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96년 서재필(56) 등이 중심이 돼 조직했던 사회정치단체이다. 즉, 열강에 의한 국권 침탈과 지배층에 의한 민권 유린의 상황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 사상으로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 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 단체이다.
2. 독립협회 설립, 발전과 활동
가. 독립협회 설립
1896년 7월 2일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해서 발족했다. 창립자인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해서 민주주의와 근대 문명을 익혔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중,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반역죄가 사면되고 개화 정부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서재필은 미국을 방문한 갑신정변의 동지 박영효의 설득과 조국의 자유와 자주독립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포부를 안고 1884년 12월 11일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을 거쳐(3개월 체류) 미국으로 망명한 지 만 11년 만인 1895년 12월 26일에 귀국했다. 서재필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으로 민중을 계발하고자 했다. 자각된 민중의 힘으로 조국을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적 단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이에 앞서 서재필이 같은 목적에서 창간한 독립신문(57)은 독립협회 창립의 원동력이 됐다. 독립협회는 당시 사회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주독립(自主獨立)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강령을 내걸었다. 구미파의 본산인 정동구락부, 갑오개혁 주동 인물들의 모임인 건양협회, 자주 개화를 추구한 실무급 중견 관료층 등, 당시 형성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신흥 사회세력을 배경으로 설립했다.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신지식층이었다. 개항 이래로 해외 시찰·해외 유학·신교육·신문과 서적 등을 통해, 근대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지식 체계를 가진 신지식층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근대 시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서구적 지식층과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과 무기를 수용하자는 사상에서 발전한 개량적 유학 지식층으로 구분된다. 또 다른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는 시민층이었다. 이 무렵 시전 상인은 근대 상인으로 개편돼 갔다. 또 각종 상회와 회사가 출현하면서 시민층이 대두됐고 점진적으로 성장해 갔다. 이 시민층은 열강의 침탈로부터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고, 전근대적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농민층도 19세기 이래로 거듭돼 온 민란과 동학농민운동 전개 과정에서, 반봉건·반침략 의식이 강화돼 신흥 사회세력의 하나를 이뤘다. 또한 광산이 개발되고 개항 무역이 시작되면서부터, 광산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등 임금 노동자들이 열강의 경제적 침탈을 체험하면서 저항 의식이 높아져 또 다른 신흥 사회세력을 형성했다. 이들 신흥 사회세력 가운데 독립협회의 지도자적 구실을 담당한 것은 신지식층이었다. 서구의 시민 사상에 영향을 받은 서재필·윤치호·이상재 등이 최고 지도층을 이뤘고, 개신 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남궁억·정교 등이 중간 간부층을 이뤘다.
이들은 그들의 대변지인 독립신문·독립협회회보·황성신문, 그리고 각종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통해서,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세력을 계몽, 포용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가며 독립협회를 민중 단체로 발전시켜 나갔다.
나. 독립협회의 발전과정
독립협회의 발전 단계는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으로부터 토론회를 개최하기 이전인 1897년 8월 28일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창립기 또는 고급관료 주도기이다. 서재필의 지도하에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조성 등 창립사업에 주력하던 시기이다. 자주독립의 기념물 건립을 위한 창립사업은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독립협회는 사회 일반의 참여뿐만 아니라 관료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짧은 기간에 거대한 사회단체로 부각했다. 거의 모든 고급관료와 다수의 일반 민중이 독립문 건립보조금을 냈고 독립협회의 회원이 됐다.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임원진은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김종한·이상재 등 8명, 간사에는 송헌빈·남궁 억 등 10명 등으로 당시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총망라됐다. 1896년 말에는 회원 수가 2,000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일반 민중 회원은 아직 표면에 나서지 못했고, 독립협회는 개혁파와 보수파 고급관료의 주도하에 있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고급관료들의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2기는 독립협회가 정기적인 토론회를 시작한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의 구국 선언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로, 민중 계몽기 또는 민중 진출기이다. 서재필·윤치호의 지도하에 토론회와 강연회를 통해, 회원들에게 효과적인 의사 표현의 방법과 민주적인 행동 성향을 체득케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민중을 새로운 지식과 교양으로 계몽해, 독립협회 안에 민중의 진출이 뚜렷해진 시기이다. 특히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7년 말기에는 독립협회 토론회와 "독립신문"은 러시아인 재정 고문의 고용 문제와 관련해 보수파 정권의 외세 의존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보수적 관료층은 독립협회에서 점차 이탈하게 됐고, 독립협회는 개혁파 관료들과 재야·신지식층이 주도하는 민중적 사회단체로 전환돼 갔다. 또한 직제도 크게 개편됐다. 위원장제를 없애고 회장·부회장·서기·회계·제의(提議) 등 상설 직제를 두고, 상임집행부의 기구와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독립협회는 운동의 제1기와 제2기를 통해 창립사업 과정에서 민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그 표현기관인 "독립신문"과 "독립협회회보" 등 언론과 출판 활동으로 여론 조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협성회·광무협회 같은 학생단체에 의한 대중동원 체제를 확보했으며, 토론회·강연회를 활성화해 국권·민권·애국 사상을 고취시켰다. 아울러 다음 단계의 민중 정치운동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민중계몽·민력조성·민력단합의 길을 닦아나가게 됐다. 결국 이 두 시기의 독립협회는 사회계몽단체 또는 관민 합동의 애국단체였다고 하겠다. 제3기는 독립협회가 구국운동을 선언한 1898년 2월 21일부터 '김홍륙독다사건(金鴻陸毒茶事件)'(58) 이전인 그해 9월 10일까지로, 민중 운동기 또는 민중 주도기이다. 구국운동을 선언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59)를 개최해, 독립협회가 민중의 정치 활동을 통해 민의를 국가정책에 반영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외세의 이권 침탈과 내정간섭을 민중의 힘으로 배제하려는 국익·국권·국토 수호를 포괄하는 자주국권운동과, 전근대적인 압제와 수탈로부터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 등 인권을 보장하려는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민권의 신장과 국권의 강화를 위해 관민의 합력 기구로서 의회 설립을 추구한 국민 참정 운동이 전개됐다. 이 시기 독립협회 회원은 관료층이 대거 퇴진하고 재야인사들이 그 주류를 이뤘다. 임원진도 개편돼 회장에 이완용, 부회장 겸 회장 대리에 윤치호, 서기에 남궁 억, 회계에 이상재·윤효정, 제의에 정교·양홍묵·이건호, 사법위원에 안영수·강화석·홍긍섭 등 개혁파 중심 체제로 전환됐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권·민권 운동의 담당 세력도 만민공동회를 계기로 독립협회 회원 중심에서 민중 체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띠었다. 집요한 민중운동은 정부와의 대립 의식을 발생시켜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추방됐다. 이 당시의 독립협회는 정치집단으로서 재야 정치세력의 선도적 구실을 담당했으나,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해 민권을 쟁취하려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부와 협력해 외세를 막고 관료를 깨우쳐 민권을 보호하려는 데 머물렀던 것이다. 이때 앞서 협성회와 광무협회 외에 공주의 독립협회, 인천의 박문협회(博文協會)·찬양회(贊襄會)·보민협회(保民協會)·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 등 다수의 독립협회 지지단체들이 설립됐고, 독립협회의 반대 세력인 황국협회(皇國協會)도 등장했다. 제4기는 김홍륙독다(毒茶) 사건이 발생된 1898년 9월 11일부터 민회 금압령(집회 금지령)이 내려진 그해 12월 25일까지로, 민중 투쟁기 또는 민권 투쟁기이다. 독립협회·황국중앙총상회·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이 김홍륙 일당의 고종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국왕과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해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를 쟁취하고 입헌대의 정치를 추구했던 관권 대 민권의 투쟁기였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민중과 더불어 ① 보수 내각을 붕괴시키고 진보 내각을 구성토록 했으며, ② 언론·집회 자유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열어 인민헌의안(人民獻議案)을 수락하게 했고, ③ 민선의회(民選議會)의 성격이 가미된 중추원 관제를 발표하게 해 인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하는 등 민권투쟁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공화제 추진설을 거짓 유포한 보수파의 반동적인 익명서 사건(匿名書事件)으로, 개혁 내각이 붕괴되고 의회 설립 운동이 좌절되면서 민중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깊어졌다. 이에 국왕이 개혁정치의 실천을 약속했으나 그 실천이 지연돼 민중의 국왕에 대한 불신감도 생겼다. 따라서 만민동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 극한투쟁을 벌여 자못 혁명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회원은 재야인사 중 소장층의 강경파가 행동의 주류를 이뤘다. 임원진도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 서기에 박치훈·한만용, 회계에 이일상, 사법위원에 남궁 억·정교, 그리고 평의원 20명 등으로 구성돼, 민중을 대변하는 체제로 완전히 전환됐다. 이때는 종로 인화문 앞, 각 부 문전 등 옥외가 주된 활동무대였고, 독립관과 광통교 사무실은 옥외 투쟁의 기획실처럼 됐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는 4,000여 명의 회원과 전국적인 지회, 각종의 민권단체와 수많은 민중의 열띤 지지와 호응을 받은 전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공인됐으며, 정부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치적 압력단체가 됐다. 독립협회의 사상은 자주 국권에 의한 독립 국가를 추구한 민족주의 사상과, 자유민권에 의한 국민국가를 추구한 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자강개혁에 의한 문명국가를 추구한 근대화 사상으로 집약된다. 이들 사상은 서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내적으로 통합돼 하나의 유기적인 사상체계를 이뤘다.
다. 독립협회 활동 내용
1) 자주국권
독립협회의 자주국권 사상은 국가의 자주·평등 및 국가 주권의 확립을 통해 외세의 침탈로부터 국권의 상실을 막고 자주독립의 주권국가를 수립하려 한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첫째로, 독립협회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국가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최대의 민족적 과제라고 인식했다. 국가 독립의 수호는 국가 자주권을 지키는 데서 가능하고 국가 자주권의 수호는 국력의 배양에서 가능하며, 국력의 배양은 민력의 양성에서 이뤄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민권 보장과 국민 참정을 통해 배양된 전 국민의 힘으로 외세의 간섭을 막고 국가 자주권을 지킬 수 있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여기에서 독립협회의 자주국권 사상은 자유민권 사상과 결합돼 민주주의를 내포한 근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게 됐다. 둘째로, 독립협회는 국가자주권론과 함께 국가평등권론을 제기했다. 독립협회는 국제사회에서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가진다는 국가평등사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와 동등하게 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또 “우리 군주가 다른 나라의 군주와 동등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종래의 화이적(華夷的) 세계관과 사대적(事大的) 질서관에 기초한 동아 문화권의 차등적 국가관과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철저히 부정했다.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워 국가의 독립과 평등의 상징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 후의 일본의 간섭과 아관파천 후의 러시아의 간섭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시 평등을 가장한 근대적 국제질서 아래 실제적인 불평등 관계를 비판하고, 개항 이후 열강과 맺은 모든 불평등 조약의 폐기를 주장했다. 셋째로, 독립협회는 국가의 자주·평등권과 더불어 이권 양도 반대론을 제기했다. 독립협회는 국가의 자주독립은 자원과 산업의 자주적 개발을 통한 자립 경제에 의해 뒷받침 돼야 한다고 믿고, 어떠한 이권의 양도도 강력히 반대했다. 나아가 이미 열강에 빼앗긴 이권도 외교 통로를 통해 조속히 돌려받아야 하며, 회수가 불가능하면 매입해서라도 국가 이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거의 이권 양도가 대부분 비밀외교로 이뤄진 사실에 비춰, 공개 외교를 통해야 국가 이권의 상실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넷째로,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의 유지 방안으로 중립 외교론을 제기했다. 열강의 이권 침탈을 우선적으로 막고 한반도에서 국제적 세력 균형을 최대한 유지시켜 개화 자강의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자주 중립 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한반도에서 열강의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공명정대한 자주외교를 견지해야 하며, 자주외교를 위해서는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등거리 중립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섯째로,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의 근본적인 방법으로 개화 자강론을 주장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이 열강의 세력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 명목상의 독립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세력 균형이 깨어지기 전에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고히 다져야 하며, 이것은 개화 자강의 방법으로 이뤄진다고 믿었다. 이 개화 자강은 체제 내적인 부분적인 개혁이 아닌 국정 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 즉 변법자강을 의미한다. 독립협회는 선진 과학기술문명뿐만 아니라 근대적 정치문화까지 도입해 전면적으로 근대 체제를 갖추는 것을 열강의 근대적 침략 세력을 막고 자주독립의 주권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2) 자유민권
독립협회의 자유민권 사상은 인권의 자유와 평등 및 인민주권의 확립을 통해 인권·민권을 보장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 국권을 수호해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추구한 민주주의 사상이었다. 첫째로, 독립협회는 국민자유권론(60)을 제기했다. 독립협회는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61)에 근거해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는 지배층의 전근대적 압제와 수탈로부터 보호돼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했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죄형법정주의·증거제일주의·영장제도·공개재판권·피고변호권 등 근대적인 법률과 공정한 재판에 의한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려 했다. 그리고 조세법률주의·재정공개주의, 재무와 조세 행정의 일원화를 통해 무명잡세와 중세(重稅) 및 관인 층의 수탈로부터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려 했다. 또한 독립협회는 기본권의 하나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국민의 정치적 자유권을 주장했다. 언론의 자유는 천생권리(天生權利)라 주장했다.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여론이 형성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고 국민의 생명·재산권도 보장할 수 있다고 해, 언론자유는 국가 중흥의 긴급한 사안이라고 역설했다. 언론과 함께 집회의 자유와 그 장려를 강력히 주장했다. 더불어 정당의 출현과 그 활동의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독립협회는 국민자유권론과 더불어 국민평등권론(62)을 제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론과 법 앞에서의 만민평등 의식에 입각해 인신매매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양반 의식의 청산을 촉구했다. 나아가 노비제도와 반상제도(班常制度)를 현실적으로 철폐하고자 해, 신분 평등의 실현을 추구했다. 또한 독립협회는 남존여비 의식과 여성의 남성에의 종속적 지위를 타파하고, 여성의 인간적·사회적 지위를 향상해서 남녀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국민평등권은 갑오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법제화됐으므로, 독립협회는 근대적 신법의 실천과 법률 적용의 평등을 주장해 기회균등의 평등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셋째로, 독립협회는 국민의 자유·평등권에 이어 국민주권론을 제기했다. 국가란 인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통치자와 피지배자 간에 통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회계약론에 근거해,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국가 기구는 국민을 위해 설립된 것이므로, 국가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국민주권론에 의해 국왕이 곧 국가라는 전통적인 군주 국가관에서 탈피해, 국민이 곧 국가라는 근대적 국민주권주의 국가관이 나올 수 있었다. 넷째로, 독립협회는 국민주권론에 근거해 국민참정권론을 제기했다. 국민은 국왕과 지배층에게 운명이 맡겨진 통치의 대상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고, 주권을 가진 정치의 주체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국민은 주권자로서 정부를 감독, 협찬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천부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국민 참정의 논리를 폈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정치 원칙 아래에, 공개정치·여론정치·의회정치·정당정치·입헌정치 등 근대 민주주의 정치관을 가지고, 국민주권과 군주주권의 절충 형태인 입헌대의군주정체를 구상해, 의회(상원) 설립을 통한 국민 참정을 실현하고자 했다.
3) 자강개혁
독립협회의 자강개혁 사상은 열강에 의한 국권의 침탈을 막고 전근대적 압제 체제로부터 민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국가 사회의 전 분야에 걸친 변법자강(變法自强)(63) 곧 체제 변혁을 통해, 근대국가 체제의 형성을 추구한 근대화 사상이었다. 첫째로, 정치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전제군주제를 근대적인 입헌대의군주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국가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국가의 자주·자강도 결국 국민의 힘에 의해 달성하는 것이라 믿고, 인권·민권이 보장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추구했다. 독립협회는 공화정을 선망하고 있었으나 당시로서는 시기상조라 판단했다. 일단 전제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바꿔 의정부(議政府)를 근대적 내각으로, 중추원(中樞院)을 근대적 의회로 개편해, 개혁 내각을 수립하고 민선 의회와 협력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당면한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둘째로, 경제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농업경제 체제를 근대적인 산업경제 체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당시의 농업 편중의 경제 구조를 개편해, 부국강병과 직결되는 상공업을 비롯한 광업·농업·축산업·어업 등 각종 산업개발의 필요성과 실업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근대적인 공장·회사·은행 등의 설립을 장려했다. 특히 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해 공장제 공업을 바탕으로 방직공업을 주도산업으로 하는 산업혁명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산업개발론은 농업 위주의 봉건 경제체제를 상공업이 주도하는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다. 셋째로, 사회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양반사회체제를 근대적인 시민사회체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독립협회는 양반제도와 노비제도, 관존민비와 남존여비 등 차별적인 신분제도와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현실적으로 철폐하려 했다. 그리고 국민의 자유·평등과 국민주권이 확립된 기회균등과 능력 본위의 근대적 시민사회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세습적 권위가 지배하는 양반사회 체제에 비해 현실적 능력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체제가 보다 효율적이고 자주 부강한 국민의 힘만이 자주독립과 자강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넷째로, 문화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인문교양문화 체제를 근대적인 과학기술문화 체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모든 국민에 대한 신교육 실시와 신지식 보급을 자주·자강의 제1차적인 사업으로 간주하고, 학교 교육과 함께 일반 국민 교육을, 남성 교육과 똑같이 여성 교육을 중시했다. 그리고 종래 중국의 경서·사서와 시문 중심의 교육을 허학(虛學)·허문 교육이라 비판하고, 근대적인 각급 학교의 설립을 통한 사회과학·자연과학·산업, 기타 역사·외국어 분야 등 실용적인 실학·실업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선진 과학기술과 신지식 도입을 위한 방법으로, 외국 서적의 번역·보급과 유학생의 해외 파견을 장려했다. 독립협회의 신지식·신교육에 대한 열정은 세계 각국의 선진문화를 흡수해, 우리의 역사·언어와 문화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중화 문화권에서 탈피해 근대적인 한국 문화권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다섯째로, 군사적인 면에서는 종래의 치안 유지 체제를 근대적인 자주국방 체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한반도에서 열강의 세력 균형이 깨어질 경우에 예상되는 외국의 무력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군제 개편과 무력 증강의 강병책이 급선무임을 절실히 인식했다. 따라서 종래의 육군 단일체제를 육군·해군체제로 개편하고, 재래식 장비를 근대식 장비로 교체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해 자주적으로 강병을 양성하고, 방위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국내의 치안 유지에 급급하던 왕조 군대 체제를 대외 국토방위에 주력하는 근대적 국민 군대 체제로 개편할 것을 추구한 것이다.
4) 민중계몽
서재필의 독립협회 창립 목적이 정치 단체를 통한 자유민주주의 개혁사상의 대중화와, 민중의 단합된 힘에 의한 근대적 자주독립 국가의 형성에 있었던 만큼, 독립협회는 창립 이래로 무엇보다도 민중에 대한 계몽운동에 주력했다. 첫째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개수해 독립관과 독립공원을 만드는 것을 창립사업으로 시작해, 1896년 11월에는 독립문의 정초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다음 해 5월에는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했다. 이 같은 창립사업은 당시의 내외정세에 비추어 사회 각계각층에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민중에게 자주정신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적인 구실을 했다. 둘째로, 강연회와 "독립신문" "독립협회회보" 등 근대적 대중전달 수단으로 민중에게 새로운 지식과 교양을 보급하고, 애국애족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사상 및 근대 국민국가 의식을 사회 일반에 계도해 민중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셋째로, 매주 정기적인 토론회를 열어 회원들에게 회의 진행법과 연설법, 그리고 다수결 원칙 등 효과적인 의사 표현 방법과 민주적인 행동 성향을 배양해 민중운동의 주도 세력을 양성했다. 이 같은 민중계몽운동은 민권의 개념조차 모르던 전근대적인 민중을 계도해 근대사회의 운영 속에 조직화하고, 민중의 정치운동을 발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 국권수호
독립협회는 아관파천 후 친러파 정권의 요청에 의한 러시아의 군사교련단과 재정고문관의 파견 및 러시아에 의한 인사권 간여 등 각종 내정간섭은 국가의 자주권에 크게 손상이 된다고 생각했다. 1898년 2월 21일 독립협회 회원 135명이 독립관에 모여 구국 운동을 결의했다. 3월 10일에는 종로 네거리에 만여 명의 민중이 모인 가운데 제1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러시아의 군사교련단과 재정고문관을 즉시 모두 돌려보내고 대한의 자주 권리를 지키자"는 결의안을 채택해 정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독립협회의 정부에 대한 계속적인 건의와 민중 집회의 압력으로 정부는 러시아와 교섭해 군사교련단과 재정고문관을 철수시키게 됐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근대적 민중운동, 민중에 의한 민주적 정치운동의 최초 승리였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고종과 법부고문 그레이트하우스가 황실 호위를 위한 외국인 용병부대를 설치하고자 상하이로부터 용병 30여 명을 초빙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특별회의를 개최해 자주독립 국가로서 황실이 외국인의 보호를 받는 것은 전 국민의 수치라 하고, 정부에 총대위원을 파견해 누차 외국인 용병 고용 반대를 주장했다. 또 협회 회원들이 3일간 외부 문전에 나가 강경히 반대 시위를 벌여 결국 외국인 용병부대를 돌려보내게 됐다.
6) 국토수호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가 석탄고 설치를 목적으로 부산의 절영도 조차(絶影島 租借)를 요구한 데 대해 정부가 이를 허락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통상회(通常會)에서 이에 대한 반대 성토를 하고, 정부에 공한을 발송해 사실의 해명을 요구했다. 정부로부터 과거 일본에 빌려준 전례에 따라 조차 요구를 허가했다는 회답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3월 7일 다시 공한을 발송해 토지 조차의 근원을 제거키 위해서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이미 허가해 준 일본의 석탄고 기지도 반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독립협회의 집요한 요구와 만민공동회 등 민중 집회의 압력에 의해, 러시아는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했고, 일본도 절영도 석탄고 기지를 반환했다. 이해 5월 7일, 또다시 러시아 공사는 군사기지 설치를 목적으로 목포·증남포 해역의 28만㎡에 달하는 토지 매수를 정부에 통고해 왔다. 정부는 두 항구의 10리 이내를 택해 조차를 의논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여러 차례 공한을 정부에 발송해, "한 뼘의 우리 강토도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라고 강력히 반대해 러시아의 토지 매수 요구를 좌절시켰다. 이 외에도 독립협회는 외국 조계지의 각국 상인들이 인근 지역을 매입해 우리 농민들이 생업 터전을 떠나야 하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나자,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등 국토수호를 위한 일련의 운동을 전개했다.
7) 이권수호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는 1898년 3월 1일 서울에 한·러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러시아에 본점을 두고 한국 화폐 발행권과 국고 출납권 및 각종 이권을 획득키 위한 경제 침투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3월 7일 특별회를 열고 탁지부대신에게 공한을 보냈다. 한·러은행에 우리 국고금을 전관시키는 것은 재정권을 외국인에게 양여하는 것이라면서 한·러은행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스페이에르 공사가 군사교련단·재정고문관의 철수 등 대한 정책의 실패와 관련, 본국에 송환됨으로써 한·러은행도 폐쇄됐다. 이해 5월 초에는 프랑스공사 플랑시가 정부에 공문을 보내, 한국 정부가 이미 약속한 평양 부근을 비롯한 3개 처의 광산 채굴지를 속히 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금·은·동·철 등의 각 광산은 우리나라에 있는 토지이니, 우리 인민이 채취해 스스로 부강책을 기해야 한다"라고 정부에 강력히 반대해, 프랑스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나아가 독일과 미국이 차지한 각종 이권에도 반대했다. 한편, 독립협회는 이해 9월 1894년 이래로 열강에 양도한 이권의 내역을 조사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은 자주독립의 침해이고 경제적인 수탈이라고 하면서 이를 즉각 중지시킬 것을 결의했다. 나아가 이권 양도에 관련된 전 회장인 이완용을 독립협회에서 제명 처분했다. 이 같은 완강한 이권수호운동으로 열강의 이권 침탈은 일단 저지됐다. 또한, 국권 수호·국토 수호·이권 수호 등 자주국권운동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각성되고 민권 의식이 높아져 본격적인 인권보장운동도 전개할 수 있었다.
8) 인권보장
독립협회는 생명(신체)과 재산권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 인식하고, 1898년 3월부터 인권보장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3월 중순에 독립협회 회원인 이원긍·지석영 등 4명이 구속된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협회는 구속 사유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들 4명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재판도 없이, 황제의 명령으로 10년의 유배형에 처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법부대신에게 항의문을 발송해, 국가의 표준은 법률에 있으므로 이들 4명의 죄상은 재판으로만 적법하게 처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4명은 독립협회와 민중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이해 6월 말에 특별 석방됐다. 이해 5월에는, 법무대신 겸 고등재판소장 이유인이 판사 마준영을 시켜, 선비 홍재욱의 재산을 뺏으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공개재판을 요구하고 재판을 방청한 뒤, 재판이 공정치 못함을 강경하게 항의하고, 판사 마준영을 부정 재판자로 고발해 해직시키고, 이유인도 재판소장직을 물러나게 했다. 이해 6월에는, 경무사 신석희가 사주전범(私鑄錢犯)으로 투옥된 최학래의 재산을 몰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협회는 재산 몰수의 법적 근거를 요구했다. 신석희가 사주전범의 재산 몰수는 선례에 의한 것이라고 해명해 오자, 내부대신에게 "신법으로 보장된 재산권이 폐지된 구법으로 침해될 수 없다"라고 항의해서, 결국 최학래의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이해 9월에는,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정권을 농단하다가 독립협회의 탄핵 대상이 되어 유배된 김홍륙이, 하수인을 시켜 고종에게 독차를 올린 국왕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이 재판도 없이 종신 유배에 처해지고 연루자가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독립협회는 비록 김홍륙이라고 할지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돼야 하고 연루자의 고문도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관련 법관을 규탄하고 공개재판을 요구했다. 한편, 보수파들은 '김홍륙독다사건'이 일어난 것은 형법이 너무 너그럽기 때문이라면서 갑오개혁 때 폐지된 노륙법(孥戮法)·연좌법(連坐法)의 부활을 획책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노륙법·연좌법은 생명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악법이라 주장하고, 강력한 반대 투쟁을 벌여 기어코 부활을 저지시켰다.
9) 개혁내각
독립협회는 '김홍륙독다사건'을 계기로 보수파 내각을 타도하고 개혁파 내각의 수립을 위해 강력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김홍륙독다사건'과 보수파의 노륙법·연좌법 부활 책동이 있자 독립협회는 관계 대신들의 책임 추궁을 비롯해 보수파 대신들의 부정·부패·무능을 규탄하고 내각 일곱 대신의 탄핵운동을 벌였다. 10월 초에 이르러, 독립협회는 황국중앙총상회와 여러 차례에 걸쳐 합동 상소를 올리고 합동연설회를 개최했다. 내각의 일곱 대신의 퇴진을 요구했고, 여기에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합세해 밤낮으로 시위와 농성을 감행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국왕의 해산 명령은 거부됐다. "일곱 신하가 백날 내 물러가지 아니하면 신 등도 백날 내 물러가지 않겠다"는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요구가 관철돼, 10월 12일에 이르러 일곱 명의 대신은 모두 해임됐다. 이로써 보수파 내각이 총 퇴진하고 박정양의 개혁파 내각이 성립돼, 독립협회의 개혁 내각 수립 투쟁은 일단 성공을 거뒀다.
10) 국민참정
독립협회는 이미 1898년 봄 이래로 상소·연설·신문논설을 통해 의회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후 줄곧 정부와 절충해 7월 중순까지는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다가 10월 12일 박정양의 개혁 내각을 성립시킨 독립협회는 여세를 몰아 의회 설립을 통한 국민 참정의 실현에 박차를 가했다. 독립협회는 10월 15일 정부에 총대위원을 파견해, 각부 대신과 관민협상(官民協商)을 벌여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을 적극 추진했다. 한편, 독립협회의 강력한 활동에 불안을 느낀 국왕은 “국회도 할 수 없는 일을 민회가 남용한다”라고 비난하면서 언론·집회를 통제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민권단체와 시민·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상소와 민중 집회를 통해, “정부에 대한 탄핵·성토 및 언론·집회의 자유는 인민의 권리에 속한다”라고 반박하면서, 일주일간에 걸친 언론자유 투쟁을 전개해 마침내 국왕의 조칙을 번복시켰다. 언론자유 투쟁의 성공 후 독립협회는 정부 측과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안에 합의한 뒤, 10월 29일에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했다. 부회장 이상재의 사회와 회장 윤치호의 주제 연설로 진행된 이 날의 관민공동회에는, 박정양 이하 각부 대신과 독립협회 등 여러 단체와 수많은 시민·학생들이 참석했다. 관민공동회는 국가주권의 자주화, 국가이권의 수호, 국가재정의 일원화, 국민자유권의 보장, 인사행정의 공정화, 의회식 중추원의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국정개혁안)’를 채택하고, 참가 대신들의 서명을 받은 다음 국왕의 재가를 요청했다. 이에 국왕은 ‘헌의 6조’를 재가함과 동시에 서정쇄신을 다짐하는 조칙 5조를 반포했다. 그리고 11월 4일에는 관선 25명, 민선 25명의 의석을 규정한 근대의회의 성격을 지닌 ‘중추원관제’가 반포됐다. 이 관제는 독립협회의 중추원 개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헌의 6조’의 재가와 의회식 ‘중추원관제’의 반포는 국왕과 정부가 민회와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참정권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공인한 것이다. 이는 독립협회가 추진한 국민참정운동의 거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11) 정치개혁
독립협회가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의 협력을 받아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참정권을 공인하게 한 1898년 11월 4일, 수세에 몰린 보수반동세력은 국왕을 움직여 일시에 박정양 내각을 붕괴시키고, 조병식의 보수파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보수 반동 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추진한다고 고종을 충동하고, 윤치호 대통령 설을 암시하는 모략 문서를 퍼뜨린 익명서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 등 모든 민회가 혁파되고, 이상재·남궁 억·정교 등 독립협회 요인 17명이 체포됐으며, 의회식 중추원의 발족도 좌절됐다. 독립협회가 혁파된 뒤, 만민공동회는 상설 단체화해 11월 5일 이후 50여 일간 격렬한 정치개혁 투쟁을 전개했다. 만민공동회는 먼저 구속 인사들의 석방을 위해 민중 집회를 열고, 불철주야 농성 시위를 벌여 독립협회 요인 17명을 석방시켰다. 11월 9일부터 10일간 6차에 걸친 상소와 계속적인 경복궁 앞의 민중대회를 통해, 익명서 사건의 진상 규명과 관련자의 처벌,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실천, 독립협회의 부설과 부상(負商) 혁파 등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정부 대신들의 민중대회 해산 요구가 거부되고, 어용단체인 황국협회(64)가 동원한 보부상단의 만민집회 습격에 의한 유혈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해, 사태는 긴박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1월 26일 경복궁 앞에 정부 관원과 각국 외교사절이 대좌한 가운데, 만민대표 200명과 부상대표 200명을 불러 국왕 친유(군민공동회)가 베풀어졌다. 고종은 칙어(勅語)를 통해 중추원 실시, 독립협회 부설, 익명서 사건 관련자 처벌, 부상 혁파, 헌의 6조 실시 등 만민공동회의 모든 요구조건의 실천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왕의 약속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다. 만민공동회는 상소를 통해 “국왕의 친유는 티끌만큼도 효험이 없다”라고 통박하고 즉각 실천을 촉구했다. 12월 12일부터는 만민이 각 부 문전에 나아가 요구사항의 실천을 촉구하는 실력행사에 돌입했다. 16일에는 중추원 회의에서 만민회 측 대표가 주동이 돼 민중이 신망하는 인물로 박영효·서재필 등 11명을 투표로 선정해 정부에 추천했고, 만민집회는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 같은 민중의 강경한 행동 방식과 중추원의 박영효 등의 천거, 그리고 이에 대한 만민집회의 지지 등 일련의 사태는, 국왕과 보수세력에게 이를 반체제운동으로 단정하게 할 구실을 줬다. 그리하여 12월 25일 정부는 민회 금압령을 내려 무력으로 민회 활동을 탄압, 금지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3. 의의와 한계
19세기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이 이뤄졌던 시기에,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의 사상을 가지고 독립협회가 추진한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은, 그 뒤 일제의 주권 침탈과 식민통치과정에서 항일독립운동과 국민국가수립운동 등 한국민족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됐다. 또한 독립협회 활동은 개혁을 통해 부강한 국가를 이룩하려는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었고, 이러한 노력과 의식들은 한말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지며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협회를 이끈 지도부의 지도력 부족, 친일적 성향, 민중 의식의 미성숙, 황실의 견제 등으로 인해 그 성과에 한계를 드러내어 결국에는 보수적 집권 세력의 탄압 속에 해체되고 말았다.
(56) 서재필(1864~1951)의 본관은 달성으로, 전남 보성에서 출생해 재종숙 서광하에게 입양됐다.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3등 합격, 교서관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됐다. 이 무렵 김옥균·서광범·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와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 육군학교에 유학했다. 1년간 현대식 군사 훈련을 교육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 설립을 건의해, 고종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을 만들어 사관장이 됐다. 갑신정변 당시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됐다. 그러나 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외교 문제를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고, 동생(서재창)은 참형됐으며 두 살 아들은 굶어 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주경야독했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대표로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했다. 그가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의 제이슨으로 입학한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돼,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어 미국에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 미국 시민권 취득).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으로 가서 낮에는 육군 의학 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 의과대학 야간부(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했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됐다. 다음 해 6월 미국 철도 우편 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의 딸과 결혼했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해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사업을 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 내각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그 뒤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 26일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서재필은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을 추진했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 개화파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했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돼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 독립 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됐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했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했다. 이후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했다. 또한, 배재학당에서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라는 학생 토론회를 조직했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 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그를 미국으로 추방해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 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1919년 본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 세계에 규탄했다.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 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간행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과 외교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의 갖은 방해 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돼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 정무관이 되어 귀국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977년 대한민국장에 추서 됐다. 비록 개화파 동지이자 이후 철저한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가 서재필을 인색하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여러 발자취를 남긴 뛰어난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57) 1896년 창간됐던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이다. 국문과 영문판으로 구성됐으며, 격 일간지로 출발해 일간지로 발전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에 들른 박영효로부터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가 1895년 3월 1일 자로 사면됐다는 사실과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자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1895년 12월에 귀국했다. 김홍집 내각은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내정하고 입각을 교섭했으나 서재필은 정부의 외곽에서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계몽하는 일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입각을 거절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된 때문으로 보고 갑오개혁의 성패 여부도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도 일본의 방해로 그들의 신문은 가지지 못했다. 그들의 개혁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얻기 위한 대중매체로 계몽적 신문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특히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은 1883년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의 창간 준비작업을 한 경험이 있었다. 또 그 자신이 서양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견문을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서재필과 유길준은 1896년 1월 새로운 신문사 설립과 신문의 국문 및 영문판을 3월 1일 창간하기로 협의했다. 서재필은 정부가 지원한 자금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인쇄기와 국문·한문·영문활자 등을 구입했다. 그리고 정동의 정부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고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김홍집 내각과 서재필이 시작해서 박정양 내각과 서재필이 최종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4면이었다. 제3면까지는 국문판으로 제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해 주 3회[화·목·토요일]격주로 발행했다. 제1면은 논설·신문사고·광고, 제2면은 관보·외국통신·잡보, 제3면은 물가·우체 시간표·제물포 기선 출입항 시간표·광고 등을 실었다. 영문판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는 사설(editorial), 국내 잡보(local items), 관보(official gazette), 최신 전보(latest telegrames), 국내외 뉴스 요약(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통신(communications), 의견 교환(exchanges) 등으로 구분해서 편집했다.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主筆)로 있으면서 국문과 영문판 사설을 맡았다. 주시경은 조필(助筆)로 국문판 편집과 제작을 담당했다. "독립신문"은 창간 때부터 1899년 12월 4일 폐간 때까지 4단계를 거쳐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제1기는 1896년 4월 7일 이후부터 1896년 7월 2일까지로,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창립할 때까지이다. 이 기간의 신문 논조는 주로 국민계몽이었다. 이 시기에는 정부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정부시책을 국민들에게 해설하고 전달했으며, 정부도 신문이 제시한 제안을 채택하는데 열의를 보였다. 당시 큰 문제로 대두했던 의병을 회유하는데도 협조했다. 논설은 온건했지만,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변화에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2기는 1896년 7월 4일부터 1898년 5월 11일까지로, 독립협회의 창립 이후부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출국할 때까지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독립협회가 전개한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 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 회원과 국민의 계몽에 주력했다. 1897년 1월 1일부터 영문판을 분리해 4면의 독립된 신문으로 발행하고, 크기도 2배로 확대했다. 주 3회 발행하는 격 일간지 영자신문은 제1면에는 광고·외신, 제2면에는 사설, 국내 잡보 및 관보, 제3면에는 각 부처 소식과 독자 통신, 단편적 논설·공고, 제4면에는 광고를 실었다. 중국 상하이와 제물포에 지국을 설치하고 통신원도 뒀다. 이때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친러 수구파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신문의 논조는 1897년 봄부터 정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변화를 보여 탐관오리를 서슴없이 고발했다. 특히 1897년 8월부터 러시아가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보내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각종 이권을 침탈하자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에 정부로부터 탄압이 가중돼 1897년 12월 중순에는 폐간 위험에까지 직면했다. 1897년 12월 서재필의 추방이 확정되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신문사의 인수 문제가 대두됐다. 결국 윤치호에게 인계돼 속간하게 됐다. 그 뒤의 논조는 더욱 비판적이었으며 독립협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제3기는 1898년 5월 12일부터 1898년 12월 30일까지로, 윤치호가 주필이 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명실공히 독립협회 기관지로서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 주장을 대변하면서 민중을 지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898년 7월 1일부터 격 일간지에서 일간지로 발전했다. 제4기는 1899년 1월 1일부터 1899년 12월 4일까지로,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부터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시기이다. 이 기간은 신문의 주필이며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독립협회 해산 후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로 임명돼 지방으로 떠난 시기이다. 주필은 처음에는 아펜젤러가 맡다가 1899년 6월 1일부터는 엠벌리가 담당했다. 이 시기의 신문 논조는 종래의 원칙을 고수했으나 내용과 표현 방식은 보다 온건해졌다. 정부 시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국민의 교육과 계몽에 주력하는 편이었다. 이 신문은 근대 민족주의 사상,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 사상을 강조해 국민들을 교육, 계몽한 것에 그 특색이 있었다. 신문이 강조한 것은 첫째, 자주독립과 애국심 그리고 국가 발전이었다. 당시의 정치체제는 군주국이었으므로 이것을 ‘충군애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충군은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이 신문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었다. 독립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서 국민 개개인의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둘째,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개화를 빨리하려면 교육이 가장 급선무라고 보고 신교육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셋째,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치고 국민 참정과 의회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넷째, 공중도덕의 앙양, 국민적 단결, 중상모략의 폐풍 시정, 사회에 기여하는 생활 태도의 배양 등 사회 관습의 개혁을 강조했다. 다섯째, 나라의 힘이 산업의 근대적 개발에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여섯째,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준법과 공정한 사회적 풍토 조성을 강조했다. 일곱째, 당시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위급함을 알려 국민적 각성이 없으면 자주독립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고 끊임없이 경각심을 높이면서 외세를 경계할 것을 강조했다. 독립신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한국인의 사상과 의식의 변화, 한국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요한 점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논설과 보도를 통해 근대사회의 확립에 필요한 지식과 사상을 공급해 개명 진보를 위한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변혁에 공헌했다. ② 당시 한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폭로 비판하고 나라의 독립과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데 진력했다. 친러 수구파와 결합해 이권 침탈과 내정간섭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격렬한 논조로 비판했다. 또 개항장에서 외국인의 국권침해나 한국인의 권익침해 사실을 고발했다. ③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관리는 임금의 신하요 백성의 종에 불과하다고 해, 국민을 군주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국민주권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또 국민이 권리를 갖고 그 권리를 행사할 때 나라의 독립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해 국민의 참정과 의회의 설립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국민주권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민권을 신장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④ 국문 전용·국문 띄어쓰기·쉬운 국어 쓰기 등을 실행해 민족 언어와 문자 '한글'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는 서재필의 민주주의적 결단과 주시경의 민족주의 사상이 결합해 이루어진 획기적인 것으로, 민중에 의한 민족문화 창달에 큰 공헌을 했다. ⑤ 당시 만연해 있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고발, 규탄해 백성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⑥ 독립협회 창립을 위한 일종의 사상적 준비작업을 했고 창립 후에는 기관지의 역할을 해 독립협회의 사상 형성과 자주민권자강 운동의 전개에 공헌했다. ⑦ 1898년에 있었던 만민공동회운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공헌했다.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만민공동회의 독자적 발전은 이 신문이 창간 이후 전개해 온 계몽활동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는 ≪독립신문≫이 순국문으로 편집돼, 민권 신장을 위한 논설에 치중해 민중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평민층에 많은 독자층을 이룬 데도 기인한 것이었다. ⑧ 역사상 최초의 민간지로 창간돼, 국민에게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해 정치 활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확립했으며, 구한말 신문과 출판문화의 발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⑨ 한국인에게 세계 사정을 알게 하고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게 했으며,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해 한국인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⑩ 영문판을 발행해 한국의 사정을 정확하게 외국에 알릴 수 있었다. 당시 국제 열강들은 일시 세력 균형이 이뤄져 서로 견제하면서 한국을 속국화 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정을 각각 자기들의 입장에서 왜곡해 세계에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불리한 보도가 많았다. 영문판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사정과 한국인의 의사를 공정하게 세계에 알려 한국의 독립과 권익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의 책임자는 서재필이었고 부책임자는 주시경이었으며, 그 아래 상당수의 탐방원이라고 부르는 기자를 두었다. 영문판의 편집에는 서재필의 조수로 헐버트의 도움을 받았다. 창간 당시에는 서울 정동의 본사 이외에 인천·원산·부산·파주·개성·평양·수원·강화 등지에 지국을 두었다. 그 뒤 신문이 발전하면서 지방 지국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돼 갔다. 국문판 발행 부수는 서재필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에는 300부씩 인쇄하던 것이 곧 500부가 되고 나중에는 3,000부씩 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1898년 1월 독립협회 회원이 2,000명이었을 때 약 1,500부를 발행했으므로 1898년 11월 독립협회 회원이 4,173명으로 늘었을 때는 3,000부로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문판은 의외로 구독자가 늘어 미국·영국·러시아·중국 등에 상당한 부수가 발송됐다. 영문판의 발행 부수는 1898년 1월 현재 약 200부였다. 물론 개략적인 숫자이지만 당시의 조건으로서는 많은 발행부수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발행부수의 증가 추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독 방식은 오늘날처럼 한 사람이 1부를 읽고 접어두는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때로는 시장에서 낭독도 하는 형태였다. 그러므로 실제로 독립신문을 읽거나 낭독을 들은 사람의 수는 발행 부수의 수십 배 또는 수백 배나 됐다. 1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실제 독자층은 발행 부수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판매는 정기 구독자에게는 배달제도와 우송제도를 병행했다. 또한 서울에서는 가판제도(街販制度)도 실시했다. 이 경우에는 신문판매자에게 20%의 이윤을 얻도록 배정했다. 창간 당시 1부의 생산비는 1전 6리였는데 신문 대금은 1부에 1전이었으로 1 부당 6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리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계몽이 목적이었으므로 적자를 감수하고 발행했다. 신문사는 적자 운영을 극복하기 위해 1897년 1월 1일부터 신문 대금을 인상했다. 또한 신문사 인쇄시설로 "그리스도신문"을 인쇄해 주고 시민의 명함을 인쇄해 수입을 보충했다. 그러나 신문사 수입의 대종을 이뤘던 국문판이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적자는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의 봉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신문사의 주필 월급은 받지 않고 무보수로 근무함으로써 충당했다.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친러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자 독립신문도 위기에 봉착했다. 정부는 윤치호를 외직으로 방출하고 신문사의 매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미국공사 알렌은 고종 및 수구파 정부와 결탁해 독립신문의 정간을 강력히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1899년 1월에 신문조례를 제정해 독립신문 등 각종 신문의 혁신적 논조를 탄압하려고 했다.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자 신문사는 아펜젤러를 주필로 추대해 속간하기로 결정했다. 아펜젤러가 주필로 취임한 1899년 1월 이후 정부 비판의 논조는 현저히 완화되고 온건한 계몽적 논설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독자들과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회원들을 실망시켜 독립신문의 위신을 저하시켰다. 또 독립신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완화하지도 못했다. 정부는 관료의 부정부패에 대한 정당한 보도에 대해서도 신문사를 수색하고 기자를 체포하는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를 인수하기 위한 여러 차례 공작을 시도했다. 신문사는 1899년 6월 1일부터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를 사장 겸 주필로 임명하고 아펜젤러가 동업자로 후퇴해 침체를 만회하려 했다. 엠벌리는 신문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국문판의 크기를 확대하고 영문판은 주 2회로 축소했다. 그러나 국문판의 논조는 맥이 빠지고 영문판은 오자투성이었고, 결국 2주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정부는 독립신문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1899년 7월 18일 신문사 사옥 반환을 요구했다. 신문사는 당시 심한 적자 운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이러한 요구는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신문사는 정부의 사옥 반환 요구를 몇 차례 연기시켰지만 무제한 미룰 수는 없었다. 정부가 노린 것은 사옥 반환이 아니라 이를 구실로 한 신문사의 매수였다.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서재필은 더 이상 신문사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판매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 1899년 11월 27일 신문사 사옥의 반환을 재촉했다. 미국 공사 알렌은 정부와 서재필 사이에서 신문사 매수에 대한 중개를 알선했다. 그 결과 서재필의 동의를 얻어 알렌은 대한제국 외부대신에게 12월 4일 회답에서 신문사 사옥과 함께 인쇄시설 일체를 1899년 12월 24일 일금 4,000원으로 정부에 양도하겠다고 회답했다. 이에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자 제4권 제278호로 종간호를 냈다. 정부는 신문사를 매수할 당시에는 아일랜드 사람을 주필로 고용해 국문과 영문판을 일간으로 속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신문사를 매수한 다음에는 "독립신문"을 영구히 폐간시켜 버렸다.
(58) 김홍륙(?~1898)은 함경도 출신으로 러시아 연해주를 왕래하며 어부 생활을 하다가 러시아어를 익혔다. 1894년, 1895년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조러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 유일의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통역을 맡으면서 신임을 얻어 그야말로 벼락출세했다. 1896년 정 3품 비서원승이 되고, 그해 11월 윤용선 내각에서 학부협판이 됐고 1897년 12월 귀족원 경이 됐다가 1898년 3월에는 한성판윤이 됐다. 1898년 친러시아파가 몰락할 때 사퇴했으며, 같은 해 8월 러시아와 교섭에서 사리를 취했다는 죄목으로 흑산도로 유배됐다.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의 생일 때 전선사 공홍식, 요리사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게 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해 마시지 않았고, 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김홍륙, 공홍식, 김종화는 사형을 당했다.
(59)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가 행한 정치 활동의 하나로 시민·단체회원·정부 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집회이다. 1898년 정부의 친러적 정책과 비자주적 외교에 반대해 일어난 집회로 자주외교와 국정개혁을 주장하는 등 성과를 보였다. 공동회 둘째 날인 10월 29일 6개 항의 개혁 원칙을 결의하고 이를 황제에게 헌의(獻議) 키로 했다. 이날 결의된 헌의 6조(獻議六條)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에게 의부(依附) 하지 말 것. 둘째,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이 단독으로 하지 말 것. 셋째,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할 것. 넷째, 중대 범인의 공판과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다섯째, 칙임관의 임명은 중의(衆議)에 따를 것. 여섯째,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등이다. 이 결의에 따라 고종은 헌의 6조를 수정 없이 재가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의 수파 세력은 황제에게,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의회개설 운동을 통해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 회원을 체포하고 독립협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또한 헌의 6조는 폐지됐으며, 정부는 황국협회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했다. 두 단체는 서로 대립했으며, 이들의 충돌로 혼란이 야기되자 정부는 협회의 해산을 칙령으로 명했다. 이후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8년 말에 소멸되고 말았다.
(60) 국민자유권론은 본래 천부불가양(天賦不可讓)의 자연권을 전제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침범을 방지하자는 데 그 시초의 출발이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은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동일하며,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움직일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천부의 자유권을 의식했고, 갑오개혁 추진자들은 홍범 14조에 '민법과 형법을 제정해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을 규정해 국민의 자유권 보장을 천명했다. 독립협회 회원들도 '사람은 누구나 생명·재산·자유 등 하늘이 부여한 양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천부불가양의 인권론에 근거해 국민자유권론을 주장했다. 독립협회의 국민자유권론은 먼저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자유로 주장됐다.
(61) 천부인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천부의 권리로 자연권이라고도 한다. 홉스나 로크와 같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주장해 미국 독립선언이나 프랑스 인권선언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천부인권은 초국가적ㆍ전법률적 불가침의 권리이므로 국가권력이라 할지라도 침해할 수 없으며 국가가 이를 침해한 경우 침해자인 권력자에 대한 저항권이 인정된다. 천부인권은 18세기 유럽에서 시민계급의 대두를 배경으로 등장했는데, 근대의 계몽적 자연법사상에서 제창된 자연법론의 하나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과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가진다며 자연권론(천부인권설)을 주장했다. 근대적인 자연권사상은 영국의 홉스, 로크, 프랑스의 루소 등의 근대자연법론과 사회계약설에 의해 형성돼 17∼18세기 영국ㆍ미국ㆍ프랑스 시민혁명의 사상적 지도이념이 됐다.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자연법사상은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 1776년 미국 버지니아주 권리장전과 미국독립선언서, 1789년 프랑스의 인권선언에서 표현됐으며 이후 모든 입헌국가에서 근대 입헌민주주의 헌법상의 기본적 인권보장으로 성문화됐다. 또한 국제연합(UN) 헌장(1945)과 세계인권선언(1948)에서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헌법 제10조에서 천부인권에 바탕을 두고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62) 국민평등권론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토론회 때마다 인신매매와 인간차별을 죄악으로 비판하는 이론적 바탕이 됐다. 그들은 인간평등사상에 기초해, 이미 갑오개혁에 의하여 법률적으로 폐지된 반상제도와 노비제도 등 신분제도를 현실적으로 철폐할 것을 역설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을 통해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논설을 통하여, 법률이란 상하·귀천·빈부·세력의 유무를 불문하고 공평하다는 논리에 의거, 사람은 누구나 법적으로 동일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법률 적용의 평등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나아가 독립협회 회원들은 신분의 차별 없이 전국 인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고, 능력에 따라 공무 담당을 균등하게 해야 한다면서 국민의 기회균등을 주장했다. 독립협회의 국민평등권론은 신분제도 철폐론과 동시에 남녀평등론으로도 주장됐다.
(63) 낡은 법을 고쳐서 스스로 나라를 굳세게 하고, 아울러 법령을 개혁해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것이다. 중국 淸(청) 나라 말기에 캉유웨이(康有爲)가 주장했다.
(64) 황국협회는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 6월 30일 독립협회에 대항키 위해 조직된 어용단체이다. 개화파가 조직한 독립협회의 혁신적인 요구에 맞서 수구파 관료들이 적극 지원하는 등 사실상 정부가 활동을 조종했다. 황국협회 지도부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이후 의병장으로 활동한 허위 등이 참여했으나, 회원 대부분은 보부상이었다. 법부 민사국장 이기동이 회장을 맡고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1,000원을 하사했다. 훈련원에서 발족식이 거행되는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황국협회는 설립목적으로 ‘독립협회 타도’를 내세우는 등 정치적으로 독립협회와 반대되는 견해를 내세웠다. 이름처럼 황권의 강화를 통한 부국강병이 지론이었다. 반면 1896년 7월 창립된 독립협회는 사교클럽 형식으로 출발했으나 민중계몽단체, 근대적인 정치단체로 발전했다. 서재필·이완용·안경수 등 개화파에 속하는 인물들이 창립을 주도했다. 미국, 러시아와 가까운 입장이었던 이들은 청나라가 대한제국의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 도입과 입헌군주제 등 개혁적이고 혁신적인 주장을 폈다. 특히 미국에서 유학해 선진 정치와 민주주의를 체험한 서재필은 근대국가로 개혁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다고 판단했다. 그는 1884년 12월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95년 말 귀국했다. 서재필은 귀국 이듬해인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같은 해 7월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내세워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정부가 황국협회 결성 및 지원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차 반정부ㆍ반체제로 흐른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1896년 2월부터 1년 동안 러시아 공관에서 거처한 아관파천에 대해 친러 행위라며 비판했다. 1898년 10월에는 정치와 외교, 사회 등 제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독립협회는 자주적 전제 황권의 강화, 이권양도의 반대, 예산공개 등의 국정개혁안을 담은 헌의 6조를 건의하는 등 혁신적 민중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국가 재산이 러시아로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하자, 독립협회는 친러 정부라며 강력 규탄했다. 정부는 독립협회의 활동을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는 도전으로 간주, 원세성·김경수·이병조 등 궁중 수구파를 앞세워 황국협회를 만들었다. 정부는 황국협회를 승인하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법부 민사국장 이기동은 수천 명의 보부상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등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 회장으로 추대됐다. 황국협회는 조직 성격상 단결력이 강하고 관청과도 결탁됐던 보부상을 활용, 민중집회 방해 등 독립협회 무력화에 나섰다. 1898년 11월에는 소위 익명서 사건이 발생, 독립협회에 치명타를 안겼다. 이는 수구파 중심의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는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라고 모함한 사건이다. 수구파는 독립협회의 중추원 관제 개편 시도 등을 잠재우기 위해 고종을 폐하고 공화국체로 변화시키려 한다는 벽서를 붙였다. 정부도 반독립협회 여론을 조성하며 이상재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검거했다. 또 국가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독립협회를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의 해산을 명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부당한 탄압에 항거하고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황국협회의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해 테러를 가했다. 서울 곳곳에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자 고종이 직접 화해를 종용하기도 했으나 곧 군대를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 1898년 말 이마저도 없어졌다. 타도 대상인 만민공동회가 사라지자 존재 목적이 없어진 황국협회도 해산됐다. 독립협회 타도에 앞장선 보부상 중 일부는 나중에 항일운동에 나섰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