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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이혼녀 2

미생물 인간

by 안개바다

담배연기 자욱한 양지 음악다방.

흰 블라우스에 청바지의 그녀가 어두워진 창밖에 시선을 두고 앉아있다. 왠지 음악다방엔 어울리지 않는 손님처럼 겉돌았다.

서로가 자기소개를 했지만 이 여자 신상에 관해선 쌀집 아저씨가 말해 주었기에 별로 궁금한 것은 없었다.

"제가 여자인 것도, 이혼녀인 것도, 나이가 세 살 많은 것에도 관심 없으면 저에 대해서 관심 있는 게 있기는 한가요?"

냉소적이다.

"저는 그쪽이 인간이라는 것에 관심 있습니다."

"자신이 희귀한 생물체라고 생각하세요?"

"존재가 모호한 미생물에 가깝죠."

대화가 임종을 앞둔 환자의 숨결처럼 끊길 듯 이어지고 있었다.

더 어색해지기 전에 서로의 호칭을 정해야 했다.

누나라고 부르기엔 느끼하고 김형이라 하기엔 유치했다.

"뭐, 모든 것을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까 선배로 부르세요. 이왕이면 수연선배.

적당한 호칭이다.

김수연은 나를 이 선생이라 불렀다. 존댓말까지 생략하자 분위기는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해졌다.

"어이 이 선생 내가 일 년 만에 음악다방 온 것 같은데 신청곡 하나쯤은 듣고 나가야지."

느끼한 DJ가 선곡을 한다. F.R David-Words 미성의 가수가 시 낭송하듯 감성을 간지럽혔다.


밖에는 가을비가 청승맞게 내리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조그만 가게에서 일회용 비닐우산 두 개를 사서 나누어 쓰고 학사주점으로 향했다.

작은 항아리에 앙증맞은 표주박이 동동 떠있는 동동주와 해물파전을 시켰다.

"난 삼 년 후엔 네팔로 갈 거야."

우연히 네팔 여행을 갔다가 영혼의 반쪽을 그곳에 내려놓고 왔기에 꼭 네팔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김수연은 보기보다 강하고 현명한 여자였다.

어쩌다 사기꾼과 결혼해 뒤통수를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긴 사기 치겠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놈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

"이 선생 너도 가고 싶으면 말해 내가 데려갈게."

요즘 네팔 가서 같이 지낼 동지들 모집 중인데 현재까지 두 명이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동동주도 거의 비워지고 있었다.


비 그친 거리에는 은행잎들이 바닥에 달라붙어 미끈거렸다.

"어! 수연 씨 여기서 보네."

한 남자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이쪽은 회사 동료 이쪽은 내 남자친구예요."

김수연이 소개를 했다.

남자는 가벼운 묵례를 하고 당황한 듯 돌아섰다.

"여자 혼자서 자취하니까 주위에 저런 파리들이 많이 꼬이네, 아주 환장을 하고 껄떡거려 남자친구라고 했으니까 이제 귀찮게 안 하겠지."

김수연의 자취방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바람이 불고 김수연의 얼굴만 한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고여있는 빗물에 떨어져 작은 파문이 일었다.

"쌀집 아저씨가 수연선배 걱정 많이 하던데."

제일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을 밟으며 내가 말했다.

"따지고 보면 아저씨 잘못도 아닌데 내가 그 새끼한테 미쳐서 이성을 잃었었나 봐."

김수연의 한숨 속에서 동동주 향기가 났다.

"언제 화실로 놀러 와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네팔 갈 사람 서너 명은 있을걸."

옥탑 화실에 출입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하고 있는 일들이 다양했다.

소설가, 중학교 국어선생, 음악다방 dj, 연극배우, 행사전문 트로트 가수 직업은 다양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직업 앞에 비주류라는 수식어는 꼭 달아 주어야 한다.

돈 버는 재주는 없고 세상의 중심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변방에 있는 자기만의 견고한 성을 지키고 있는 성주들이었다.

"저기 2층 첫 번째 집에 살아. 이 선생 여자 자취방 보고 싶지 않아?"

김수연이 입을 막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수연선배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이거 너무 티 나잖아."

"야! 인간이 인간 유혹해서 뭐 하게, 이 선생 너한테는 우리 집 개방했다. 다음부턴 놀러 와도 돼, 아저씨가 이번엔 사람 소개 제대로 했네
너는 정말 인간 같다."

김수연이 이층에서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화실로 오는 길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린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빠른 비트의 드럼 연주를 한다. 그러다가 또르르 굴러서 운동화를 적셨다.

일회용 비닐우산, 가끔은 인연이란 것도 일회용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찢어지면 쓰레기통에 거꾸로 처박아버려도 아깝거나 후회되지 않는, 티슈 한 장처럼 가벼운 일회용 인연. 그러나 지금껏 내가 맺은 인연들은 모질고도 이기적인 것들이어서 등을 돌리면 서로에게 쓰린 생채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늘 밤 나는 일기장 첫 줄에 쓴다.
가을 같은 사람과 緣이 닿았다.


김수연은 일요일마다 화실로 놀러 와서 네팔에 같이 갈 사람들을 물색 중이다.

그들 중에서 김수연에게, 수연이 말하는 네팔에 큰 관심을 보이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다음 마지막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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