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4번째 자취방]

한남동 UN빌리지

by 세바준

드디어 오늘, 3년여간의 서대문구 북가좌동 생활을 정리하고 이사를 했다.

전 매니지먼트와의 계약 기간 동안 대표님께 부탁하여 얻었던 전세 5천의 작은 원룸.

반지하도 옥탑방도 아닌 것이 가격 대비 서울 전세 원룸치고 나쁘지 않은 크기의 집이었다.


앞집 여자와 공용 세탁기 문제로 소리치며 싸웠던 시간들, 목돈이 정산되고 나서 비싼 전기 자전거를 구입해서 생활비 벌어 보겠다며 낮이고 밤이고 엉덩이가 배기도록 음식 배달을 했던 시간들, 코로나 시기에 수십 개의 오디션 영상을 찍고 캐스팅과 낙방의 굴레에 갇혔던 날들.

외에도 나름의 다사다난한 시간들을 보냈던 감정들이 구석구석 묻어 있기라도 한 듯,

몇 안 되는 짐을 빼고 나니 누렇게 색이 바랜 벽지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나의 서울살이 3번째 원룸, 안녕!


자, 이제부턴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의 교통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한남동의 고급주택을 소개하겠다!

바로! 한남동 UN빌리지 중앙에 위치한 4층짜리 고급



(중략)



여기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이하 상세주소 생략)


서울이라는 곳을 두 발로 직접 밟아 본 스무 살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1순위로 애정했던 곳이다.

느긋함과 정신없음이 공존하면서 골목골목 정겨움이 한껏 묻어 있는 이 동네에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었다.


한남동 UN빌리지가 아니면 어때?

제일 살아보고 싶었던 곳인데!

드디어! 내가!

아니!

은행이!

이곳에 살게 해 주었다. 완공된 지 1달도 안된 신축 건물!

원룸 탈출이냐고? 당연히 원룸이다.

하지만, 옷방으로 쓸 수 있을 만한 작은 공간이 있어서 1.5룸으로 봐도 무방하다.

세탁기를 넣을 수 있는 보일러실 도 있으니 합치면 2룸이지!

타향살이를 하면서 한 번쯤은 꿈꿔 오던 동네에서 살아줘야 멋진 삶이 아니겠나!


입주청소 업체를 섭외해서 청소도 해놨고

침대, 이불, 책장, 테이블, 의자, 선반 등등

사소한 생활용품 마저 새것으로 다 바꿨다.



누렇게 색 바랜 벽지는커녕, 눈 내리는 한겨울 아무도 밟지 않은 골목길처럼

새하얀 집안을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해진다.


"조금씩 나만의 속도로 삶이 윤택해지고 있어...!"


그런데 말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바뀌었음에도 나의 24시간이 무언가 좀 이상하다.


“외로움인가?”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기대감에 괜히 집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걷고 굳이 마시고 싶지도 않은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가는가 하면, 좋아하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골목 구석구석을 다녀보지만 지루하고 따분한 느낌이 계속 맴돈다.


내가 파악한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동네 특성상 친구, 연인, 가족 들과 함께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기에 거리에는 저마다 짝을 지어 있기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외롭게 느껴짐.


두 번째,

해야만 하는 사회적 노동이 없음.

자질구레한 집안일, 때에 맞춰 영양제 챙겨 먹기, 동네 산책,

도서관 가서 책 읽기, 유튜브 시청, 친한 배우들과의 밴드 합주....

누가 보면 어린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하루하루 아무 걱정 없이 유랑하며 사는 줄 알겠다.


무언가 붕 떠있는 마음을 안고 길을 걷다 보니 거리에 수많은 가게들이 보인다.

그리고 가게 안의 자영업자들을 보고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 다들 열심히 사네…’


그래... 이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은 일종의 사회적 노동을 해야 하는 거야!

전기자전거 시동을 걸자!


지금은 한 겨울이다.

한파주의보까지 내린 마당에 음식배달은 무리가 있지 싶다.


“자,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사회적 노동!”

식당,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에는 본업의 불규칙한 일정 때문에 쉽지 않다.



그때 들리는 마음의 소리.

“야 이 새끼야, 너 연기 안 할 거야? 촬영 안 해? 배우면 촬영을 하면서 일을 해야지!”


누가 모르나.

당연히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지만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디션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오디션에서 나라는 배우를 불러줄 때!

그리고 오디션에 합격을 해서!

캐스팅이 되고! 촬영장에 가고! 연기도 하고! 돈도 벌고!

어?!



"..... 휴...."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를 걱정거리 덕에 가슴이 답답해져서 인지 밤산책을 하다가

헛헛함에 아이코스 2대를 연거푸 찌워 버리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띠딕띠딕띠"


도어록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신발을 벗어 신발장 안에 넣는다.


"그러고 보니.... 신발장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도 처음이네”


따듯하게 몸을 녹이기 위해 샤워부스 안에 들어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항상 변기 바로 옆에서 샤워했었구나”


출출한 느낌이 들어 저녁밥을 차려 먹는다.

냉동실에서 썰어 둔 파를 꺼내어 팬에 기름을 두르고 파기름을 내고

스팸도 썰어 넣고 계란도 풀어 넣고 햇반에 굴소스까지 넣어서 볶아댄다.

다이소에서 3천 원 산 그릇에 예쁘게 담아 테이블에 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냉장고에서 사이다 하나를 꺼내어 마시니 목구멍이 청량한 것이 어딘가 속이 시원해진다.


"캬......."


그래 뭐,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


불안하다가도 평온해지고

조급해하다가도 갑자기 멍을 때리고,

멍 때리다가 풀려있던 동공에 초점이 맞춰지면 또다시 불안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소소한 거에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다

굳은 의지를 갖고 열심히 살아보겠다며 엉덩이를 떼고 움직여보는 것.


앞으로 어떤 불안과 어떤 평온을 만끽하며 행복해하고 아파할지는 모르겠지만,

예단하지 말고 들뜨지 말고 졸지 말고 온 마음 다해서 오롯이 받아내자.


나의 4번째 서울살이 자취방.

어떤 때를 묻히며 살아갈지 기대되는 나의 보금자리!

잘 지내보자!!!




"근데 방금 저거 바퀴벌레 인가...?"


침대 옆 창문에서 처음 맞이하는 종로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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