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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Sep 02. 2024

갑오개혁

3. 갑오개혁

     

1. 개요 

1894년(고종 31)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간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을 말한다. 갑오년(1894년)에 시작한 개혁운동이라는 의미에서 갑오개혁(甲午改革) 또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을미사변(51)을 계기로 추진된(1895년 8월~1896년 2월) 제3차 개혁을 따로 분리해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봉기한 반봉건·외세배척 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가운데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청·일의 출병 구실을 막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했고, 정부가 동의함에 따라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에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철병할 것을 제안했으나, 일본은 오히려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안했으며, 청나라가 이를 거절하자 청일전쟁(52)이 발발하게 됐다. 결국 전쟁을 승리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했는데, 이는 침략 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확립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정권 일파를 축출했으며, 김홍집(53)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정부를 수립했다.


2. 내용 

가. 제1차 개혁(1894년 7월 27일~12월 17일)

이 개혁은 1894년 7월 10일 남산에 있는 민영준(민씨 척족의 거두)의 별장인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 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됐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 의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했다. 그러나 1894년 7월부터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돼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됐으며, 김홍집·김윤식·김가진 등 1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이 설치됐다. 군국기무처는 중앙과 지방의 제도·행정·사법·교육·사회 등 제반 문제에 걸친 사항을 3개월 동안 208건을 심의 의결하는 개혁의 주체세력이 됐다.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해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로 구별하고 종래의 6조(六曹)를 8 아문(八衙門)으로 개편,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했다. 또 국왕의 인사권·재정권·군사권 등을 박탈하거나 축소했다. 군국기무처는 의정부와 8아문을 정부의 실질적 집권기구로 만들어 권력을 집중시키고 국왕의 권한을 축소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의정부와 8아문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서울에 경무청(警務廳)을 새로 설치해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게 했다. 더불어 지방에는 각 도 관찰사 아래 경무관을 배치해 치안을 맡게 함으로써 행정과 경찰권을 구분토록 했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해 재정의 일원화를 도모했다. 또 신식화폐장정(新式貨幣章程)에 따른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실시했으며, 도량형(度量衡)을 개편해 일본식으로 통일했다. 이밖에 문벌·반상제도, 문무존비(文武尊卑) 구별폐지, 노비의 매매 금지, 연좌율 폐지, 조혼 금지, 과부 재가 허용 등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된 여러 제도와 관습에 대해서도 개혁했다.

나. 제2차 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제2차 개혁은 김홍집·박영효의 연립내각에 의해 추진됐다. 이때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했다. 지방 행정구역은 8도(道)를 23부 337군으로 개편했다.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함으로써 횡포와 부패를 막아 지방행정 체제를 중앙에 예속시키는 근대 관료체제를 만들었다. 사법제도는 행정기구에서 분리해 재판소를 설치하고 2 심제가 채택됐다. 1심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를, 2심 재판소로는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를 설치했고, 왕족에 대한 형사재판을 위해 특별법원을 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을 추진하던 내부대신 박영효는 삼국간섭(54)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며 과감하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박영효의 지나친 독주는 그의 귀국과 입각을 주선했던 일본 측은 물론, 고종과 명성황후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결국 음도불궤죄(陰圖不軌罪: 몰래 반역을 도모한 죄)의 혐의로 쫓겨나 일본에 재차 망명해야만 했다. 이로써 제2차 개혁은 끝이 나고 말았다. 

3) 제3차 개혁(1985년 8월 24일~1896년 2월 11일)

제3차 개혁은 을미년(1895년)에 시작됐다고 해서 1, 2차 갑오개혁과는 달리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이 내각에서는 박정양을 위시한 친미·친러파가 우세했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일본의 퇴조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다시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 그래서 김홍집 내각은 1, 2차 갑오개혁을 이어 추진하게 됐다. 제3차 개혁의 내용은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체소 설치, 소학교 설치, 1세 1원(一世一元)의 연호 사용[1896년 1월 1일부터 건양(建陽)이라는 연호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斷髮令) 등이다. 그러나 단발령의 시행은 유생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반일·개화운동을 초래했다. 결국 고종의 아관파천(55)으로 김홍집 내각은 붕괴됐다. 이로써 갑오개혁은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3. 갑오개혁의 평가 및 의의 

갑오개혁은 봉건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 사회 내부의 개혁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율적 개혁의 성격을 지니지만,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타율적 개혁의 성격도 지닌다. 조선의 침략과 예속화를 꾀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뤄진 개혁이므로 군사 부문의 개혁이 미흡했으며, 일본 등 외세에 의존한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추진돼 일반 민중들에게 폭넓은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이어진 각종 제도와 관습을 시대변화에 따라 바꾸고, 중국과 사대관계를 단절했으며, 노비제도가 없어지는 등 신분제도도 사실상 철폐했다. 다만 노비제도 철폐에 대한 실제 인식은 종전과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젊은 노비들은 해방된 뒤 도시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대부분의 노비들은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던 집에서 신분만 머슴으로 바뀐 채 약간의 급료를 받아가며 이전과 똑같은 일을 했으며 대우 역시 노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양반들에게 최고로 충격적인 조치는 다름 아닌 과거제 폐지였다. 그래서 과거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젊은 유생들이나 그 부모들을 정신적 충격과 혼란에 빠뜨렸다. 당시 막 성인이 됐던 이승만은 자서전에서 과거제 폐지로 정신적 혼란을 일으킨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상세히 적어뒀는데, 이승만의 아버지는 과거제 폐지 소식을 듣자 손바닥으로 방바닥과 책상을 치고 무릎까지 치면서 일본과 개화파를 욕했다고 하며, 이승만은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 있는 청년들의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라고 자서전에 쓰기도 했다. 조선 8도가 조선 13도로 변한 것도 이때이다. 현재 대한민국 행정구역 편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1~3차 갑오개혁은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 12조 인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 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 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칠반천인의 대우 개선 등 보다 훨씬 더 진전되고 획기적인 개혁 조치였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한 개혁이라기보다는 일본이 주도한 타율적인 개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1884년 갑신정변 때 동학농민운동이 같이 일어나 개화파 세력이 동학농민군을 포함한 다수의 민중 세력과 손잡고 우리 스스로 1894년 갑오개혁과 같은 조치를 했더라면 우리 역사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1)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과 낭인들이 조선 왕후를 살해한 사건이다.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됐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듬해 2월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는 계기가 됐다.

(52) 청일전쟁은 1894년 6월∼1895년 4월 사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이다. 전쟁을 철저히 준비한 일본은 부패한 청나라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동양 패권을 중국으로부터 넘겨받는 계기가 됐다.  

(53) 김홍집(1842~1896)은 참판 김영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7년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주일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치면서 개화를 간언했다. "조선책략"은 외교정책에 관한 것으로 조선이 청과 일본, 미국과 협력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라는 조언이 담겼다. 김홍집의 간언은 개화 정책을 수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개화 정책은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임금을 현혹시킨 "조선책략"을 불태우고 김홍집에게 벌을 주라”며 들고일어났다. 무려 1만여 명의 이름으로 상소한 이 사건을 ‘영남 만인소 사건’이라고 한다.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은 김홍집은 사퇴했으나, 얼마 후 고종의 부름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이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을 때나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활약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수습책임을 맡아 내각을 구성하고 정치개혁을 건의했다. 이때 구성된 내각을 제1차 김홍집 내각이라고 한다. 같은 해 일본의 주도 아래 갑오개혁이 일어났을 때는 군국기무처 총재로서 제2차 김홍집 내각을 이끌었고, 1895년 을미사변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개혁은 일본에 기대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게 됐다. 1896년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김홍집 내각이 무너졌다. 이때 친러 관리들로 이루어진 내각이 들어섰고, 친일파 대신 중 많은 수가 죽었다. 김홍집도 아관파천 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들로부터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54) 삼국간섭은 청일전쟁 뒤에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일본에 가한 간섭을 말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타이완, 펑후섬 및 랴오뚱반도를 얻었다. 만주 진출을 기도하고 있던 러시아는 위협을 느껴 독일 및 프랑스 지지로 일본의 랴오뚱 반도 영유는 동양의 평화를 방해한다며 일본에게 랴우뚱 반도를 청에게 돌려줄 것을 권고했다. 일본은 이 간섭에 굴복해서 랴오뚱 반도를 청국에 반환했다. 이 간섭의 보상으로 러시아는 청국에 많은 요구를 해 1896년에 만주로 이어진 철도부설권을, 1898년 3월에는 뤼순, 따롄의 조차권을 획득했다. 독일은 1897년 11월에 쟈오조우 만을 조차했고, 프랑스도 1898년에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광저우만을 조차했다.

(55) 아관파천은 조선의 왕후가 일본 군인과 낭인에 의해 살해된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이다. 갑오개혁 이후 조직된 제4차 김홍집 내각은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으나 왕후 민 씨 시해와 단발령은 친일 내각과 그 배후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해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베베르)와 협의해서 러시아 공관으로 이동했다. 일국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해 타국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러시아 공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유길준·정병하·조희연·장박의 다섯 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해 처형토록 명령했다. 순검들과 흥분한 군중들은 퇴청하던 김홍집·정병하를 체포해 타살했고, 피신한 어윤중은 다음날 지방에서 붙잡혀 살해됐다. 유길준·조희연·권형진·우범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동안 잠적했던 김윤식은 체포돼 다음 해 제주도로 유배당했다. 이로써 친일 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이완용·조병직·이윤용·윤용구·이재정 등 친러·친미파로 내각을 구성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 수습에 힘쓰는 한편, 친일 정권에서 일본식으로 개혁했던 내각제도를 구제인 의정부제로 환원했다. 일시에 기반을 상실한 일본은 독립국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했으나 고종은 "불안·공포가 도사린 궁궐보다는 러시아 공관이 안전하니 환궁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다. 이후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한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 채벌권을 비롯해 경원·종성의 광산채굴권, 경원 전선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주요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서구 열강도 조선에 이권을 요구해 경인 및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간은 러시아 영향력 아래 놓이게 돼 조정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 구입과 중앙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됐으며, 재정도 러시아인에 의해 농단됐다. 탁지부 고문으로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예프는 탁지부대신처럼 행세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대내외 압력에 따라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해 대내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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