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軍)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4.19 혁명 이후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의 갈등으로 분열됐고 다양한 사회 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해 정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 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돼 반공 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6.25 전쟁 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군부 내에서는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위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 현상을 공격하는 이른바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98)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육군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군사쿠데타를 모의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제2군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의 주도 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 항의‘혁명공약’을 발표했다. 그 6개 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군사 정변은 초기에 미 8군 사령관 맥그루더,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이한림(99) 등의 반대로 일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 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해 성공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해 3년 동안의 군정 통치에 착수했다. 군정 기간 중 군사혁명 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 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반대 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했다. 또한, 핵심 권력 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행했다. 1963년 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이 정식적으로 출범했다. 반공 분단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일단의 군부 세력이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해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경제와 산업화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군사문화 확산, 군의 탈법적인 정치 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에 따른 계층 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2. 사법살인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라고 발표해,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이다.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소위 ‘인민혁명당 사건’이라고 하며 줄여서 ‘인혁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1차(1964년)와 2차(1974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나뉘는데, 1974년의 2차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라고도 한다.
가. 1차 인민혁명당 사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거세지자 1964년 6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같은 해 8월 14일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조직해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며,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 41명을 검거하고 16명을 수배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 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돼 체포된 것”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건 피의자들은 8월 17일 검찰에 송치됐고,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에서 사건의 기소를 담당했다. 하지만 증거가 충분치 않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건의 실체가 과장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기소 과정에서 일선 검사들과 검찰 고위층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그래서 이용훈 부장검사 등 담당 검사 4명이 공소 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했으며, 그 가운데 3명은 사표를 내기도 했다. 결국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재조사가 이뤄져 57명의 구속, 수배자 가운데 13명만 기소됐는데, 적용 혐의도 ‘반국가단체 결성’에 관한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 찬양ㆍ고무ㆍ동조’에 관한 반공법 4조 1항 위반으로 바꿨다. 1965년 1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1심 선고 공판이 열렸는데, 13명 가운데 도예종과 양춘우 2명만 징역 3년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해 5월 2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은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해 도예종과 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 5명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해 9월 21일에 대법원은 2심 재판의 형량을 확정했다.
나.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100)이 발생하면서, 도예종 등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금해 다시 수사했다. 5월 27일 비상보통군법회의검찰부는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하면서, 도예종ㆍ여정남 등 23명에 대해서는 내란 예비와 음모 등의 혐의를 추가해 기소했다. 7월 11일에 열린 비상 보통군법회의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7월 8일 군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ㆍ김용원ㆍ이수병ㆍ우홍선ㆍ송상진ㆍ여정남ㆍ하재완ㆍ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태환ㆍ유진곤ㆍ전창일ㆍ이성재ㆍ김한덕ㆍ나경일ㆍ강창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8명에 대해서는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9월 7일에 열린 비상 고등군법회의 선고 공판에서도 도예종 등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리고 정만진ㆍ이재형ㆍ조만호ㆍ김종대 등 4명에게는 징역 20년, 전재권ㆍ황현승ㆍ이창복ㆍ임구호 등 4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를 기각해 이들의 형을 확정했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1975년 4월 9일에 서도원ㆍ김용원ㆍ이수병ㆍ우홍선ㆍ송상진ㆍ여정남ㆍ하재완ㆍ도예종 8명에 대한 사형이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됐다. 당시 이들의 선고통지서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도 전에 군검찰에 접수됐으며, 서울구치소 또한 선고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했다는 정황이 문서로 드러났다. 국제앰네스티는 다음날인 4월 10일에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도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사법살인이라며,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후 군사정권 시대에 국가의 폭력으로 발생한 의문사 사건들을 밝히기 위해 2000년 10월에 대통령 직속 기구로 구성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재조사 결과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ㆍ조작된 것이라고 2002년 9월 밝혔다. 그리고 그해 12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서울중앙지법에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은 2005년 12월에 시작됐고,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사건에 연루돼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2008년 1월 23일과 9월 18일에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됐고,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판결이 됐다. 이처럼 인권이 처참하게 유린되었던 박정희 시대의 사법살인이 32년 만에 그 억울한 사정이 벗겨진 것이다.
3. 10월 유신
가. 개요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는 혼란하고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국민의 정신 개혁과 경제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민간정부를 세운 다음 자신은 군인의 길로 회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전역 후, 민선 대통령이 돼 제3공화국을 만들고 재임까지 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정치적 욕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가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장기 집권의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서구 민주주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른바 유신(維新 개혁을 의미)을 추진하기 위해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를 발표한 후 지금까지의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키고, 드디어 유신체제 구축에 들어갔다. 유신체제는 결국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 아래에 장기 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이에 대통령 간선제가 시행됐고 의회의 권한은 제한됐다. 언론 탄압과 시민들에 대한 인권탄압이 이어졌으며 무고한 민간인은 체포돼 부당한 판결로 인해 목숨까지 잃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배경과 필요성을 설파했다.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반도 주변의 세력 균형에 문제가 있어 남북한 간의 관계가 악화될 조짐이 있는데, 동족상잔의 위험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둘째, 우리 사회는 무질서와 비능률이 팽배해, 현행체제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 라며 다음과 같은 우리 정치제도의 모순을 지적했다. “선거는 너무 소모적이다. 대통령 직선제는 낭비적이고 국론분열의 원인이 된다. 종전 선거제도로는 안정된 여당 국회의원 수 확보가 어렵다. 국력 극대화를 위해서는 의회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 부조리를 추방해야 한다”라고 강변하면서 그 실천 방안으로 정치·사회 체제를 강력하게 재구성한 유신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나. 과정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회해산 및 정치 활동을 중지하고, 일부 헌법의 효력을 중지한다. 둘째, 정지된 헌법의 기능은 비상 국무회의(당시 국무회의)가 대신한다. 셋째, 평화통일 지향의 개정헌법을 1개 월내에 국민투표로 확정한다. 넷째, 개정헌법이 확정되면 연말까지 헌정질서를 정상화한다. 비상 국무회의는 27일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정부는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지도계몽반까지 편성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91.9%의 투표율과 91.5%의 높은 찬성률을 얻어 유신헌법(維新憲法)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이어 12월 15일 2,359명의 대의원들이 선출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12월 23일 간접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12월 27일 정식으로 취임해 제4공화국이 출발했다.
다. 특징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집권자가 그대로 유지된 정권 내의 우파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안정과 국력의 극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새로이 조직된 유신체제가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한 명분이었다. 10월 유신에 따른 유신헌법의 채택으로 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 선거 및 최고 의결기관으로 설치됐고, ② 직선제이던 대통령 선거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로 바꿨으며, ③ 대통령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됐고, ④ 국회의원 정수(定數)의 1/3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괄 선출하고, ⑤ 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과 3년의 이원제(二元制)로 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유신정우회 의원)은 3년으로 했으며, ⑥ 국회의 연간 개회 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⑦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⑧ 지방의회를 폐지하고, ⑨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 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국회의원의 발의로 된 헌법 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의결함으로써 확정되도록 이원화했다. 그 밖에도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명시했다. 이상과 같이 국민의 판단과 비판, 선택권을 원천 봉쇄한 독재체제였다. 그리하여 체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자는 국민 상호감시제를 통해 색출해 엄단하는 초법적인 독재체제를 실행했다.
라. 평가
박정희는‘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10월 유신을 단행했으나, 그로 인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이 부정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이에 1973년 유신헌법 개정 100만 인 서명운동,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76년 민주구국선언, 1979년 부마민주항쟁 등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의 투쟁이 계속됐다. 이와 같은 전국적인 소요와 투쟁 속에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30분경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는 전대미문의 시해사건(101)을 일으켜 박정희 시대는 허무하게 종말을 고하게 됐다. 이처럼 박정희 시대를 끝낸 10.26 사건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설로 분분하다. 다수설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102)의 안하무인 월권에 갈등을 빚던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거하면서 박정희도 같이 살해했다는 것이다. 평소 차지철의 성격이 안하무인이고 박정희의 편애를 받게 되자 경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등 측근들이 박정희에게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두둔했고, 오히려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 주는 일도 있었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이 때문에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에 대한 상실감과 차지철의 월권, 전횡에 대한 분노감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거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라며 강한 증오심을 드러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 10.26 사건이 사전 계획된 것이 아니라 김재규가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김종필 등 일부 인사들에 의하면 김재규는 분노조절장애 증세가 심했다고 함)으로 저지른 우발적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거사 직후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가는 등 김재규의 행동들이 계획적이라기에는 너무도 어설펐기 때문이다. 김종필도 10.26 사건의 발단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며 법정에서 김재규가 황당한 민주화 투사로 둔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 밤 거사하겠다”라며, 박정희 암살 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 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한편에서는 김재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차지철과의 갈등 요소들이 일정 부분 함께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무튼 이 10.26 사건으로 한국의 국민주권주의를 외면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혹독하게 탄압했던 박정희 시대의 유신체제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98) 4.19 혁명을 계기로 군대 내 부패한 고위장성을 축출하기 위해 하급장교들이 벌인 정군(整軍) 운동이다. 1960년 5월 8일 김종필·김형욱·길재호·오치성 등 육사 8기생 중령 8명이 처음으로 모의를 시작했다. 이때 소장파 장교들이 행동방침으로 채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고위책임자에 대한 책임 추궁 △ 부정축재 장성들 처단 △ 무능·파렴치한 지휘관급 제거 △ 파벌조성의 모든 요인 제거 및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 대우 개선. 이들의 모의는 사전에 발각돼 주모자들이 <국가 반란 음모죄>로 체포됐으나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이 사퇴함으로써 석방됐다. 이후 해병 제1상륙사단장 김동하 준장이 그의 상관인 해병대사령관 김대식 중장의 해임을 건의하는 등 정군운동은 해병대·공군·해군 등으로 번져나갔고, 이러한 지지에 고무된 5월 정군운동의 주동자 8명을 포함한 11명의 중령은 9월 10일 현석호 국방장관에게 전군에 즉각적인 '정군'을 단행할 것을 공식 청원한 데 이어 24일에는 육사 7·9·10기의 16인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최영희 연합참모총장에게 정군과 함께 사퇴를 강력히 요구했다. 애초 군부 숙정을 약속했던 민주당 정권은 군부 최고 지휘자에 대한 이러한 공개 도전이 군의 지휘체계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는 미국 측의 경고에 따라 이들 16인의 장교를 전원 체포, 군법회의에 회부시켰다. 이때 홀로 징역 3개월 형을 받은 김동복 대령이 사건 주모자를 밝힘으로써 이듬해 2월 12일 김종필·김형욱·석정선 세 중령이 체포됐다. 이들은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원 예편'함으로써 사건이 종결됐으나 이들 정군운동의 주동자들은 이후 5.16 군사쿠데타의 주체세력이 됐다.
(99) 이한림(1921~2012)은 대한민국의 전 군인이고 관료이다. 1921년 함경남도 안변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으로 조선 순조 때 신유박해(1801년)로 순교한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의 방계 후손이다.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뒤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신경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해, 1946년 2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재직 중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한림은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며 박정희 등의 정변 세력과 대치했으나, 결국 쿠데타군으로부터 숙청돼 1961년 8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 후 수감됐다가 미국으로 추방돼,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공부했다. 이후 정일권의 권유로 박정희 정권과 화해한 후 귀국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건설부 장관을 역임했다. 장관 재직 당시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을 지휘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터키 대사,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를 지냈다.
(100) 민청학련사건은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 총 연맹(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 약칭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에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돼 반유신체제운동이 일어났다. 9월 개학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시위사태는 점차 반독재·반체제 움직임으로 성격이 바뀌면서 전국 고등학교에까지 파급·확대됐으며, 일부 야당 인사·지식인과 종교인들은 민주 헌정의 회복 및 공화당 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면서 본격적인 개헌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했으며, 위반자를 심판할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운동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계속됐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 서명운동을 추진했다.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라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후 1,024명의 위반자를 조사했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180명을 구속·기소했다. 기소장에 의하면, 이들은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 계열, 불순 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해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의 변호사 강신옥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요지로 변론을 하다가 세계 사법사상 처음으로 변론 중인 변호사가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수감자들은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에 의해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른바 유신정권에 의한 대표적 용공 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재조사가 이루어져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민청학련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했고, 2009년 9월 사법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 2010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관련자와 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국가가 52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사건의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재판장 박희동)가 내린 선고 판결의 요지이다.
【판결 요지】이철, 유인태 등 피고인들은 유신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중 국내 공산 비밀지하조직인 인혁당학원 조종책인 여정남에게 포섭되어 전국대학연합체를 구성하여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국가를 세우라는 지령에 따라 1973년 초부터 1973년 10월까지 학원소요의 주동을 했고 용공 분자인 김병곤 나병식 등을 규합하여 전국 6개 도시 40여 개 대학을 망라한 민청학련을 구성하고 일부 반정부 종교세력 반정부 교수, 재야인사들과 제휴하여 1974년 4월 3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제히 봉기하여 국가 변란을 꾀했다. 특히 피고인들의 행위는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 공작에 따라 공산 불순분자와 반정부 불순세력이 연합전선을 형성한 것으로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는 점, 공산세력의 배후 조종에 의해 철저히 조직된 폭력 학생데모였다는 점, 학생데모를 조장하는 국내외의 다양한 배후세력이 개입됐다는 점 등 과거의 학생데모와는 그 양상을 달리하는 건국 후 초유의 대규모 국가변란 기도사건이므로 피고인이 학생이라는 관점에서 관용을 베푸는 것은 조국의 보존과 번영에 배반되는 것이므로 눈물을 머금고 극형에 처한다.
(101)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암살당한 사건이다. 당시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동기에 대해 '우발적 행위', '내란음모설', '미국 중앙정보부 사주설' 등의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명쾌하게 규명되지는 못했다. 10.26 사건 후 꾸려진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박정희의 신임을 받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정보업무 수행에서의 무능을 이유로 박정희로부터 몇 차례 힐책을 받은 데다, 올리는 보고나 건의가 차지철에 의해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등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중,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박정희와 만찬을 함께 할 기회가 생기자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을 준비하는 한편, 직후 쿠데타를 일으킬 목적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 차장보 김정섭을 궁정동 별관에 대기시켰다. 5시 40분경 김계원 비서실장이 도착하자 김재규는 차지철 살해를 암시했고, 평소 차지철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김계원도 동조하듯 묵인했다. 6시 5분경 만찬이 시작됐고, 식사 중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정보부의 정보 부재 탓으로 돌려 힐난한 데 이어 차지철이 과격한 어조로 공박하자 흥분한 김재규가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갖고 만찬회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속 부하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을 사살할 것을 지시, 7시 35분경 모든 준비가 완료됐음을 확인한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각 2발씩을 쏘아 살해한 사건이다.
(102)) 박정희와 최후 순간까지 함께한 차지철(1934-1979)의 생애를 보면 극적인 면이 많다. 차지철은 경기도 이천의 주막집 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 김 씨는 지 씨 성을 가진 사람과 딸 셋을 낳았다. 그 후 김 씨는 인근 마을 차 씨 집으로 개가해 차지철을 낳았다. 가부장제가 팽배한 시대에 딸 셋을 낳고 개가한 여성이 제대로 된 대접받기가 어려웠다. 이런 환경에서 차지철은 갖은 모멸과 냉대 그리고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런 차지철이 불과 30년 후에는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고, 40년 후에는 사정이야 어찌 됐건 한 나라의 이인자에 올랐으니, 세속적으로 보자면 그는 자수성가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운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기에 차지철은 항상 뿌리 깊은 열등감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보다는 늘 외톨이로 지냈고 혼자 할 수 있는 격투기에 빠져들었다. 별로 튀지 않고 과묵했으며 급우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동창생에 따르면 친구와 말다툼도 없고 싸우는 일도 없었고 내성적이고 비교적 조용했다고 한다. 차지철은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 때문인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6.25 전쟁 막바지인 1953년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리고 육사 12기 시험에 응시하지만 낙방한 후 간부 후보생으로 1954년 소위를 달았다. 이 육사 시험의 실패는 차지철에게 열등감을 더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출생과 성장 과정의 박탈감을 보상받으려는 듯 병적이라 할 만큼 권위에 집착한다. 차지철이 장교 시절 새벽 산에 올라갔다가 일출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부하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내가 왜 이처럼 강해졌는지 알아? 고독을 씹으며 자랐기 때문이야. 내 인생엔 아버지도, 형도 없어. 오로지 어머니만 있어.” 대위 시절인 1957년 차지철은 미국의 포병학교로 유학 가는데 당시 그는 태권도 5단, 합기도 5단, 검도 3단, 무술이 도합 13단이었다. 당시 인종차별적인 미군 장교를 맨손으로 묵사발을 만들었다는 일화를 보면 무술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듯하다. 1960년 그는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공수단 대위로 있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때 차지철이 적극 가담하는데 이 사건은 그에게 큰 도약의 기회가 된다. 특히 그는 5.16 군사 정변 후, 박치옥 공수단장의 소개로 박정희의 경호 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돼 박정희의 신임을 얻고 정치에 입문한다. 즉 1962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해 민주공화당 상임위원을 지냈다. 이후 그는 박정희 덕으로 1963년 만 29세로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6대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나 평소 감추고 싶은 출생 환경과 육사 12기 낙방으로 인한 심한 열등감 때문인지 국회의원이 된 해인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를 입학하고 같은 해 학사를 취득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964년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또 1년 후인 1965년에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당시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3년 안에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딴 것이다. 아마 당시 여당 국회의원의 특권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64년 3월부터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은 시위와 관련 180여 명을 연행해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영장 담당 판사가 일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 총으로 무장한 수도경비사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였던 최영도는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고 의심했으나 증거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1964년부터 차지철은 박정희의 주문으로 월남전 파병에 반대하는 관제 시위에 앞장선다. 박정희의 논리는 대미 관계에서 언론이나 야당에서 강하게 반대해야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파병 조건을 교섭하는 데 유리한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지철은 박정희의 명을 받아 월남전 역사를 열심히 공부한다. 그 후 차지철은 "월남 특권층 자식들은 대부분 외국으로 도망간 마당에 우리 청년들이 그들 대신 죽음 앞에 나서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박정희의 명을 기대 이상으로 수행한다. 결국 박정희가 월남전 파병 문제를 놓고 대미 관계 협상을 하는데 유리한 여건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하나를 시키면 둘을 거뜬히 해내는 차지철이 박정희는 너무 대견했을 것이다. 1966년 학력을 통해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어느 정도 극복한 차지철은 미모에 좋은 가정 출신의 여성과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을 노렸다. 마침 그때 33세 총각 국회의원 차지철에게 어느 날 미모의 20대 중반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문대 출신으로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조건이 매우 좋았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그는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지인들은 "평범하지 않은 여자 같다"며 반대했지만 차지철은 우려를 무시하고 몇 달 만에 결혼했다. 그러나 우려대로 결국 결혼 여섯 달 만에 차지철은 이혼하고 말았다. 차지철은 이때부터 기독교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아마 감추고 싶은 출생 및 성장 과정과 허영심이 빚은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한편 차지철은 1967년 민주공화당 지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탄탄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그의 속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심한 열등감과 분노가 지배했던 것 같다. 서자라서 그런지 차지철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잘 나가는 그에게 이복형이 찾아왔다. 그는 단호하게 “나한텐 형이란 없소”라며 문전박대했다. 설움 받던 어린 시절 '서자'라고 멸시하던 이복형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가슴 깊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1969년 35세이던 차지철은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 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각별한 후원과 신임을 받았다. 그 덕인지 1971년엔 제8대 국회의원에 무난히 당선됐다. 그리고 그해 국회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이렇게 그의 정치경력은 화려했지만 비천한 출생과 성장 과정에 대한 심한 열등감은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차지철이 국회 내무위원장 시절에, 군의 선배이자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김현옥 내무장관이 신임 인사차 들렀다. 김 장관이 손을 들며 “어이 차 박사”라고 불렀다. 그러자 차지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 놓고 차지철이 김현옥 장관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에 김 장관이 차지철을 다시 만났을 때,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두 발을 모은 채 공손히 "내무장관 왔습니다"라고 인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차지철은 국회 내무위원장 때부터 비육사 출신들을 각별히 챙겼다. 정규 육사의 하나회 같은 조직은 없었지만 차지철은 비육사 출신들이 10여 명씩 모이면 반드시 찾아가 금일봉도 주고 바비큐 파티도 열어주면서 격려하곤 했다. 이것도 자신이 과거 육사 시험에 낙방한 것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1973년에도 차지철은 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그해에 또 국회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그런 차지철에게 큰 인생 도약기가 오는데 그것은 1974년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난다. 이때 후임으로 차지철이 박정희의 경호실장이 됐다. 이때부터 박정희만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월권이 시작됐다. 그는 청와대의 위상을 높인다고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면서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자기 아래 경호 차장으로 뒀으며 현역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했고 그 제도를 아예 만들었다. 또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바꿨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으로 붕괴가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출생이 비천하고 육사 시험에 낙방하고 첫 결혼에도 실패한 자신을 주위에서 멸시한다고 느껴서인지 차지철은 심한 열등감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폐쇄적인 권력욕에만 매달렸다. 그래서 경호실 훈련 때는 자신이 마치 군의 총사령관인 듯이 항상 군복을 입고 아예 수도방위사령관 등 다른 장군들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경호실 산하 군인들에게는 히틀러의 SS제복을 베낀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 친위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군대 사열식 비슷하게 국기 하강식을 한다며 장차관과 군 장성 등을 불러 일렬로 세워놓고 자신의 권세를 행사했다. 차지철은 평소 "경호실은 각하의 신변만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다. 각하가 도전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우리 경호실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경호실은 각하의 자리까지도 보위해야 한다"는 자신의 강력한 소신을 강요했다. 결국 차지철은 박정희 경호를 핑계로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파수꾼이자 국가의 이인자'라는 등식으로 자신의 월권을 정당화한 것이다. 차지철은 또한 "모든 정보는 꼭 대통령 경호실을 통해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는 꼭 하루 전에 경호실에 갖다 놓도록 요구했다. 장관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자 차지철은 "일본의 명치유신 때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놓은 일이 있었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즉 왕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걸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 차지철의 강변이었다. 그래서 장관들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대통령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통보했다. 그래서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올라가는 각종 기밀과 중요 문건을 미리 파악했고 이런 방법으로 모든 정보를 독점했다. 이외에도 차지철은 종종 "각하를 빼놓고 나보다 앞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누구의 승용차도 내 차를 앞질러 갈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외출 시 비서실은 물론 경호실도 모두 차지철의 의전 때문에 애를 먹었다. 청와대 회의 같은 자리에서도 차지철은 늘 박정희 다음으로 1순위를 고집했다. 서열로 따지면 엄연히 비서실장이 위고 그래서 박정희 오른쪽에 비서실장이, 왼쪽에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앉아야 한다. 그런데 차지철은 안하무인으로 이런 모든 의전을 뒤집어버렸다. 게다가 차지철은 막강한 경호실 권력을 기반으로 권부 내에도 권력을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자신과 경쟁되거나 껄끄러운 장군들은 견제하고 자기 사람을 군 요직에 심는 작업을 벌였다. 차지철이 겨냥한 첫 번째 포석은 박종규 전임실장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13년 동안이나 박정희 뇌리에 박혀 있는 박종규의 모습을 지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박종규는 5.16 당시 박정희 소장에게 차지철 대위를 소개한 장본인이자 쿠데타 때 목숨을 건 동지였으며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한 뒤에는 물심양면으로 뒤를 봐준 후원자였다. 그러나 차지철은 경호실장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박종규가 자기를 추천하지 않은 데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차지철의 저돌적, 다혈질 기질이 대통령 신변을 책임지는 경호실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박종규는 다른 이를 후임에 추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생전에 육영수의 유언과 김정렴 비서실장이 추천한 차지철을 선택했다. 생존에 육영수는 박정희의 여색에 질색하던 터라 술 담배를 안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차지철이 박정희의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김정렴은 “차지철이 충성심이 두터운 데다 무술이 뛰어나며 국회의원으로서 박사학위도 따내는 등 성실한 일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일단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자신의 사설 정보기관까지 두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한을 침해하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을 상대로는 직접 정치공작을 벌여서 김재규와 사사건건 충돌이 잦았다. 더욱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 차지철은 자신이 경호실장으로 동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이런 건방진 월권을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내가 그래도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대위 출신이랑 옥신각신 하겠나”라며 울분을 삭였다고 한다. 김정렴 비서실장 시절에는 차지철이 비서실 업무에 크게 간섭하지 못했지만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 차지철은 비서실의 업무도 내놓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차지철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전화를 대"라고 지시해 놓고도 수화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유신말기에 차지철에게는 박정희를 빼놓고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차지철을 두고 부통령 각하나 북악산 이인자라는 말도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부 각료나 공화당 고위인사 중에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워낙 박정희가 차지철을 맹목적으로 총애했기에 아무도 차지철의 월권 문제를 직언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신 말년인 1979년이 되어서는 박정희의 측근이라는 인물도 차지철을 빼놓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신직수, 박종규가 그렇고, 김재규도 사실은 차지철과 함께 측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박정희의 일방적인 차지철 편애로 김재규는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니 차지철만이 박정희와 혼연일체가 돼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렇기에 유신 말기에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빼놓고는 누구도 유신체제를 꼭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에는 각처에서 "차지철이 박정희의 후계자를 노린다 혹은 결정됐다"라는 설이 파다했다. 그리고 차지철은 자신이 대권을 잡았을 때 휘호를 쓰기 위해 명필을 개인 교사로 두고 서예 연습을 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도 유신 말기에는 충견 같은 차지철을 빼놓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급기야 차지철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했고, 1979년 10월 16일 김영삼 의원직 제명에 반대하며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주장하며 공수부대 투입을 주도했다. 더욱이 "각하,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 2백만 명 정도의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 죽이는 게 대수입니까"는 차지철의 발언은 박정희 정권의 광란적 정신상태와 그 최후가 임박했다는 징조를 보여준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는 주색 만찬에서 김재규에 의해 피살됐고 차지철도 경호실장으로 현장에 있었지만 화장실로 도망가다가 박정희와 함께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죽음은 독재 권력의 최후가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준다. 특히 김재규의 총격이 시작되자 경호실장이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고 박정희를 버려두고 도망갔다는 것은 차지철이 평소 얼마나 내공이 없는 인물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명색이 대통령 경호실장 그리고 박정희 권력의 이인자라면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김재규를 공격해 박정희가 몸을 피할 시간을 만들었어야 했다. 또한 당시 차지철은 경호실장이었음에도 총을 차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가 술자리에 총이 보이는 것을 싫어해서 일부러 차지철에게 총을 차고 오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후문도 있다. 10.26 직후 가해자가 누군지 상황이 불분명할 때 차지철은 박정희 살해범으로 의심을 받은 바도 있다. 그 이유는 차지철이 평소 내놓고 부통령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로 피신했다가 죽은 박정희의 오른팔, 독실한 기독교인 차지철, 그는 평소 술과 담배를 일절 않고 하루 두 차례 기도를 드리는 예배에 철저함을 보였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 새벽 4시엔 삼각산 비봉 바위 밑에 있는 기도원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몇 시간씩 꼼짝 않고 기도하곤 했다. 집에도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십자가 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매일 아침 6시, 저녁 6시 두 차례 노모를 모시고 예배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차지철이 열심히 드린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고, 과연 누구를 위해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했을까?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 2백만 명 정도의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 죽이는 게 대수냐”라고 망발을 일삼던 차지철, 그가 과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을까?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고 약자에 대한 배려이지 독재자에 대한 아부와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다. 차지철은 사망할 당시 서울 모 교회의 안수집사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영락교회 교인 묘지에 묻혀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 차지철이 자신의 출생과 성장기에 잉태한 극심한 열등감이 결국에는 권력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발전해,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 놓았다. 이에 자지철이 10.26 사건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라는 측면에서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