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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Oct 14. 2024

4.19 혁명

8. 4.19 혁명      


1. 배경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돼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했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년 4월 11일에  1차 마산 시위에서 실종됐던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은 ‘진정한 민주 이념의 쟁취를 위해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년 4월 19일 총궐기해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해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1960년 4월 25일 선언문을 채택해 학생,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했고, 1960년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군중은 무력에도 굴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했다.   

  

2. 4.19 혁명 과정과 결과 

1960년 4월 26일 화요일 오전 10시경, 시위가 격화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승만은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주선한 시민, 학생대표 5인과의 면담을 진행했다. 이 면담에서 이승만은 시민 대표들의 하야 요구를 받아들였고 오전 11시, 라디오를 통해 아래와 같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②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③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기 위해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했다. ④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승만의 이와 같은 담화문 발표에 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은 기뻐했으며, 청년들은 이승만의 무너진 동상을 길거리에서 끌고 다녔다. 이후 오후 2시, 국회 본회의에서는 2시간에 걸쳐 아래와 같은 시국 수습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①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한다. ② 3.15 정부통령선거는 이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④ 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즉시 실시한다. 다음날인 4월 27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가 수리되고 당시 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아 ‘허정 과도정부’가 출범했다. 11년 8개월간 이어지던 이승만과 자유당의 제1공화국이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다. 4월 28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향했다. 한편, 경기도 포천의 군부대에 피신해 있던 이기붕과 그의 가족은 하루 만에 경무대 관저로 돌아왔고(이기붕은 신변을 우려해 대통령 36호 관저로 피신),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돼, 소위 귀하신 몸이 된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95)이 가족을 권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하는 일가족 집단자살(96)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4월 29일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의 구속을 시작으로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들과 자유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체포가 시작됐다. 5월 29일 새벽, 허정은 주한 미국대사와 극비리에 이승만의 망명을 도왔고, 이에 따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다. 허정은 이승만이 떠난 이후 이 사실을 국회에 알렸고 이에 국회에서는 항의가 쏟아졌다. 6월 12일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됐다. 국무총리는 내각 수반이었던 허정이 추대됐다. 그러나 8월 12일 국회에서 선거를 통해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그는 자신과 같은 한민당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했으나 민주당과 자유당의 반대로 낙마했고 8월 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의 장면(97)이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됐다. 

   

3. 4.19 혁명의 영향

가. 학생운동의 활성화

4.19 혁명은 이후 학생운동의 초석이 됐다. 4.19 혁명의 주체로서, 학생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혁명 이후 시민들을 안정시키고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수습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한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온 후 ‘학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학원에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학생회 구성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학원에서 주체적 자리를 확립 후, 학생들은 학원을 벗어나 사회로 눈을 돌려 농촌 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추진했으며 통일을 위한 사회운동에도 뛰어들었다. 4.19 혁명의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 학생들의 주권의식과 민주의식을 강하게 일깨운 것이다. 

나. 민주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변화

4.19 혁명은 간접민주정치의 결함을 시민의 힘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로 여실히 드러난 간접민주정치의 폐단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에 국민들은 거리로 나서 혁명을 일으켰고 이는 국민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간접민주정치가 부패하면 국민들에 의한 압력정치. 즉, 직접민주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사회계약론에 의거한 민주정치에 대해 인식하고 각성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80년대까지 이어지는 민주화를 향한 단초를 제공하게 됐다. 

다. 새로운 가치관과 질서의 등장

이승만과 자유당정권 부패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인(人)의 장막이었다. 이승만은 시위가 격화되는 상황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조차 파악지 못했는데, 이는 이승만 측근의 소수 정치적 권력자들만이 정치적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19 혁명은 이러한 인의 장막을 해체하고 정치적인 의사소통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또한, 독재정권 하에서 강요됐던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타파했다. 자유당 정권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반발해 일어난 4.19 혁명을 통해 학생과 청년들의 새로운 가치관과 가치체계가 사회 전반에 걸쳐 수용하게 됐고 이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라. 전근대적, 봉건적 경제 질서 타파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3.15 부정선거만큼이나 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당시의 경제적 문제다. 정부 수립 이후 진행된 농지개혁은 전근대적 지주-소작농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평가되지만 영세한 농민들의 불만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또한 제조업과 상업, 금융업 등의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제의 식민지 수탈 조직과 유사한 방식의 경영방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외에도 자유당 정권하에서 성행하던 정경유착과 특권층에게 제공되던 불로소득 등은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체제가 전근대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4.19 혁명은 위와 같은 봉건적 독점체제를 흔들었고 불공정하던 전근대적 경제체제를 합리적인 자본주의로 변화시켰다. 또한 이러한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제2공화국의 민주당과 진보, 혁신계열은 새로운 경제계획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4. 4.19 혁명의 의의

가. 국민들의 발전된 민주 의식의 표현

해방 이후 도입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투쟁과 경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이식된 것일 뿐이었다. 당시의 국민들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모방, 도입하면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안일한 생각은 자유당 정권의 11년 8개월간의 장기독재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에 국민들은 각성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남의 제도를 모방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시민의 권리와 진정한 민주주의는 고통이 따르는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국민들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4.19 혁명이며, 이는 4.19 혁명이 대한민국 국민의 발전된 민주주의 의식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이 가져온 결과임을 보여준다. 

나. 주권재민의 확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적 정부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는 독재정권이었다. 이러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횡포에 항거해 일어난 시민들의 혁명은 곧 ‘공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권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주의의 원칙을 확인한 것이며 국민을 탄압하고 억누르며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러한 4.19 혁명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실릴 만큼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남아있다. 

다. 좌절된 미완의 혁명

4.19 혁명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시민들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4.19 혁명은 명확한 한계를 가진 미완의 혁명이기도 했다. 4.19 혁명은 주도적인 기구나 세력 없이 학생들과 민중들로만 이뤄진,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강한 혁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혁명이 끝난 후, 정권은 4.19 혁명의 정신을 조직적으로 이어받은 세력이 아닌 야당인 민주당에게 넘어갔고, 민주당은 혁명 이후 터져 나오는 시민들의 요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잦은 당내 분열로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와 같은 새로운 정부의 소극성과 무능함으로 4.19 혁명의 정신은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고 이어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된다.


(95) 1957년 봄부터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한 이강석의 행적은 당시 많은 관심사였다. 그러던 중 1957년 8월 평소 이강석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하던 22세의 대구 출신 무직인 강성병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번 이강석이 돼 보기로 한 것이다. 마침 동해안이 태풍으로 수해를 입었으니 수재 의연금을 빙자하면 관료들에게 돈을 뜯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8월 30일 강성병은 다짜고짜 경주경찰서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밀명으로 시찰을 나왔다는 말에 경찰서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고 심지어 경찰서장은 바닥에 넙죽 절까지 하며 맞이했다. 강성병도 내심 놀랐다. 권력의 달콤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경주를 시작으로 가짜 행각은 영천, 안동, 봉화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고, 강성병은 경찰서장, 군수, 시장부터 은행지점장까지 두루 만나고 다녔다. 이러한 방법으로 당시 돈 47 만환(공무원 봉급이 3~4 천환 수준)을 사취했다. 세간의 관심은 갈취당한 돈보다 기관장들의 아첨에 쏠렸다. 그는 어디를 가나 기관장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경주 경찰서장은 그를 지프에 태워 불국사 관광까지 안내하면서 각종 기념품을 사주기도 했다. 군 장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프로 목적지까지 이동시켜 줬으며  각지의 서장과 기관장들이 앞다투어 요정으로 안내하는가 하면 그의 숙소 앞에는 밤에 군경이 불침번까지 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곤 했다. 가짜 이강석 행세는 대구에서 끝이 났다. 그가 만난 경북지사 이근식이 강성병의 언행에 의심을 품고 이강석과 동기동창인 자신의 아들을 불러 확인함으로 해프닝이 끝이 났다. 결국 강성병은 법정에 서게 되는데 방청석에는 수많은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강성병은 뜻밖에도 당돌한 모습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상을 시험해 보는 것도 하나의 범행 동기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권력의 힘이 이렇게나 큰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미국의 할리우드 같았으면 연기상을 받았을 텐데 나는 연기상 대신에 벌을 받게 되었다"는 말로 인정심문을 마쳤다. 강성병이 결국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게 되지만 그가 한 당돌한 발언들은 고스란히 언론을 타게 되었다. 오히려 민중들에게 임꺽정과 같은 인물로 기억됐다. 1958년 1월 23일 자 동아일보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이 철퇴를 맞았다. 경무대 화장실 인분을 처리하는 담당자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귀하신 몸 행차하시는데 어찌 가만있겠느냐"는 대목이 문제가 된 것이다. 화백 김성환은 허위사실 유포죄로 과태료를 물어야 했다. 한편 강성병은 출옥 후인 1963년 진짜 이강석처럼 자살함으로써 죽음까지도 따라 했다.

(96) 이승만의 하야 발표 다음 날인 1960년 4월 28일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이 경무대 관저에서 권총으로 이기붕 내외와 동생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신도 자살로 끝을 맺은 사건이다. 당시 진상조사단은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이 먼저 수면제를 먹고 숨을 거둔 뒤 이강석이 되살아날 것을 염려해서 권총으로 쏘고, 뒤따라 자신도 자살했다고 발표했는데 어떻게 자신의 복부와 머리에 두 발을 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97)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고,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1925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를 마치고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했고, 귀국 후에는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 일을 봤다. 이후 1931년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1936년 교장이 되고, 계성학교 교장도 겸임해 광복 때까지 근무했다. 1933년에는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행한 월간잡지 "가톨릭청년"의 편찬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 기간에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이 돼 "구도자의 길" "조선천주공교회약사" "교부들의 신앙" 등의 저서를 출판했다. 1946년 정계에 투신, 민주의원과 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하면서 좌익과의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약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고,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조병옥·장기영 등과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한국파병에 큰 역할을 헸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됐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5년 신익희·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이 됐고, 1956년에는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 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 부정선거로 인해 이기붕 자유당 후보가 833만 표, 장면이 180만 표로 낙선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 공화국 국무총리가 됐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 이탈해 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했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 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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