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무게의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의 상냥한 협박 속에 아이는 다시 테이블에 앉혀졌다. 그저 고분고분하고 조용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면 충분히 훌륭한 애티튜드였던 그 시절
이제 청소년인 딸들을 둔 나는 외롭게 혼자 라운지에 앉아있다. 졸졸 따라다니며 돌보아야 할 아이도 무겁게 챙겨야 할 기저귀가방, 여분옷, 장난감, 간식거리도 없다. 그래서 이제야 내 옆테이블의 아이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가슴에서 크게 울린다. 아마도 내가 어린 엄마였다면, 우리 아이들이 아이였다면 결코 들리지 않았을 이 목소리가.
이제 혼자가 되어 빈 테이블에 짐가방을 마주하고 쓸쓸하게 앉아있다 보니 깨닫게 되는 것들이다. 가방은 가벼워졌지만 허전하고, 챙겨야 될 그녀들이 없으니 외롭다. 그때는 애들이 얼른 커서 좀 여유로워졌으면... 애들이 알아서 좀 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버텼다면 이제는 그 시절이 그립다.
다시 돌아간다면 협박하지 않고 무서운 말투로 혼내지 않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의 언어로 소통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좀 어떻게 하는 건지 뭐가 맞는 건지 알 것 같은데... 되돌아갈 방법이 없다.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고 지금의 나는 더 강한 협박과 무거운 언어들로 그녀들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왜 현실은 녹록지 않은지...
왜 미래를 걱정하며 현실을 누르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뒤돌아보면 과거는 늘 헐겁다. 그렇게 누른 현실을 지나온 과거이건만 아무리 눌러도 눌러지지 않은 채 싱겁게도 헐겁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빌려서 운전을 해서 아이 기숙사로 가기로 일정을 다 짜놓고서는 따끈한 국제운전면허증도 여권옆에 나란히 챙겨 진작에 가방에 넣어두고 흐뭇해했는데... 좀 전에 알았다. 운전면허증을 놓고 온 것을... 출발 전 준비물을 챙기면서 지갑을 몇 번이나 열고 닫았으면서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수없이 여행하고 수없이 렌트했는데도 이렇게 까맣게 놓칠 수도 있구나...
엄청난 짐과 혼자 가는 일정에도 내내 완벽하게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이다가 한 번에 무너졌다. 긴장감과 집중의 아슬한 경계선이 무너지고 나니 급 피로감과 무기력함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진다.
잠시 떨어져 있지만 내게는 동행해야 하는 100kg 가까이 되는 짐 3개가 있다.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내용으로 챙긴 가방도 작지만 무게가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면세품 쇼핑백, 파리바게트 도리아게 쇼핑백이 더해졌고 혼자 여행이라 몸에 문신처럼 붙이고 다니는 백팩, 핸드백까지... 이 모든 아이들을 다 챙겨서 어떻게든 가야 한다. 딸이 기다리고 있는 기숙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