원래 만석보가 있던 터에는 1973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만석보지(萬石洑址)'라는 명칭으로 유지비를 건립했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됐다.

(32) 전봉준(1855~1895)은 전북 고창 출생이다.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체구가 왜소해 별명인 녹두장군으로 불렸다. 아버지는 고부 향교 장의를 지낸 전창혁이며,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었다. 뒷날 그가 사회 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해 안정된 생업 없이 한약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방술을 배웠다. 결혼 후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소농과 훈장 일로 생계를 꾸렸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1890년 전후 동학에 입교, 얼마 안돼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됐다. 그가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 말하듯이, "동학은 ‘경천수심’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에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1894년 12월 전북 순창 피노리에서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돼, 일본군에게 넘겨져 한성으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1895년 4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33) 무장동학포고문: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인륜은 그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강직하며, 어버이가 인자하고 자식이 효도를 한 이후에야 나라가 성립되고 한없는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현명하고 어질며 바르고 강직한 신하가 전하를 보좌하여 밝게 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와 문경(文景)의 통치를 손꼽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생각하지 않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며,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하고 뜻만 맞추면서 충성을 간하는 말을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자를 비도(匪徒)라고 한다. 안으로는 나랏일을 도울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아, 백성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변하였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밖에 나와서는 몸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학정이 날마다 심하여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 상하의 명분이 뒤집어지거나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정승 이하부터 관찰사와 수령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배를 불리고 자기 집안을 윤택하게 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관리를 선발하는 통로를 재물이 생기는 길로 생각하여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가 되었다. 나라의 많은 재화와 물건들이 나라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 호주머니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랏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8도는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모든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이 참으로 그대로이니, 어찌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도 쇠약해진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보국안민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을 지어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고 오로지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니, 이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는 초야에서 사는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이에 8도가 한마음으로 수많은 백성과 의논하여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를 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다 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34) 홍계훈(?~1895)은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왕을 호위하는 관서인 무예청의  별감이었는데 왕후 민 씨를 그의 동생인 홍상궁으로 위장해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이후 중용됐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할 때 양호초토사로 출진해 관군의 힘으로는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고종에게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토록 보고했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이때 동학농민군의 예봉을 꺾은 공으로 훈련대장으로 승진됐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때 광화문을 수비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후 군부대신에 추증되고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900년에 이경직과 함께 장충단에 제향 됐다. 황현은 저서  "매천야록"에서 그를 “졸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는데도 인품이 영걸하고 근신했다”라고 호평했다.

(35) 폐정개혁 12조: ① 동학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고 서정(행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는 소각한다. ⑥ 칠반천인(七般賤人)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⑪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36) 오지영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동학 교도이자 천도교 사상가이다. 뒷날 <동학사>를 썼고 남·북접 갈등 시 ‘특사’로 위촉돼 남접의 전봉준을 만난 데 이어 최시형의 북접 지도부를 방문했다. 오지영의 기록이다. “도로서 난을 일으킴은 물론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 일이 이미 그 지경에 이른 이상 그르다고는 할지언정 그것을 무력으로 치는 것도 잘못이 아닐까요? 또 북접에서 치기 전에 관병, 일병, 청병이 이미 치기 시작했습니다. 도인과 군대가 서로 싸우게 되면 강약의 부동으로 필경 도인이 패할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북접이 그것을 또 치면 남접은 더 속히 망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약자로서 강자와 싸우다가 멸망한 남접은 아무도 원망할 사람이 없겠으나, 강자를 도와 싸움에 승리를 거둔 북접은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대하겠습니까. 흥망성쇠는 말할 것도 없이 도인끼리는 서로 죽음과 삶을 같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자 일동은 묵묵부답이었지만 유독 손병희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통문(通文)을 거두는 한편〈벌남기〉를 꺾어버리고 진퇴를 같이 하기로 했다. 오지영은 남·북접 조정책을 성사시키고 호남으로 회정(回程)할 때,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재형이 오지영을 불러 이르기를 “내 이제 그대에게 양호도찰(兩湖都察)의 임무를 맡기노니 곧 출발해 남·북접을 진심으로 조정해서 대도(大道)의 장래를 그르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북접은 오지영의 지혜로운 조정과 손병희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하마터면 동학농민혁명사에 일대 오점을 남길 치욕을 면하게 됐다.

(37) 조선 시대 일곱 가지 천한 사람을 말한다. 주로 조례·나장·일수·조군·수군·봉군·역보를 일컫는데, 이 외에 노비·기생·상여꾼·혜장(鞋匠)·무당·백정, 혹은 노비·영인·기생·혜장·사령·승려를 지칭하기도 한다. [비슷한 말] 칠천.

(38) 초유문: 주역에 이르기를 대재(大哉)라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자시(資始)하고 지재(至哉)라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자생이라 하니 사람이 그 사이에 만물의 영이 된지라. 부모는 낳고 스승은 가르치고 임금은 기르나니 그 은혜를 갚는 데 있어 생삼사일(生三四日)의 도(道)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찌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선사(先師)께서 지나간 경신년(庚申年) 천명(天命)을 받아 도를 창명하여 이미 퇴폐한 강상(綱常)을 밝히고 장차 도탄에 빠진 생령(生靈)을 구하고자 하더니 도리어 위학(僞學)이라는 지목을 받아 조난순도(遭難殉道) 하였으니 아직도 원통함을 씻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31년이라. 다행히도 한울이 이 도를 망(亡)케 하지 아니하여 서로 심법(心法)을 전하여 전국을 통한 교도가 몇 10만인지 알 수 없으되 사은(四恩)을 갚을 생각은 없고 오로지 육적(六賊)의 욕을 일삼으며 척화를 빙자하여 도리어 창궐을 일으키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돌아보건대 이 노물(老物)이 나이가 70에 가까운지라 기식(氣息)이 엄연한데 전발(傳鉢)의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이 옷깃에 차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도다. 이에 또 통문을 발하노니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 노부의 마음을 양찰하고 기필코 회집하여 비성을 다하여 천위주광(天威黈纊)의 아래 크게 부르짖어 선사의 숙원을 쾌히 펴고 종국(宗國)의 급난에 동부 할 것을 천만 바라노라. 

(39) 동학농민군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의 궁을부(본주(本呪)로 뜻은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주문)를 품고 외우면 총알도 피해 간다는 말을 믿고 주문을 외우면서 진군을 거듭해 공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무라다 소총으로 무장한 모리야의 일본군과 대치하게 된다. 일본군의 무라다 소총은 전설의 영국제 소총인 스나이더 소총을 일본군의 신체에 맞게 개선한 소총으로, 동학농민군은 여전히 화승총 몇 자루를 들었을 뿐이었다. 일본군의 무라다 소총은 엎드린 자세에서 장전해 1분간 15발을 쏠 수 있고 사거리도 800미터인 반면에, 화승총은 2~3분 동안 선 채로 1발을 장전해 쏠 수 있었고 사거리는 120미터에 불과했다. 동학농민군은 이런 화승총에 죽창, 그리고 홑 흰옷을 입고 대결한 것이다. 갑오년 12월 추운 겨울이고 아무리 큰 결기로 뭉쳤다 하더라도 더구나 흰옷을 입은 터라 일본군의 피할 수 없는 표적이 돼 1만여 농민군은 무라다 소총에 하염없이 저격당해 지금도 우금치 밭갈이를 하면 당시 산화한 동학농민군의 뼛조각이 나온다고 한다. 

(40) 전봉준이 고부의 접주 때 집사의 일을 보던 옛 부하 김경천은 전봉준이 자신을 만나러 전북 순창의 피노리로 찾아오자 포상에 눈이 멀어 전라감영 군관 출신 한신현에게 밀고한다. 한신현은 동원한 마을 사람들과 전봉준이 있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이 위기를 감지하고 담을 넘어 피신하려 했지만 한신현이 동원한 청년들이 몽둥이로 다리를 내리쳐 체포됐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혁명가의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전봉준을 체포한 이들은 큰 상을 받았다. 한신현은 금천군수 제수와 상금 1,000냥을 받았다. 정창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도 100~200냥씩 나눠 받았다. 그러나 정작 밀고한 김경천의 몫은 없었다. 전봉준의 부하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김경천은 전봉준을 밀고했다는 이유로 백성들의 눈총과 보복이 두려워 이리저리 떠돌다가 노상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동학 연구가 박맹수(원광대 총장)는 “당시 공식 사료를 보면 김경천에 의해 전봉준이 붙잡혔다는 내용이 없다면서 공식 사료에 있는 한신현의 체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그는 김경천이 밀고자라고 전해지는 얘기와 야사를 정사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당시 한 일본 기자도 불세출의 영웅 전봉준이 하찮은 부하의 밀고와 무지몽매한 장정들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고 표현한 것으로 봐 밀고자 김경천에 의한 전봉준의 체포를 야사라고만 단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현재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길 65-29에는 전봉준 장군이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됐다는 내용의 피체지 유적비까지 조성돼 있다. 이에 관련 학계 등에서 철저한 고증으로 유적비 내용에 대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 

(41) 최제우(1824~1864)는 경주 출생으로 쇠락한 양반인 부친 최옥과 재혼녀 한 씨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했으나, 17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세가 궁핍해져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유랑 생활 동안 장사로 생계하며 의술과 점복술을 접했다. 이때 궁핍한 생활을 타개코자 무술을 익혀 무과에 응시하려고 생각했다고도 한다. 고뇌와 방랑의 시기를 경험 후 30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의 혼란한 대내외적인 정세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희망은 한울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구도의 길로 접어들었다. 양산의 천성산 내원암 및 적멸굴과 울산 등지를 전전하며 수련을 진행하다가 1859년 처자를 데리고 경주로 돌아왔다. 이즈음 자신의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고쳤다. 고향 인근의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을 지속하던 1860년 5월 7일(음력 4월 5일)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기 시작하면서 한울님의 말씀이 들렸다. 득도의 순간이자, 동학이 창시되는 순간으로, 이 시점을 동학(후일의 천도교)에서는 포덕 원년이라 칭한다. 최제우는 득도 이후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며, 또한 동학의 이론화 작업에도 착수해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만들었다. 한문체 형식으로 이뤄진 [동경대전]은 지식인층을 위한 경전이고, 가사체 형식으로 이뤄진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경전이다.

(42) 최시형(1827~1898)은 경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1861년(철종 12)에 동학에 입문해 최제우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됐다.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이후, 최시형은 관헌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동학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최제우가 지은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발간했고, 동학 조직을 강화하는데 힘써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췄다. 동학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자, 최시형은 1892년부터는 억울하게 죽은 동학의 교조 최제우의 죄를 사면시키기 위해 조정과 교섭을 시도했다.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교조 신원 운동에서 수만 명의 신도와 함께 대규모 시위를 벌여 교세를 떨쳤다. 1894년에는 동학 교도인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는데, 최시형도 동학 교도들과 함께 투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이후에는 손병희를 제3대 교주로 추대하고, 자신은 관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포교에 전념했다. 1898년에 원주에서 체포돼 처형됐다. 

(43) 손병희(1861∼1922)는 충북 청원 출생이다. 1882년 동학에 입문해 동학 제2세 교주 최시형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 나갔다. 입교 10년 만인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혁명 운동이 일어나자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에 임명돼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 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군과 함께 남북접 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동학군의 기세는 높아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남북접 연합군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인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동학혁명의 열화 같은 의지는 좌절되고 손병희는 원산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주로 취임해 교세 확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1년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후, 민족교육사업을 위해 보성학교, 동덕여학교를 인수했고,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돼 독립선언식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식 이후 체포돼 2년 옥고를 치른 후 출옥했으나 1922년 5월 병고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손병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44) 이필제(1825~1871)는 충청도 향반(증조부 태안군수 이완임) 출신으로 1863년 입도해 진주 군기고 습격이 실패한 뒤 영해로 피신하면서 2세 교주 최시형을 설득해 동학교도 전체 신원 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워 1871년 3월 10일 이른바 이필제 난을 일으켜 성공했다. 이때 영해 봉기는 분산 고립적인 당시의 일반 민란과는 달리 동학의 조직망을 통해 광범위한 인원 동원, 야습 작전 등으로 강한 저항력(4회에 걸쳐 농민봉기 주도)을 보여줬다. 그해 8월 문경에서 재차 봉기하려다가 체포돼 12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됐다. 

(45) 어윤중(1848~1896)은 충북 보은 출신으로 뛰어난 실력과 온화하지만 강직한 성품의 온건 개화파이다. 1893년 3월 수만 명의 동학 교도들이 보은에 모여 있다는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고종은 현지 사정에 밝은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선무사로 급파했다. 어윤중은 동학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들이 억울하게 죽은 교조 수운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것과 나라와 백성의 살림을 위협하는 서양 오랑캐와 왜놈들을 물리치라는 것을 듣고, 조정의 관대한 처분을 약속하며 이들에게 해산할 것을 당부했다. 그의 약속을 믿은 동학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황현의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어윤중은 앞뒤로 장계를 올려 동학을 ‘비도(匪徒)’가 아니라 ‘민당(民黨)’이라고 했다. 이후 어윤중은 조정 관료와 재야 선비들에게 식언을 했다는 숱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돼, 재정개혁안을 주관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이뤄지면서 갑오개혁 내각이 무너졌으며 일본 망명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던 중, 정원배 등에 의해 용인 장서리에서 피살됐다.

(46) 1904∼1905년에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가 뤼순군항을 기습 공격으로 시작돼 1905년 9월 5일 강화조약을 맺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하게 됐다.

(47) 1906년 이용구가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이탈해 창립한 동학계 종파이다. 동학이 관권 탄압에 의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동학 교도를 기반으로 일진회를 조직해 친일적 활동을 하던 이용구는, 1906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가 귀국해 천도교를 설립하자, 교단화에 반대하고 친일을 표방하다가 제명당하자 시천교를 창립했다. 출범 후 한때는 천도교를 능가할 정도로 세가 확장되기도 했으나, 한일합병에 앞장서는 등 친일 행각으로 민중의 신망을 잃고 점차 약화됐는데, 그가 1912년 사망하자 이후 유명무실화됐다.

(48) 사람이 곧 하느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라고 보는 천도교(天道敎)의 중심 교리이다. 그러나 인내천 사상이 사람 이외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聖靈)과 지기(至氣)를 주체로 하는 '영육쌍전(靈肉雙全)'을 내세워 경천(敬天)·경인(敬人)·경지(敬地)를 주장함으로써 하늘· 땅· 사람을 일체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이 교리는 인간을 누구나 평등하게 보고, 근본적으로 귀천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사람마다 '한울님(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한울님과 같이 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 천도교의 행동실천 요강이다. 자신의 한울님을 모신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한울님의 심기(心氣)를 바르게 기름으로써 한때 잃어버렸던 한울님을 되찾아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양천주(養天主)'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한울님을 기르는 방법은 서양의 종교가 하느님께 예배하면서 참회하고 속죄하는 의타적(依他的)인 방법인 데 반해, 동학은 자신의 심기를 수련하는 의자적(依自的)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특징이다.

(49) 최제우는 천지창조 후, 특히 천황씨(天皇氏) 이후 자신의 득도 전까지를 선천의 개념에 넣고, 그 이후 5만 년까지를 후천으로 잡고 있다. 수운의 도는 후천 5만 년 무극대운(無極大運)을 타고 창립됐다고 한다. 손병희는 수운의 개벽사상을 인(人) 개벽·물(物) 개벽으로 풀이했는데, 인(人) 개벽은 정신개벽이요, 물(物) 개벽은 육신개벽이라 했고, 이돈화는 더 구체화해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으로 풀이했다. 한편, 천운에 따라 후천 5만 년 대운의 주재자가 된 수운도 어쩔 수 없이 밀어닥치는 천조(天造)의 악운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때 생기는 인류의 대환란이 괴질이며, 전대미문의 대 병난 이 인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괴질이 지나고 나면, 만고 없는 무극대도가 후천 5만 년의 운을 담당해 후천선경(後天仙境)을 이루게 된다고 보는 것이 수운의 후천개벽에 대한 견해이다.

(50) 포덕문은 최제우가 자신의 득도 과정을 525자(한문)로 기록한 글이다. 제목은 ‘덕을 편다’라는 뜻이며,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비교하면서 도를 깨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동학의 원리는 우연히 된 것이 아니며 개인 능력이 뛰어나서 이뤄진 것도 아님을 밝히고,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과 정성으로 나타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세상 사람들이 천리에 순종치 않고 천명을 돌보지 않아 마음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점, 나쁜 질병이 온 나라에 가득 차서 백성들이  편안할 날이 없으며, 시련이 오리라는 지적, 서양세력 위협에 보국안민의 계책이 나올 것인가 하는 걱정 등이 기록되면서 천사문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제와 대화에서 상제는 자신이 공이 없음을 자책하고, 구세의 일을 최제우에게 일임하면서 서도(西道)가 아닌 새로운 도(道)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로써 동학이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동학을 세상에 펴려고 했으나 정성을 다하는 몇 사람 이외에는 순종하지 않아 올바른 이치를 적어 교훈으로 삼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이 글은 동학에 대한 윤곽과 득도 과정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와 동학에 대한 이해를 기술하고 있다."東經大全"에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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