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마지막 꽃 소피아 로렌
간밤에 무서리가 내렸는지 옥상 바닥이 미끄럽다. 색감은 털어내고 명도만 가지고 살아야 하는 무채색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멀리 성문교회 십자가 빨갛게 타들어 가는 저녁 음악다방 dj영준이 느닷없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
"우리 다방 단골 아가씨인데 그림 배우고 싶대서 데려왔으니까 잘 좀 가르쳐 줘라."
단발머리 여자가 인사를 한다.
화실 월세라도 벌어야 되지 않겠냐는 영준의 오지랖이다. 월세야 그림 몇 점 청림 화랑에 떨이로 팔면 될 일이고, 먹이라고는 소주, 담배, 라면이 전부인데 수강생은 귀찮기만 했다.
나이는 스물셋 현재는 백수, 여자가 자기소개를 했고 내일 챙겨 올 화구들을 적어주고 돌려보냈다.
영준이와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 옆 평상에서 라면에 소주를 마셨다.
'the house of the rising sun'
마이마이에서 조그맣게 들리는 팝송
"이거 제목은 해 뜨는 집인데 내용은 전혀 해 뜨는 거 하고는 거리가 있단 말이야 알고 있냐?"
날라리 dj가 잘난 척을 했다.
여치의 간섭
수강생이 왔다.
소묘를 한 다음에 수채화, 유화를 그려야 된다고 말했지만, 소묘는 지루하고 수채화는 중학교때 해봐서 굳이 유화만 그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첫날부터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순서를 정해 놓은 것도 나의 고정관념일 테니까.
몇 번의 경험으로 이런 부류들은 한 달을 못 넘기고 포기할 가능성이 백 프로였다.
수강생이 오고 이틀째 되던 날 골목이 시끄럽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관이다.
좁은 골목길에 수강생 남자친구가 각 그랜저를 끌고 들어와 오도 가도 못한다.
운전 실력은 아직 티코에 머물러 있었다.
씩씩 거리며 화실로 올라와 푸념을 했다.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
"그러니까 공터에 세우고 오랬잖아."
수강생이 남자친구에게 눈을 흘기며 팔짱을 꼈다.
첫인상부터 '나는 씨 잘 받고 태어난 부잣집 자식이니 맘껏 부러워하시오.' 온몸에서 거만이 줄줄 흘러내렸다. 무스 바른 머리에 금테 안경,
그 모습이 유년의 곤충채집 때 잡아놓았던 날렵한 곤충 여치 같았다. 왜 여치와 오버랩되는지 모르겠다.
여치가 수강생 옆에 찰싹 붙어 앉아 꽁냥꽁냥 그림에 간섭을 하며 주접을 떨었다.
"나도 고등학교 때 그림 좀 그렸는데 이건 원근이 하나도 안 살아 반사광도 없고, 배울 때 잘 배워야지 좋은 화실 많은데 뭐 하러 이렇게 후진 화실에서 배우냐 그것도 옥탑화실에서."
속삭이듯 말했으나 의외로 내 청력은 셰퍼드급이어서 여치가 하는 말은 기가 막히게 귓구멍 속으로 때려 박혔다.
니기미 배운 지 이틀 됐는데 반사광은 개뿔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수강생의 만행
"와! 해바라기 크다."
여치가 소피아 로렌의 머리채를 잡고 수강생은 여물 대로 여문 태양의 씨앗을 까먹으며 감탄을 했다. 꽃보다 아름답지 못한 인간들이 꽃을 잡아먹는 천인공노할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난 지금껏 꽃보다 예쁜 무결점의 생명체는 본 적이 없다.
"어이 수강생! 네 얼굴 살점 뜯어먹으면 좋겠냐?"
나도 모르게 게거품을 물었다.
수강생이 당황해서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해바라기씨 먹은 거 가지고 너무 민감한 거 아니오."
여치가 벽돌만 한 휴대폰을 손에 들고 끼어
들었다.
파랗게 질린 수강생이 말리지 않았으면 저 부르주아 새끼를 아작 냈을 텐데, 아니면 내 아구창이 날아갔을 수도 있었겠다. 수강생이 여치를 옥상에서 끌고 내려갔다.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란 듯이.
시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내가 여치 멱살을 잡았던 것이 결핍의 찌꺼기 자격지심은 아닐는지, 자꾸만 백대 영으로 졌다는 생각만 들었다.
팔레트에 잔뜩 짜놓은 유화물감은 가을볕에 굳어가는데 예상대로 수강생은 나오지 않았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어디쯤에서 옥상 화단의 모든 꽃들이 지고, 같이 술 마시던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의 큰 손바닥마저 살짝 만지기만 해도 바사삭 부서져 버렸다.
계절의 마지막 꽃이 죽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