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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웉 Sep 21. 2024

빗속에서

9월 20일의 기록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비가 내렸다. 늘 모이던 건물 앞에 정렬했다. 짙은 녹색의 우비 속에 머리들이 저마다 다른 높이로 솟아있었다. 우비를 입고 총기를 들고 훈련장으로 이동해서 앞 조들이 실습하는 것을 지켜봤다. 비는 성실하고 단조롭게 내렸다. 처음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가 이내 싫증이 난듯 잦아드는 비가 아니었다. 8시부터 11시까지 지지직거리는 TV 화면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화면 안에서는 얼룩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총소리도 앰프로 틀어놔서 옛날 영화를 보는 듯했다. 잠시 졸 때 쯤 우리 조의 차례가 되었다. 기온 자체는 낮았지만 증발이라는 개념 자체를 잊은 날씨에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자꾸 시야를 방해했다. 방탄모, 전투조끼, 총기가 위에서 저기압과 함께 어깨를 눌렀고 환자 마네킹은 물을 먹어서 끄는 발걸음처럼 무거웠다. 배운 내용들을 하나씩 소리쳐가며 20분동안 어떻게든 실습을 끝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환자에게 최선의 처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다른 생각들에게 텃새를 부렸다. 그것은 좋거나 싫은 일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습이 끝나고 사용한 교보재를 정리하고 우비를 입으며 순간적인 어지러움을 느꼈다. 작년 3월 병원 실습을 돌 때 실신하기 전에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몸이 힘든 상태에서 외부와 공기가 잘 통하지 잃는 우비나 가운을 입고있을 때 발생한다. 이상하게 이 느낌은 정작 힘들게 뛰어다닐 때는 생기지 않고, 그 직후에 찾아온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이제부터 나는 환자와 살아간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는지 온기도 숨소리도 느낄 수 없지만 존재한다면 그걸로 됐다.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랫배에 생명을 잉태한 것을 느낀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좋거나 싫은 차원의 일이 아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당연히 힘듦도 느껴지지 않는다. 창 밖의 비가 마땅히 거기 있어야 하는 것처럼, 꾸준히 내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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