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학살·고문·은폐·독직·용공조작 등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비민주적 군사정권이었다. 이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수지 흑자, 물가안정 등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이라는 태생적 원죄와 연루된 정당성 결여와 부도덕성으로 인해 광범한 민심이반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겠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103)는 단임 헌법에 따라 7년을 기다려왔던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서 국민들로 하여금 배신감·박탈감·분노를 한꺼번에 분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두환 정부의 연장이냐 아니면 전면 거부냐의 양극화된 대결의 초기 국면에서는 남북한 긴장 구도 상황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고 또 현대화된 막강한 군사적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는 전두환 정부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1987년 1월 14일 특정한 국면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인 동시에 군부독재의 부산물이기도 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04)은 예기치 않게 전두환 정권의 충복인 노신영 총리와 장세동 안기부장을 사퇴하게 만든다. 이로써 전두환 정부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전두환 퇴임 후 보호파(노신영, 장세동 등)가 퇴조하고 민정당의 정권 재창출에 우선을 두는 재창출파(최병렬, 박철언, 이춘구 등)가 발언권을 강화했다. 동시에 1987년 5월 18일 7년 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에서 국민들로부터 도덕성과 신뢰를 받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특별 성명을 발표했다. 즉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부에 의해 은폐·조작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일약 박종철 개인의 고문치사라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 전두환 정부의 부도덕성과 기만적 행태를 다시 전면에 드러내 보여주는 정치적 쟁점이 되는 사건으로 변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되고 조작됐음이 폭로·확인되면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어 범국민적 연대기구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돼 박종철 사건 규탄과 4.13 호헌조치의 철회 및 민주개헌 쟁취를 목표로 6월 10일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한다. 이 과정에서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연세대 재학생인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돼 사망하는 사건(105)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기폭제로 6월 10일의 국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6월 10일 이후 10~16일의 명동성당 내 농성 투쟁, 18일의 최루탄 추방대회 그리고 6월 26일 전국에서 130여만 명이 참여하는 '국민평화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전두환 정부의 집권 연장을 막는 6월 민주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2. 과정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투쟁의 규모를 볼 때 전국적으로 20~3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됐고 연인원 4~5백만 이상의 국민 대중이 참여했다. 투쟁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는 19일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됐고, 투쟁 방식의 다양성에서는 일반 국민들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측면 외에도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투쟁, 가두시위의 다양한 전술의 개발, 지역별 시위에서 ‘상징적 중심지’의 형성, 민주화 대연합으로서 국민운동본부의 결성과 지도력 창출,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도부 역할이라는 특징을 보여줬다. 6월 민주항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돼 나가는 역동적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1980년 5.18과 같은 광주학살의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군부 내 장성들의 소극적 입장과 더불어 한국이 처한 국제정치·경제적 맥락과 한미관계의 특수성에 따른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전두환 정부는 새로운 위기 타결책을 모색해야만 했다. 특히 1987년의 시점에서 전두환 정부에 대한 국제적 압력과 관련해서는 한국 경제·사회의 개방적이고 대외의존적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구조적인 압력 이외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순조로운 개최와 진행을 위해서도 정치적인 안정이 무엇보다 요구됐다. 또한 1987년 6월의 한국 정치의 상황과 관련해 미국 의회가 ‘한국민주주의 법안’을 제출하고 레이건 대통령의 경고 친서가 전달되는가 하면 개스틴 시거 미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이 한국 군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한다는 명확하고도 반복된 입장을 표명하는 등 미국의 직·간접적인 압력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활력을 뒷받침해 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
3. 결과 및 의의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 시기를 전후한 한국 경제가 3저 호황이라는 세계 경제적 요인에 편승해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경제적 호황으로부터 많은 덕을 봤다. 경제 호황에서 터져 나온 6월 민주항쟁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제기되는 계층 간 갈등의 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4.13 호헌조치'의 철회와 대통령 직선제 실시 등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돼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제도권 정치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6월 민주항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두 주자였던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 정치인의 합심과 제휴를 통한 정치적인 대안의 존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실제로 통일민주당은 6월 민주항쟁의 정점이었던 일련의 국민대회와 공청회,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될 때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몰고 왔던 양김(김대중·김영삼)의 주도하에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수권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부 결속과 전열 정비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또한 통일민주당은 재야운동권 세력들과의 공동보조 하에 전두환 정부에 대한 민주항쟁의 공세에 있어서도 중요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6월 민주항쟁에 있어서 제도권 야당의 몫을 지켜나가는데 성공을 거둔다. 6월 민주항쟁이 폭발적으로 전개돼 나감에 따라 일각에서는 군부의 전격적 퇴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에서 폭력이나 강제로 군부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이 아닌 보다 온건하고 안정적인 형태의 민주주의 이행으로 타협과 조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현실적인 물리적 저항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6월 민주항쟁의 주도세력은 군부의 즉각적인 퇴진을 강제할 만큼의 물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여전히 타협과 조율이라는 합법적 투쟁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간주되는 한, 군부정권과의 전면적인 물리적 대결을 벌일 어떤 구실도 정당화하기가 어려웠다. 셋째, 남북한 분단의 냉전적 대결 구도가 상존하고 있는 안보적 상황은 어떤 형태의 전면 대결도 부당하고 자기 파멸적인 것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극에 도달하고 있는 역동적 상황에서도 군부정권의 즉각 퇴진이라는 강경함과 조급성에 휘몰리지 않고, 6월 민주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실시라는 온건한 형태의 합법적인 요구로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민주화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했다. 6월 민주항쟁의 목표는 군부정권의 즉각적인 퇴진이라든가 급격한 체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대통령 직선제의 실시라는 보다 온건한 형태를 띠었다. 또한 권위주의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대통령 직선에 대한 승산 여부와 관련해 ‘양김(김대중·김영삼) 동시 출마 필승론’에 의한 야당의 분열로 충분히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전략적 계산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따라서 헌법에 의해 7년 단임의 임기가 끝나는 것을 무리하게 연장하려고 하기보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기획과 김용갑·이종률·허삼수 등이 제시한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의 적극 수용이라는 대반전이 제시되는데, 1987년 노태우에 의한 '6.29 선언'이 그것이었다. 정치 협약의 시동을 가져온 6.29 선언은 외양적으로는 민주화운동에 굴복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권세력의 주도면밀한 계산과 시나리오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위기를 타개해 나가려는 역공세의 정치 책략이었다. 6.29 선언은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대통령 직선을 둘러싸고 정치세력들 간의 협약에 의해 민주화를 가져오도록 한 정치적 전환의 계기가 됐다. 결국 6.29 선언이라는 집권세력의 통제와 이해관계의 조정하에서 진행된, 이른바 1노 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4파전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요구와 열기는 마무리된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1979년의 부마항쟁이나 1980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는 달리 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권위주의 지배 연합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체제 전환을 이루어 나가는, 이른바 협상에 의한 정치 협약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궤적을 남겼다. 이처럼 정치 협약에 의한 1987년의 민주화는 노태우 정부를 경유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의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 높은 생존 가능성과 정치안정을 보여줬다. 그러나 안정적인 민주화 이행의 대가로 독점 재벌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와 권위주의 지배 연합이 계속 건재함에 따라 보다 광범위하고 민중 지향적인 자기 변혁의 가능성은 그만큼 제약을 받게 됐다.
(103)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이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도덕성, 정통성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1986년 2월 각계에서 직선제를 중점으로 하는 투쟁이 확산되고, 신한민주당이 1,000만 서명운동에 돌입하면서 개헌 논의는 더욱 확산됐다. 이어 7월 30일에는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함에 따라 개헌 논의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후인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지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자,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조치가 4.13 호헌조치이다. 여야가 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지만, 야당의 억지로 합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행 헌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부는 발표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발표이기에, 오히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댕기는 역효과가 일어났다. 조치가 발표되면서 각지에서 장기집권의 음모를 비난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이 와중에 박종철 사건 진상이 추가로 폭로되면서 국민들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6월 10일에는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로 격화됐다.
(104)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물고문 등으로 심문하던 중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집회가 시작됐고, 1987년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사건 당시 박종철 학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다.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한 이유로 구속돼 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고,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87년 1월 13일 자정 무렵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됐다. 당시 연행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취조실에 연행해 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해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경찰은 14일 밤에 사건을 은폐키 위해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검사는 사체보존 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됐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됐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군부와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박종철의 사망 이후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데스크로 내보냈고, 석간에 단신으로 실렸다. 이 소식은 다른 국내 언론과 외국 언론에서도 인용됐고, 그날 KBS와 MBC 저녁 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내보냈다. 보도 다음 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그는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로 대공분실 509호실에 출입했던 오연상으로부터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하며,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결국 기자회견 4일 만인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 입장을 뒤집고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욕조에 머리를 한 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라고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시인했다. 이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관 2명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해 구속, 사건을 축소했다. 그리고 부검을 거친 박 군의 시신은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 중 하나로 지목된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서울남부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구치소 보안계장인 안유는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 외에 추가로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관여했고,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안 계장은 마침 수감 중이었던 이부영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고, 이 씨는 쪽지에 추가 관여 은폐 사실을 적은 뒤 친분이 있던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했다. 해당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됐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됐음을 폭로했다. 대공 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 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 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줬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폭로 다음 날 통일민주당에서는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고,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명확한 진상규명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대행해 달라는 진정서를 대한변협 측에 전달했다. 이후 박종철이 희생하며 끝까지 지켰던 박종운은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 후 극우 뉴라이트 계열로 변절해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하는 정치 행보를 걸었고, 16, 17, 18대 국회의원 선거(부천시 오정구)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연속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박종운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박종철의 부모에게 정성을 다해 매우 돈독한 관계였으나, 2000년 한나라당 입당으로 정치적 변절을 한 이후로는 박종철 부모와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05)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1천여 명의 학생이 대정부 시위를 벌이던 중 이 학교의 경영학과 2학년 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다. 1987년 6월 9일, 1천여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국민평화대행진(6.10 대회)을 하루 앞두고 이 대회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결의대회' 시위에 참가한 이한열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해 7월 5일 뇌 손상으로 인한 심폐기능 정지로 사망했다. 1986년과 1987년은 학계·문화계·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됐던 시기로, 1987년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직후에 발생한 일이어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87년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학생·시민·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 등 총 7만여 명이 참석했고,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묻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에게 더욱 깊은 불신을 주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어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이는 등 이른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정점에 이르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수습을 위해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선거의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6·29 선언이다. 1987년 숨진 박종철과 이한열은 14년 만인 2001년에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돼,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