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3.1 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서로 정보교환이 어려웠던 관계로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한 노령정부(78), 상하이에서 조직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정부(79) 그 밖에도 조선민국임시정부,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등이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 조를 채택했으며,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수립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됐다.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했다. 이후 9월 6일에는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한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개정안에 따라 9월 11일 노령·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국호는 상하이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대한민국으로, 제1차 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26년 9월 임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했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 형태의 주류를 이뤘다. 1945년 8.15 광복까지 상하이(上海, 1919), 항저우(杭州, 1932), 전장(鎭江, 1935), 창사(長沙, 1937), 광저우(廣州, 1938), 류저우(柳州, 1938), 치장(綦江, 1939), 충칭(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2. 조직 및 헌장
가.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 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했으며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했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했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 문서 국내 전달, 인물 발굴 및 무기 수송 등의 활동을 했다. 연통제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휘·감독하기 위해 설치했던 비밀연락망이다. 1919년 7월 10일 내무총장 안창호의 발의에 따라 임시정부의 국무원령 제1호로 실시된 연통제는 내무총장 관할 아래 서울에 총판(總辦), 각도에 독판(督辦), 군과 부(府)에는 군감(郡監)과 부장(府長),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도록 조직했다. 간도 지방에는 독판부(督辦府)가 설치돼 주로 임시정부 및 해외 독립운동 상황의 국내 전달과 국내에서의 독립자금 모집 및 반일 활동 지휘 등을 위한 행정 연락 기구로 사용했다.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에게서 20살 이상 남녀 1인당 1원씩의 인구세를 징수하고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할 것을 결정, 연통제를 통해 이를 실시했다. 그러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경상남·북도, 충청남도 및 제주도에는 조직하지 못했으며, 그 밖의 지역도 면 단위까지는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선전·통신·연락·자금모집 등에 크게 기여했으나, 1921년 일본 경찰에 발각돼 전면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연통제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 성금 모집 등 다양했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 지방에 집중됐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했다. 재정 기반 구축을 위해 구급 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했으나, 이 중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 공채만 성공했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 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됐으며, 뒤에는 중국 국민정부의 주석인 장제스의 원조금으로 충당됐다. 또한 일본의 침략 사실과 한국 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 편찬부를 설치하고, 그해 9월 말 전 4권의 "한일관계사료"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기관지로 "독립신문" "신대한보(新大韓報)"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 "공보(公報)" 등을 간행해 독립정신을 적극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했다.
나. 대한민국 임시헌장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1919년 4월 11일에 공포된 상하이임시정부의 첫 헌법이다. 4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신익희·조소앙 등 각 지역 출신의 대표자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해,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했다. 여기에서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가결하고, 국무원 선거를 한 데 이어 전문 10조의 임시헌장을 심의·통과시켰다. 임시헌장 선포문은 "인민일치(人民一致), 중외협응(中外協應), 한성(漢城)에서 의(義)를 일으킨 이래 30여 일간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선언하고, 국민의 신의로써 완전히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히 자주독립의 복리를 아(我) 자손여민(子孫黎民)에게 세전(世傳) 하기 위해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서 임시헌장을 선포함"이라고 했다. 임시헌장 10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있음.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7조 대한민국은 인민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 국회를 소집함.
다. 주요 활동
1) 외교 및 군사 활동
초기의 외교활동은 대미 외교에 중점을 뒀고, 종전기에는 대중 외교가 주류를 이뤘다.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1월 18일 제1차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바 있는 김규식에게 1919년 4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전권대사로 임명해 1919년 6월 28일까지 지속된 파리 강화회의에 활동하게 했다. 또한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80)에 조소앙을 파견해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 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 회의에서 한국 국민의 상황을 세계 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을 중국 신해혁명(81)의 정신적 지주인 쑨원(孫文)(82)이 새롭게 설립한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83)에서 한국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했고 1945년 포츠담 선언(84)에서 한국의 독립은 다시 확인됐다. 항일 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뤄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이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도쿄 의거는 실패했으나,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 한국 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군사 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해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했다. 충칭시기(1940∼1945)에는 광복군(85)을 창설해,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86)를 하고 군대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사이판·필리핀 등지에 파견했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 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 진입 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87)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2) 독립신문 발행
"독립신문"은 상하이에서 발행됐던 임시정부 기관지이다. 1919년 8월 21일 상하이에서 "독립"이라는 제호로 발간하다가 그해 10월부터 "독립신문"이라고 고쳤다. 창간사에서 밝힌 이 신문의 목적은 ① 독립사상 고취와 민심 통일, ② 독립사업과 사상 전파, ③ 유력한 여론을 환기하고 정부를 독려해 국민의 사상·행동 방향을 제시, ④ 새로운 학설과 새로운 사상 소개, ⑤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개조한다는 등이었다. 창간 당시 사장 겸 편집국장은 이광수였고, 25년에는 박은식이 사장에 취임,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해 9월 25일 자 189호를 마지막으로 정간했다. 43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긴 후 6월 1일부터 중국어판 "독립신문"을 복간했으며, 45년 7월 20일 자 제7호까지 발간했다.
3. 임시정부 내분
가. 이동휘의 탈퇴
임시정부에는 여러 내분이 있었는데, 이동휘(88) 계열의 레닌 지원금에 대한 일방적인 사용에서도 보는 대로 이념적인 면에서 상이한 태도를 취했고, 또한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도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분분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이동휘가 주장한 무장투쟁과 안창호의 민족주의가 주장한 점진론이 대립의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대립이 결국 공산주의 계열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떠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원인이 됐다. 이러한 과정에 레닌의 지원금에 대한 착복 사건, 일명 국제공산당자금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1919년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주의 세력 간의 분규였다. 1918년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은 이동휘·박애·전일 등이 중심이 되고 볼셰비키당에서 파견된 쿠레코르노프의 지원을 받아 이뤄진 것이다. 초기의 성격은 민족 해방을 위한 편의적인 공산주의 단체였는데,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변경했다. 한편으로 1919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 지부가 조직돼, 1921년 이 또한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다. 흔히 전자는 상하이 파 고려공산당으로, 후자는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리는데, 두 당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21년 6월 28일에 발생한 자유시 참변(89)도 두 공산당 사이의 군권 투쟁의 결과였으며, 이 자금 사건도 이러한 두 당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코민테른의 각종 자금 지원 가운데 문제가 된 것은 다음의 과정을 거치면서였다. 이동휘계에서는 1919년 3.1 운동이 폭발한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소비에트정부 및 코민테른과 관계 정립을 위한 대표단 파견이 결의돼, 박진순·박애·이한영이 8월 5일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한인사회당은 한국의 해방과 공산주의의 대의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협정을 맺고, 선전비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때의 자금 액수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4백만 루블, 40만 루블, 다액의 선전비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자금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것은 1919년 9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극동의 정세는 많은 변화를 거친 후였다. 즉 이동휘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했고, 이에 따라 한인사회당의 중심부도 상하이로 옮겨갔으며, 그들의 지원자였던 쿠레코르프는 백군(白軍)에 의해 처형됐다. 그리고 이르쿠츠크 파인 김철훈·오하묵 등은 새로 부임한 쉬미아츠키의 지원을 받아 1919년 9월 5일 전로한인 공산당을 조직했다. 박진순 일행이 도착하자 김철훈 등은 전로한인공산당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그들이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아 온 자금을 탈취했다(김철훈이 박진순으로부터 자금을 요구했으나, 탈취하지는 못했다는 설도 있다). 1919년 11월 초, 자금 탈취 사실을 보고 받은 이동휘는 박진순으로 하여금 코민테른에 보내는 탄원서를 가지고 다시 모스크바로 향하도록 했다. 탄원서는 이르쿠츠크 파에 대한 비방,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라는 것, 한인사회당은 한국인 사이에 공산주의를 전파할 것이라는 등이 내용이었다. 박진순은 모스크바에서 도착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고려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제2차 코민테른대회(1920.7.19.∼8.7.)의 ‘민족문제 및 식민지 문제 분과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박진순의 활동 결과, 이동휘는 다시 한형권을 파견할 수 있었다. 한형권은 레닌 및 외교인민위원 치체린과 여러 차례 회합하고, 다음의 4가지를 제안했다. ① 노농노서아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② 한국 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赤衛軍)과 같게 해 줄 것 ③ 시베리아 일정 장소에 사관학교를 설치해 우리 독립군 지휘 사관을 양성케 해 줄 것 ④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거액 원조할 것 등이었다. 한형권을 처음부터 호의적으로 맞은 레닌은 자금 지원을 약속했는데, 이때 역시 자료에 따라 그 액수가 2백만 루블과 60만 루블로 각각 달리 나타난다. 한형권은 우선 그 가운데 40만 루블을 옴스크로 옮겨 그곳에서 만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이동휘) 비서장 김립에게 맡겼다. 그 후 그가 나머지 돈을 받으러 다시 모스크바로 향했으나, 코민테른에 대한 이르쿠츠크 파의 공작에 의해 나머지 돈 중 20만 루블밖에 더 받지 못한 한형권은 이르쿠츠크 파를 피해 유럽을 경유해 상하이에 도착했다. 한편, 김립은 우선 20만 루블을 가지고 상하이로 들어왔는데, 그는 한형권으로부터 받은 자금 중 일부를 치부와 축첩에 사용했다고 공격받았다. 또한, 이동휘계는 이 자금을 비밀리에 사용했는데, 이것이 한인사회당의 내부 분열과 이동휘계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탈퇴하는 한 요인이 됐다. 임시정부 내에서의 이동휘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와 러시아공산당, 중국공산당, 일본공산당과의 교류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그는 코민테른(90)과 중국을 비롯한 일본,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결합한 중요한 중개자로서 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 봄 보이딘스키(91)가 상하이로 오고부터 이동휘는 보이딘스키와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보이딘스키는 슈미아츠키를 의장으로 하는 코민테른의 극동공화국 서기국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슈미아츠키를 필두로 하는 이르쿠츠크 파 공산당과 이동휘가 이끄는 상하이 파 공산당 사이의 뒤얽힌 분파적 위화감은 보이딘스키와 이동휘와의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한편 김립은 1920년 12월 레닌으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금 2십만 루블을 수령해 비밀리에 보관했다. 이동휘는 이듬해 1월 10일 상하이파 공산주의 회의를 열고 레닌의 자금을 공산주의 운동에 사용하기로 하는 한편, 공산주의 그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국내와 만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대표자들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책임위원에 이동휘, 중앙위원에 김립, 이한영, 김만겸, 안병찬, 번역 부위원에 여운형, 출판부위원에 조동호 등의 지도부가 선출됐다. 이동휘계의 김립이 레닌으로부터 자금을 수령해서 20만 루블을 유용한 사실이 레닌을 만난 여운형에 의해 폭로됐다. 여운형의 항변으로 이동휘의 위신은 크게 실추됐다. 여운형, 김만겸 등은 처음에는 이동휘를 지지했는데 그의 독선적인 행동에 반감을 가지고 그를 떠났다. 이동휘는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1922년 1월 23일 임시정부는 이동휘와 김립이 자금 횡령한 것을 고발하는 포고를 내렸다. 결국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사임해야 했고, 그의 계열도 모조리 임시정부를 떠나야 했다. 한편 김립은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인 김구의 지시에 따라, 오면직·노종균에 의해 1922년 2월 11일 상하이 거리에서 암살됐다.(92)
나. 이승만의 탄핵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임된 직후인 1919년 5월에 임시정부의 외교를 담당하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그런데 구미위원부는 임시정부 외교 위원부와 별도 조직으로서 임시정부의 어떠한 법적 직제에도 포함되지 않은 사조직 비슷한 기구였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교포들이 내는 애국 후원금을 임시정부에 납부하지 않고 전용하면서 논란을 빚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명의로 모금한 애국 후원금을 임시정부 재무부로 송금하지 않고 구미위원부가 독단적으로 사용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1920년 5월 임시정부 국무차장 회의에서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한 것은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회의는 주미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별도로 주미 재무관을 두자고 제안했다. 즉 임시정부 산하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상하이 부임을 거듭 촉구했고, 드디어 이승만이 1920년 12월 8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19년 4월 대통령에 선출된 후, 1925년 3월 의정원에서 탄핵될 때까지 6년 임기동안 고작 6개월만 상하이에 체류했다. 1918년 이승만이 정한경과 공동 명의로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두라”고 청원한 것이 뒤늦게 큰 문제가 된 이면에도 이런 자금 문제가 걸려있었다. 1922년 4월에 임시정부 의정원이 비공개회의로 이승만 대통령 사임 건을 상정해 토의하면서 이승만에게 사임을 요구하고, 불신임 방침을 통고했으나 이승만은 사임을 거부했다. 이에 6월 17일 의정원은 심판위원 12명 전원일치로 이승만에 대한 해임안을 가결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끝내 승복지 않고 무대응으로 버텼다. 그러나 1925년 3월 23일 마침내 상하이임시정부에서는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가 열려 이승만을 탄핵 축출했다. 탄핵 이유는 미주교포 성금 독점과 정무 처리 무능이 주된 이유였는데, 이승만이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둬 상하이임시정부와 유리된 채 구미위원부를 통해 독단적인 정무 처리를 일삼음은 물론 상하이임시정부로 보내야 할 독립자금을 미국에서 가로채 독단적으로 전용해 쓰고 있는 것이 탄핵의 공식적인 이유였다. 대한민국 임시헌법에 따라 상하이의 임시의정원 심판위원회가 밝힌 이승만 대통령 탄핵 사유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이승만은 외교를 구실로 하여 직무 지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바다 멀리 한쪽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 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했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公決)을 부인했으며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한 바. 생각건대,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여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라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바이오 살아있는 충용의 소망이 아니라. 고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42호)
다. 집단지도체제와 위기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했다.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구성에 실패해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했으나 사퇴했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했으나 역시 사양해 의정원 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됐다. 1926년 7월 홍진(洪震)이 제6대 국무령으로 뽑혀 상하이에 와서 취임했으나 역시 내각 구성에 실패했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했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했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 활동의 무성과와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했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해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했고, 이후 김희선·이광수·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했다.
라. 김구의 분투와 해방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시카고의 김경이 이끄는 공동회, 하와이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럿, 미주에서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김호 등,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 동지회의 이승만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해 줬다. 이러한 미주동포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키 위해 특무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 또한 이덕주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해 조선총독부 수장인 총독의 암살을 지시했으며, 유상근과 최흥식을 만주로 파견해 관동군 사령관, 관동청 총재 등의 암살을 지시했다. 이어 상하이사변이 터지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제의 승전 기념행사가 열리자 윤봉길로 하여금 폭탄을 던지게 해,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군 고관들을 암살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서 숨어 지내야 했으나 난징(南京)으로 옮긴 중화민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구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됐다. 피신한 김구는 1933년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만나 항일전선 협력에 합의했다. 그러나 중일전쟁(93)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항저우와 전장, 창사, 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됐다. 충칭에 새로운 터를 잡은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연합군에 가담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일본에 선전 포고하지만 한국광복군이 미처 국내로 진입하기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78) 1919년 3월 21일 노령(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우리나라 임시정부이다. 그곳 교포사회를 바탕으로 이미 성립돼 있던 한족중앙총회(韓族中央總會)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편되면서 정부 형태를 갖춘 것이다. 공화제를 채택했으며,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내세웠고, 이 지역 민족운동의 핵심 인물인 이동휘를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선출했다. 정부가 구성돼 교포사회를 직접 통치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입법기관으로 국민의회가 구성돼 뒷날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통합교섭의 주체가 됐다.
(79)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 23일 한성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이다. 이날 전국 13개 도의 대표들이 종로에서 국민 회의를 열고 내각 책임제 성격의 임시정부 구성과 독립을 선언했다. 이날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총재로는 이승만이 선출됐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치를 내걸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설립됐는데,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대두돼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19년 9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을 이뤘다. 그리고 각료들은 임시정부의 주요 관직에 임명됐다. 한편 한성정부가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한국위원회는 후에 구미위원회로 개청 돼, 독립 직전까지 대미 외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80) 1920년 7월 31일∼8월 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 각국의 사회당 대표들이 제2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해 개최한 대회로 ‘제2인터내셔널 대회’라고도 한다. 만국사회당대회 비서장의 초청을 받은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 주재 부위원장인 조소앙은 이관용과 함께 8월 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본회의에 참석해 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 ② 본회의에서 대표를 파견해 동아시아의 정세를 조사할 것, ③ 본회의에서 동서(東西)를 연락해서 정치혁신을 촉진하게 할 것 등 3개 조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당시 본회의 참가국 26개국 중 25개국이 참가한 대표위원회에서 가결됨으로써 만국사회당 본회의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는 한편, 국제연맹과 세계열강에 대해 대한민국의 정부 성립을 승인하고 한국이 독립 국가임을 승인토록 요구했다.
(81) 1911년(辛亥年)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청나라 말기 유럽 강국의 압박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청조의 지배체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됐다. 먼저 서양식 무기의 도입과 근대산업과 신식교육을 추진했다. 1839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1856년 애로호 사건 등 외세의 침입에 무기력한 청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전개해 신식무기의 도입을 추진했다. 리홍장은 북양군과 함대를 창건해 군사력 강화에 힘썼지만 청일전쟁의 패배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나 봉건시대적 제도를 개혁하는 정책이 추진됐지만 위안스카이의 배신과 서태후 등 수구파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조의 무기력함이 더욱 심화되자 청조의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민의는 더욱 강성해졌다. 청조 11대 황제인 광서제와 서태후가 사망하고 3살의 푸이가 황제로 등극하자 정치는 더욱 혼란을 거듭했고 국민의 생활은 고통이 가중되어 중국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에서도 중앙집권 체제의 신정운동(新政運動)을 도모했으나 사회적 모순은 격화되고, 신정반대·세금거부·그리스도교 배격 등의 대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 움직임에 따라서 지방의 유력자, 즉 향신(鄕紳)과 상공업계를 기반으로 입헌파가 형성돼 입헌군주제를 지향해 국회 속개 운동을 일으켰다. 청나라의 타도와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려는 개혁세력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서 여러 정치단체와 비밀결사대가 조직됐으며, 특히 해외 유학파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청조의 무능함과 유럽 열강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혁명을 위한 양상은 가속화됐다. 1905년 국내외 정치조직을 통합하는 중국 최초 정당인 중국 혁명동맹회가 결성돼 쑨원이 지도자로 추대됐다. 쑨원은 해외 혁명파를 중국으로 입국시켜 반청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1911년 5월 청나라는 민영으로 운영되던 철도의 국유령을 발표해, 그것을 담보로 열강의 금융자본 연합체인 4국 차관단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대해 후난(湖南)·후베이(湖北)·광둥(廣東) 등에서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쓰촨(四川)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했다. 그해 10월 초 청조가 쓰촨 폭동을 토벌하기 위해 후베이신군(湖北新軍)을 동원하자, 우한(武漢) 지구에서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 등을 조직해 신군(新軍) 공작을 펼친 혁명파는,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봉기해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됐다. 우창에서 일어난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돼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1912년 1월 1일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南京) 정부가 수립돼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그 지도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을 발족했다. 청조는 북양군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위안스카이를 다시 기용해 혁명군의 토벌을 명령했다. 청조의 전권을 위임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을 진압했으나 이들과 전투를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않고 영국의 중재로 화평을 추진했다. 열강 측이 압력을 가하고, 많은 지방에서 실권을 장악한 혁명정부의 내부에 숨어 들어간 입헌파의 책동도 있었으며, 또한 혁명파 내부에서도 세부 조직 간 대립이 있어서 혁명군은 북벌을 중지하고 남북화의가 진행됐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 지위를 이양받았고, 그는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해 베이징 정부를 조직했다. 이때부터 혁명은 급속하게 반혁명으로 전환됐다. 정당이 난립하는 중에 혁명 파는 혁명동맹회를 개조하고 소당파를 합쳐서 국민당을 창립, 의회정치의 실현을 추구했으나,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에게 무력탄압을 가해 제2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혁명파는 제2혁명(1913년 7월)과 제3혁명(1915년 12월)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정권과 대결했으나, 반제·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5.4 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뤄졌다.
(82) 쑨원(1866~1925)은 중국 광둥성 샹산(香山: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형한테 가서 호놀룰루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세 때 귀국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홍콩으로 이주해 세례를 받고 광저우와 홍콩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했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승량 (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 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 학교 때 스승 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돼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해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했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도텐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 등과 제휴로 필리핀 독립 원조를 꾀했고, 1900년 제2차 거병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해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 무장봉기를 되풀이했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청나라가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기 위해 베이징을 정복할 북벌군을 조직해야만 했다.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해 정권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줬다. 당시 타협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해 국민당을 설립했고 위안스카이에 대항했지만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됐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했으나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 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해 반제(反帝)·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의 대중성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을 꾀했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키 위해 장병을 양성하고 북벌을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을 받아들여 중국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 견해를 표명해,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83) 제2차 세계 대전 때 카이로에서 개최된 두 차례 회담을 카이로 회담이라 한다. 1첫 회담은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당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는 대일전(對日戰)에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했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해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이러한 방침은 카이로 선언으로서 발표됐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처칠과 루즈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 숙의헸고,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했다. 특히 한국 독립문제가 처음 언급된 회담으로 특징된다. 두 번째 회담은 1943년 12월 2~7일에 열렸다. 1차 회담 이후 테헤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러시아 스탈린이 회담을 가졌다. 테헤란 회담을 마치고 귀로에 다시 카이로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터키(현 튀르키예)의 이노뉴 대통령을 초청해 회담을 갖고, 터키를 연합국측에 가담시키려고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2차 회담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처칠에게 알렸다.
(84) 포츠담 회담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세 번째 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해 8월 2일 종결됐다. 회담의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 문제, 대일(對日) 전쟁 수행 방침 등이었다. 1945년 7월 26일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포츠담 선언에 서명했고, 그 후 8월 8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대일 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했다. 포츠담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이 일본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한국 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했다.
(85)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들은 충칭에 이전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군사·외교활동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광복군이 조직됐다.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전례를 가지고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을 전후해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 선전 전단 등이 배포됐고, 임시의정원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했다.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이 취임했다. 광복군은 3개 지대로 편성됐다.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가 취임했다. 또 19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돼 나월환이 통솔했다. 제5지대는 원래 전지(戰地)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했다.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사단 등의 6단으로 기본 편성이 이뤄졌다. 또한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했고,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살포해 애국 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돼 온 한국 청년을 유치하는 데 힘썼다. 1941년 11월 중국 정부에서 광복군이 항일작전 기간 중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돼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9개 항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1941년 12일 1일 수락해 군수물자를 해결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을 포고했다. 이를 계기로 분열 상태에 있던 공산진영과 협업이 추진돼 1942년 7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됐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돼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이관돼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기 시작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를 편성해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해 일제가 항복하면서 실현치 못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했다.
(86)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들은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해 중·영·미·하·가·호(中·英·美·荷·加·濠) 및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東亞)를 재조(再造)하는 데 가장 유효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2. 거듭 1910년의 합병조약 및 일체의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 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한다. 4. 맹세코 일본의 난익(卵翼) 하에서 조성된 장춘(長春) 및 남경(南京) 정권(正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各項)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예축(豫祝)한다.
(87) OSS는(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미국 등에서 국가정보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942년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을 설립했다. 이후 1945년 트루먼 정부 시절 OSS가 해산한 뒤 그 후신으로 국방부(펜타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과 함께 1947년 국가안전보장법에 의해 중앙정보국(CIA)이 창설됐다. OSS는 설립 초기인 1942년부터 1946년까지 한국계 요원 80여 명이 채용돼 활동한 것으로 최근 미 국립문서보관소자료로 밝혀졌다.
(88) 이동휘(1873~1935)는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다. 8세 때부터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8세 때 지방 관장의 심부름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이용익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 후 육군 참령을 지냈다. 1907년 7월 한일 신협약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서 강화 진위대를 이끌었다. 일제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에 분노, 1909년 3월 군대 동료와 더불어 강화도에서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다가 잡혀 유배됐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활약으로 10월 풀려났다. 이 해에 이동·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에는 윤치호·양기탁 등과 105인 사건에 연루, 투옥됐다가 무혐의로 석방됐다. 한편, 그는 무관 출신이긴 했으나 교육문화 사업에도 적지 않은 활동을 했다.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도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 목사를 움직여 강화도에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했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민족계몽을 위한 단체로서 1906년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흥학회를 조직, 1908년 서우학회와 합해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다. 1915년경 노령(露領)으로 망명, 그곳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1919년 8월 말에는 김립의 사위인 오영선을 데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했다. 취임 후 자파 세력을 확장키 위해 민족진영의 인사까지도 끌어들여 1920년 봄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했다. 이것의 발전 형태로서 1921년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국무총리직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의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원조를 받았으며, 그중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임시정부에 발각돼 사임했다. 한편, 만주·간도 방면의 독립운동 무장단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서, 1920년 말에는 간도의 독립군이 일본에게 쫓겨 밀산을 거쳐 시베리아 이만으로 퇴각할 때 긴급구호금으로 1만 원을 보냈다.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했으나, 그의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 민족독립이 최우선에 놓여 있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라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오직 반일 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사임한 이후 1935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1995년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89) 1921년 6월 28일 러시아령 스보보드니(Svobodny, 러시아어로 자유로운)에서 러시아 극동공화국 군대와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의 자유대대가 한인 독립군(대한의용군)을 참살한 사건으로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 참변(중국의 국경도시 흑하의 지명을 따서)이라고 한다. 1920년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한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돼 있던 독립군은 중국의 헤이룽장성 밀산[密山]에 집결했다가 독립군을 통합·재편성해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으로 조직했다. 이 무렵 레닌이 설립한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었다. 지원이 필요했던 대한독립군단은 중국 밀산에서 겨울을 지내고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이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원이 절실했던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으로 계속 진군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한인 무장부대로 활동하던 문창범, 한창해의 도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만주-러시아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에 집결했다. 이때 러시아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의 오하묵은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군대 주둔지를 마련할 테니 이곳으로 집결하기를 권했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부대를 살펴보면, 간도 지역의 독립군부대가 주축인 대한독립군단은 최진동의 총군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독립군, 서일의 서로군정서가 있었다. 다음은 러시아 지역의 연해주 한인 무장부대들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일리야의 니항군, 오하묵의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에 집결한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 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군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처지이므로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독립부대가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 파는 박일리야의 니항군대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까지 총 3개가 있었다. 상하이 파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 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땅이었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였기에 한인 무장부대는 이르쿠츠크 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상하이파 박일리야의 니항군대가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 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아무런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박창은과 그리고리예프를 파견해 극동공화국과의 협의하에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다. 박일리야의 니항군대(사할린의용대)를 대한의용군으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자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이에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 관리에 착수했다. 박일리야는 자유대대에 편입됐던 니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간도에서 온 독립군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이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해 장교들이 체포됐고, 니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됐다.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지방수비대로 격하돼 강제로 편입됐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부대의 통수권은 상하이 파와 박일리야가 장악하게 됐다.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부장: 슈미야츠키)에 가서 한인 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오하묵의 손을 들어주었다. 극동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이하 고려혁명군)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 군정위원으로 김하석, 채성룡을 임명했다. 1921년 6월 2일 칼란다리쉬빌리는 한인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무장해제 요구에 독립군은 격렬히 항의했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중-3중으로 포위해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박일리야 등은 이에 맞서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6월 7일 자유시에 있는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면서 박일리야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야는 이를 거부했지만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왔다. 6월 27일 오후 11시 대한의용군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까지도 칼란다리쉬빌리에게 투항했다. 이에 칼란다리쉬빌리는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키로 결정했다. 대한의용군은 상하이 파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대한독립군부대도 일부 있었다. 6월 28일 칼란다리쉬빌리가 동원한 극동공화국 군대(코자크 기병대 500명, 러시아 인민혁명군 1,000명 등)가 대한의용군에 접근했고, 무장해제에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은 끝내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이에 같은 날, 오후 4시 칼란다리쉬빌리의 극동공화국 군대와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에 불응한 대한의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장갑차, 대포까지 동원해서 공격했다. 대한의용군 뒤쪽에는 강이 있어 도망가지 못해 피해를 더욱 키웠다. 당시 한인 독립군의 사상자 자료는 피해자 측과 가해자 측이 크게 차이가 난다. 피해자 측인 대한의용군의 주장에 따르면, 현장에서 사망 72명, 익사 37명, 기병의 추격을 받다가 산에서 사망 200여 명, 행방불명 250명으로 총 600여 명이 사망하고, 917명이 체포됐다고 한다.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은 사망 36명, 포로 864명, 질병으로 불참 19명, 도망한 30명, 행방불명 59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칼란다리쉬빌리의 명령을 이행해 자유시로 들어왔던 홍범도와 지청천은 자유시 참변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이처럼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의 공산주의 독립 세력 간의 권력다툼에 한인 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됐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한 가책으로 두 달 후 밀산에서 자살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홍범도와 같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년 8월)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2년 4월경 코민테른이 학교의 교육방침을 문제 삼아서 지청천을 체포했으나, 지청천은 동년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됐다. 이후에도 고려공산당 상하이 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2월 극동공화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해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주의 독립군 대부분은 공산주의인 이르쿠츠크 파 및 상하이 파에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독립운동이 내외부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근래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겠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들었다. 여당의 고위 인사도 자유시 참변 직후 발표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대한의용군에 대한 무력 진압이 정당했다는 내용)’라는 문건이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지청천의 명의로 발표됐다면서 “(홍범도는) 속까지 붉은 공산당원이 아니면 우리 민족까지도 적으로 돌렸습니다. 볼셰비키즘을 신봉하고 동족을 향하여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적으로 돌렸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군의 사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위 문건의 서명은 위조됐음이 러시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홍범도, 최진동의〈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 2021년 발견된 문서〉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졌다. 즉 1922년 2월, 코민테른이 주최한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로 간 홍범도와 최진동이 제출한〈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에는 자유시 참변을 자행한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 파 간부들을 “4천 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면서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홍범도, 최진동은 자신들의 명의로 발표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등 여러 성명서에 대한 반박도 자세히 기록했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 파와 슈미야츠키 측)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의 없이 임의로 우리들의 이름을 넣었다. ” 즉 해당 성명서에 들어간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인의 서명이 위조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는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해석이 아닌 명백히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해야 한다.
(90) 1919년 3월 2일 레닌이 주도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창설한 공산주의 국제연합이다. 일명 코민테른(Comintern)이라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제2인터내셔널이 각기 자국의 전쟁 수행과 자본주의 세력 재건에 참여하면서 배타적 애국주의와 자본주의 옹호세력으로 변질되자, 파산을 선언하고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의 계승을 내세우면서 코민테른이 탄생했다. 강령은 마르크스, 엥겔스 이론의 기초 위에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 민족해방운동의 근본적 분석, 수정주의 및 사회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등 레닌이 세운 이론을 포함했다. 특히 레닌은 식민지 대중들에게 주목해, 후진국은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의 원조를 받아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를 뛰어넘어 소비에트 제도로 이행하고 일정한 발전 단계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인터내셔널의 중심은 영국, 프랑스에서 독일로 다시 러시아로 그 토대가 옮겨졌다. 1930년대 들어 파시즘이 대두하고 전쟁 도래가 절박해지자, 1935년 제7차 대회에서는 반파시즘 인민 통일 전선을 채택하고 이를 위해 모든 노동자 조직의 통일 방안을 마련해, 제2차 대전까지 각국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43년 5월 22일, 제2차 대전으로 대회를 소집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산을 선언해, 오랜 기간 많은 나라에서 공산주의 혁명과 해방투쟁을 이끈 코민테른은 그 막을 내렸다.
(91) 코민테른 주석단 위원 중 한 사람으로 레닌의 신임을 받았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한 레닌은 즉시 공산주의의 새로운 국제조직의 설립에 착수했다.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창립대회가 열리게 됐고, 1920년에는 제2회 대회가 열려 러시아의 세계 각국에 대한 적화 공작은 한층 더 조직적으로 추진됐다. 코민테른을 배경으로 1920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이란 공산당이 창설되고, 1922년에는 일본 공산당이 결성됐다. 중국 공산당 조직의 명을 받은 보이딘스키는 1920년 봄 중국에서 진독수를 만났다. 진독수는 5.4 운동 당시 군벌정부에 의해 투옥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상하이에서 문필생활을 하고 있었다. 진독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딘스키의 권유를 받은 진독수는 그해 8월에 공산당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게 됐다. 이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7명의 지식인에 불과했지만 이것을 계기로 공산주의 조직이 중국 각지에 확대됐다.
(92)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 김구는 김립(1880~1922)이 레닌에게 받은 200만 루블 중 20만 루블을 유용했다는 이유로 사살 명령을 내린다. 백범일지는 김립이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했다고 비난했으나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동휘의 비서이자 한인사회당 간부인 김립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라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노종균이 1922년 2월 11일, 상하이 거리에서 김립을 암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여태까지 의심하지 않았지만, 일제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자금 횡령이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라는 것이다. 즉 “김립은 레닌의 바람대로 동지들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수만 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됐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라고 분석했다. 이후 러시아 비밀문서들이 해제되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립은 지원금을 한 푼도 개인적으로 착복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시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좌, 우파의 극심한 대립에 김립이 희생됐던 것이다.
(93) 1937년 7월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 국토에 전개된 전쟁이다.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1931년 9월 18일 만주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만주국이라 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일본은 중국 내륙으로 공격할 빌미를 찾고 있던 차에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돌다리인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일어난 작은 사건을 빌미로 일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다리 위에서 사라진 일본군 사병으로 말미암아 확대된 사건은 일본의 조작이었고 중국을 공격하면서 전쟁으로 확대됐다. 동북아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며 단순히 지나사변이라 명칭하고, 이에 중국에 선전포고도 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확대했다. 이는 일본이 전쟁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한 철저한 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