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는 꽤 나를 위해 쓸 시간이 있다. 일본어 청해연습을 하고, 운동도 하고, 오늘은 머리도 다듬고, 해야하는 전화도 충분히 오래 한다. 오전 중에는 엄마와 전화를 했다. 어제 했던 항암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행히 새로운 항암제가 잘 듣는 것 같았고, 부작용도 심하지 않아 꽤 오랫동안 항암치료를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제 막 의사가 된 아들에게는 여러가지 질문들이 쏟아졌다. 주로 이제까지 배운 내용을 토대로 어느 정도 추측은 해볼 수 있지만 확신은 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어릴 적 우리 집 책장 한켠에는 '별미반찬밑반찬' 이라는 365가지 밑반찬 레시피가 담겨있는 책이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엄마가 그 책을 볼 때 얼른 옆으로 가서 같이 보곤 했다. 엄마는 그 책의 표지가 색바래고 안의 페이지 몇 장이 찢어져 어딘가로 사라질 때까지 참고했다. 언젠가 버려진 그 요리책 대신 이제는 새 책을 한 손에 들고 이것저것 도움을 받는 우리 엄마였다. 나 역시 긴 모험의 시작에서 그럴싸한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책을 뒤져가며 길을 찾았다. 길에 넘어져서 풍기는 흙냄새마저 이제 생각해보면 정겨웠다. 그렇게 긴 세월 읽다보니 책은 너덜너덜해져 이제 마지막 챕터만을 남겨두고 있다. 아직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은 나는, 지금의 내 나이에 아이가 생겨서 요리책이라도 사서 해질 때까지 읽던 그녀의 심정을 드디어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