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인과 배경
3.1 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했다. 특히 헌병경찰제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ㆍ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 처벌을 가해 인권을 무참히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 1910년대에 지속해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됐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지가 높아졌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됐고,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됐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 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진행됐다.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 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돼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등을 추진했다.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돼 파괴됐지만, 이들의 활동은 3.1 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됐다. 둘째는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ㆍ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 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중요한 거점이 돼,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 수탈에 대한 농민ㆍ노동자의 생존권 수호 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 투쟁, 삼림정책 반대 투쟁, 각종 조세 반대 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ㆍ노동자의 투쟁 양상은 3.1 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 성격을 강화해 나타났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 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 동인이었다.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65)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 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불가리아 왕국이 연대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세력 관계가 재조정돼 국제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주의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됐다. 아울러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해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됐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66)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67)를 주창해 세계의 식민지 약소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해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 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2. 준비 과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했다. 상하이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김규식·장덕수·김철·선우혁·서병호·한진교·조동호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 단체의 대표인 여운형은 그해 11월 28일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미국인 찰스 크레인에게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해 주도록 부탁했다. 또한 상하이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언론인 밀러드에게도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 줄 것을 부탁했다.(68) 아울러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키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ㆍ김철ㆍ서병호, 김순애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해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했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ㆍ민찬호ㆍ정한경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 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조소앙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ㆍ김좌진ㆍ황상규ㆍ박찬익ㆍ김교헌ㆍ안창호ㆍ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1919년 3월 11일 이를 발표했다. 음력으로 무오년에 작성됐다고 해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69)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김도연·백관수·서춘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과 이광수를 국내와 중국의 상하이로 파견했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 독립선언서'(70)는 일제의 국권 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했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 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다가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송계백도 최린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최남선·송진우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는 함께 협의했고, 여기에 한용운(71)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했으나, 2월 하순 박희도와 이갑성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한성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72)가 인쇄돼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됐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했다.
3. 전개 과정
3.1 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됐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농촌 등지로 전파되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됐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했다. 국외로도 확산돼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 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는 경성(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돼 운동이 시작됐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도시 확산기)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됐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 확산기)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됐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해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했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월 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경성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했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오후 3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해 스스로 체포됐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해서 강기덕 등을 민족 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시 30분 무렵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경성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월 2일에는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 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됐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경성으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경성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이에 참여했다. 이날의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해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데 큰 구실을 했다. 3월 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돼 전국적 규모로 확산됐는데,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으며, 비밀결사와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했다.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ㆍ배포해 투쟁 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 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1 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 "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등 30여 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조선독립신문"은 27호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 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됐으며,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됐다. 경성에서는 3월 5일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3월 4일에 시작된 평양과 선천의 철시 투쟁에 이어 3월 9일부터 경성 시내의 주요 상점도 철시를 하면서 상인들도 항일투쟁에 나섰다. 3월 20일 무렵부터는 노동자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노동회보>가 배포됐고, 3월 22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됐다. 그날부터 시내 곳곳에서 야간시위가 계속됐으며, 3월 26일에는 경성철도와 전차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항일시위는 고양·부천·시흥·김포 등 주변 농촌 지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농민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시위 주동자들은 각 마을로 통문을 돌리거나 전단을 살포해 미리 시위 계획을 알렸다. 장을 돌아다니는 행상들은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경험을 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과거 의병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에서는 횃불 시위와 야간 산상(山上)의 봉화 시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떼를 지어 며칠씩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가하는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진주, 수원, 해주, 통영의 기생들도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만세 시위운동이 발전될수록 투쟁 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 됐으며, 비폭력적인 만세 시위운동에서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폭력투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으로 나타난 것도 있었지만, 일제의 권력기관에 대해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헌병의 총격 등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면 군중들은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해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금융조합, 일본인과 친일 인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각종 수탈용 장부와 무기를 빼앗아 소각하는 등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제의 권력기관을 접수하려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강원도 통천에서는 총검으로 무장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국외 독립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지방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했는데, 간도·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3.1 운동 당시 국내 진공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는 3.1 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경기도 화성 제암리(73)ㆍ천안 아우내(74)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해서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제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3.1 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 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아울러 46,948명이 구금됐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됐다.
4. 의의와 한계
3.1 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우리 민족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뤘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ㆍ조직화ㆍ활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민중들은 3.1 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3.1 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75)로 바꾸게 했으며, 중국의 5.4 운동(76)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ㆍ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反英)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1 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 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완화해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해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3.1 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해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또한 3.1 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됐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 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하지만 3.1 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 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했다. 그리고 왕조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 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일부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77)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5)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의 통감(統監)으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됐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했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그것이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포고를 했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7월 5일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 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봤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확산될 것을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딪힌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전쟁의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의 군비 강화가 1914년 여름에 절정에 달한 반면에 프랑스나 러시아의 군비 강화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으므로, 그때가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 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해 즉각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선포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를 불가능하게 했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전쟁 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강경한 태도를 바꿔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 교섭에 응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단순히 위기로 그치지 않고 전쟁으로 급선회한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해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 기한으로 통첩을 보내고, 러시아가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면서 선전포고를 하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해 벨기에로 침입했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전체 유럽전쟁으로 발전했다.
(66) 1917년 11월 7일 성공한 러시아혁명(러시아 구력인 율리우스력은 1917년 10월 25일로 러시아에서는 10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지칭)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이후에 스탈린(1879~1953) 체제의 잘못된 정책을 레닌주의에서 싹튼 것이라 보는 시각과 소련의 붕괴는 사회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러시아혁명을 폄하하는 근거가 됐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우선 유럽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복지정책과 체제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를 다듬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큰 위험인 계급 갈등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의 발생을 위협의 시작으로 여긴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본주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즉, 자본주의 국가의 복지정책과 국가의 개입을 통해 계급 갈등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의 배경에는 러시아혁명이 있었다. 연장 선상에서 러시아혁명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의는 약자와 피지배 계층의 권리 보호라는 인식을 널리 일깨웠다는 점이다. 노동자로부터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이후 스탈린체제에 의해 퇴색되기 전까지 피지배층의 권리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게 된다. 물론 정책이 실행 과정에서 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참정권 확대 등 그동안 외면됐던 약자층의 권리를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혁명은 레닌(1870~1924)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와 평가가 이뤄졌다.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러시아혁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전통주의 시각과 그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수정주의 시각이다. 이 두 흐름 이외에도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과 기타 신문화사의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려는 연구들도 진행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통주의 시각에서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체제의 테러와 학살로 이어지게 만든 부정적인 역사의 유산이고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소수의 엘리트 독재였다. 따라서 이러한 보수주의 관점 역사가들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정당성을 부정한다. 리처드 파이프스로 대표되는 이러한 견해는 냉전시대 소련에 대한 적개심에서 출발했으나 1990년대 소련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인식됨에 따라 더욱 거세졌다. 1970~198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혁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전통주의 견해에 대해 수정주의 시각의 도전이 시작됐다. 수정주의 시각은 러시아혁명을 대중의 지지와 열망에서 시작되어 레닌과 볼셰비키당의 노력으로 이어져 완성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혁명으로 본다. 오히려 러시아혁명은 레닌 및 소수 엘리트들이 일으킨 독재가 아닌 농민과 노동자 등 대중의 지지를 얻은 정당한 사회주의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러시아혁명을 전제군주 체제 하의 사회구조 모순, 즉 러시아의 근본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의 결함과 계층 간의 갈등이 일으킨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수정주의 사가들은 레닌주의와 스탈린체제의 차별을 통해 스탈린체제의 학살과 오류를 무조건 러시아혁명과 연결시키려는 전통주의적 시각에 대응한다. 20세기에 들어서 이뤄지고 있는 제3의 연구 경향은 이러한 두 시각의 장단점을 인식하며 러시아혁명에 대해 새로운 설명의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새로운 문화적 요소(노래, 깃발, 팸플릿)나 다양한 사상에 대한 연구를 사회 전체구조 연구와 동시에 진행하면서 러시아혁명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67)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전승국들의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개최됐다. 이 강화회의의 기본원칙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1918년 1월 미국 의회에서 연두교서를 통해 제창한 14개 조의 평화 원칙이었다. 그중에서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태에서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약소민족들에게는 큰 희망을 주었다. 즉,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실현하는 사상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식민지를 내놓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패전국이나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던 일부 약소민족에게만 적용됐다. 즉 전승국이 지배하거나 점령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문제는 의제로 거론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가한 이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는 아예 논의조차도 되지 않았다.
(68) 독립청원서 청원자는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의 명의였으며, 날짜는 1918년 11월 29일로 됐다. 2통의 청원서를 작성한 여운형은 크레인과 밀러드에게 직접 전달했다.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정의, 인도, 자유에 기초한 승리가 됐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이 세계 평화의 유지기관으로 제시됐는데, 한국과 일본 문제는 동양 평화 및 세계 평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중략)”로 시작했다. 특히 일본의 강압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 피식민지 조선인들의 처참한 상황 등을 설명했다. 이어 조선의 독립은 동양 평화는 물론 세계 평화에도 반드시 필요하므로 꼭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하지만 이 독립청원서는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당사자인 크레인 특사가 전달하지 않았다. 아마도 크레인 특사는 신한청년당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보내는 청원서라고 판단해 전달하지 않았던 듯하다. 언론인 밀러드에게 부탁한 독립청원서 역시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지 않았다. 밀러드가 일본 경찰에게 독립청원서를 탈취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여운형이 큰 기대를 걸었던 독립청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독립청원서 전달을 계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한 김규식의 활동을 성원하고 나아가 조선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해 3.1 운동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9)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의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이다. 작성 시점이 3.1 운동 전인 무오년에 작성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오독립선언서라고 했지만 실제로 작성 시점이 무오년이 아니고 1919년 3월 초로 보는 것이 맞다. 선언서에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명기돼 있다는 점에서 무오독립선언서라고 부르기보다는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명칭 함이 올바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 명의로 1919년 3월 11일 각지에 배포됐다. 이 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은 조소앙이다. 독립선언서가 작성되는 과정은 정원택이 작성한『志山外遊一誌』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정원택은 1912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이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1918년 음력 12월 20일 중국 선양(瀋陽)에 있던 정원택은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신규식으로부터 편지 1통을 받았다. 편지에는 “유럽의 전쟁이 종식됐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게 되었다. 약소민족이 궐기할 시기”라고 하면서 “상하이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미주와 국내로 연락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며, 또한 파리 회의에 특사를 보낼 계획 중인데 서간도와 북간도에 연락하지 못했으니 그 역할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에 정원택은 이틀 후인 음력 12월 22일에 지린(吉林)으로 가서 박찬익, 조소앙, 여준 등을 만나서 편지에 담긴 내용을 논의했다. 이후 1919년 음력 1월 27일 여준의 집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됐고, 다음날 대한독립의군부의 각 부서를 정했으며, 파리 회의에 대한 대응, 상하이에 지린 대표를 파견하고, 구미, 서북간도, 러시아령 등에 대해서도 연락을 취하고 자금모집을 위해 국내에 인원을 파견한다는 것 등이 결정됐다. 이에 따라 지도부는 1919년 음력 2월 1일 독립선언서 작성을 조소앙에게 부탁했으며, 조소앙은 그의 동생 조용주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후 1919년 음력 2월 10일(양력 3월 11일) 대한독립선언서 4천 부를 인쇄해 서북간도, 러시아령, 구미 각국, 북경 및 상해, 국내, 일본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 '대한독립선언서(조소앙)'는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이광수)', 그리고 민족 최대의 독립만세운동 궐기문인 '3.1 독립선언서(최남선)'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서로 꼽힌다.
(70) 2.8 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이다.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의제로 논의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자극받아 당시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가 서울에서 현상윤, 최린과 만나서 독립운동을 논의했고, 그해 11월 도쿄로 돌아와서 와세다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최팔용과 유학생들을 규합해 독립선언을 기획하게 됐다. 이광수가 2.8 독립선언서를 한국어와 영어로 작성했다. 유학생들은 2월 8일 오전, 각국 대사관과 일본의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여러 신문사에도 독립선언서를 발송했다. 이날 오후 2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유학생 총회가 예정돼 있었다. 회의가 개최되자 최팔용에 의해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는 긴급동의가 요청됐다. 이윽고 독립선언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됐고,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즉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 이에 조일합방이 조선인의 뜻에 반하는 것인 만큼 일본은 조선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조선합병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이다”라면서 4개 항의 결의문을 선언했다.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대회에 참가한 60여 명의 조선인 유학생을 체포하고 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주모자였던 최팔용, 백관수를 비롯한 학생 8명이 기소됐다. 이 사건의 항소심을 무료 변론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들은 조국을 일본 제국주의에 빼앗긴 탓에 갈 곳을 잃고 강제 연행까지 됐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조선인에 대한 무책임과 무대책이 낳은 결과이다.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을 탄압하는 것이 오히려 위법이다”라고 변론했다. 이 사건은 국내에 바로 전파됐고, 2.8 독립선언서도 국내로 반입돼 3.1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천도교의 수장이던 손병희는 “어린 유학생들이 저렇게 독립운동을 하니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느냐”라며, 그날로 천도교 최고 간부 회의를 소집해서 독립운동 참가를 결정했다.
(71)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됐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항쟁을 목격하면서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다며 1896년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귀국 후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 선사를 은사로 출가해 승려가 됐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3년간 복역했다. 일제 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도 민족적 의기를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다.
(72) 1919년 3.1 운동 때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작성된 장문의 독립선언서이다. 3.1 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라고도 한다. 민족대표 33인의 공동명의로 발표됐으며, 초안을 쓴 사람은 최남선, 대원칙을 세운 사람은 손병희, 한용운이 공약 3장을 작성했다. 애초에는 대중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발표하려고 했으나,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이라는 요리 집으로 장소를 바꿔 선언식을 진행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은 선언서를 낭독한 즉시 경찰에 자수하고 순순히 연행됐다. 한편 탑골공원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민족대표 33인의 선언식과는 별도로 선언식을 진행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했다.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73) 1919년 4월 15일 아리타 도시오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수원 제암리에서 교인 약 30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잠그고 사격을 퍼부었다. 이때 한 부인이 아기를 창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 군경은 그 아이마저 잔혹하게 찔러 죽였다. 이 같은 만행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본군은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바깥으로 나오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까지 모두 타 죽게 만들어 무고한 양민 28명을 학살하고 다시 부근의 채암리에 가서 민가를 방화,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학살했다. 이 같은 만행에 분노한 선교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일본군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미국으로 보내 여론화했다. 1992년 제암리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됐다.
(74) 1919년 4월 1일 유관순 등이 주동이 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운동이다. 경성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이화학당 재학생 유관순은 3.1 운동 직후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에게 경성의 시위 상황을 전하고 4월 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가 부상 또는 투옥으로 고초를 겪었다.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 결과를 거부하면서 저항한 끝에 법정 모독죄가 추가돼 7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1920년 20세 나이로 옥사했다.
(75) 3.1 운동이 일어난 이후인 1920년대부터 일본이 내세운 식민지 통치정책이다. 겉으로는 조선인을 존중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교묘하게 감시하고 탄압하는 통치 방법이었다. 주로 일본군 사령관이 맡아하던 조선 총독 자리를 일본인 문관이 맡을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고 조선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헌병 경찰제도 대신 ‘보통 경찰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조선의 문화나 전통을 인정한다고 발표하거나 제한적으로 언론과 집회, 출판의 자유를 허용키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문화정치를 내세운 이후부터 해방이 된 1945년까지 조선총독 자리에 문관을 임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한 헌병 경찰은 없앴지만 보통 경찰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문화정치를 내세운 첫해인 1920에 경찰관서의 수는 1918년보다 3.6배, 경찰관의 수는 3.4배에 달했다. 아울러 고등 경찰 제도를 새롭게 만들어 우리 민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이와 같이 문화정치는 우리 민족의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기만책이고 일제는 총칼을 든 헌병 경찰 대신 친일파들을 적극 이용했고, 친일파들은 일본인 경찰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렇듯 교묘한 문화정치로 인해 민족 지도자 가운데에서 친일파로 변신하는 사례(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최린, 송진우, 윤치호, 김활란, 모윤숙 등)가 생겨나기도 했다.
(76) 중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이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사건으로 평가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서구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고 있었다. 일본은 위안스카이와 타협해 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중국 내에서 군사적 행동과 기지 설치 등의 승인을 받았다. 제1차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은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 양보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반대 집회를 벌였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 반대 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혁명(1917) 이후의 신문화운동도 경험했다. 그리하여 이 5.4 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위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77) 사회주의 사상은 3.1 운동이라는 민족운동의 분수령을 계기로 민족 내부에 수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결과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세력과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사의 주요 담당자로 등장했다. 민족주의 사상은 3.1 운동 이후 점차 친일로 기울어지는 실력양성론 즉 민족개량주의 노선으로 전락했다. 때문에 민족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지도이념을 요구하게 됐다. 이때 사회주의가 선진적인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됐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고학생동우회는 친목단체였지만 실상은 사상단체였다. 동우회는 기관지 "동우"를 발간했고, 발기인 김찬·이기동·김약수·정태성·박열·김사국·정태신 등은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