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는 나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이제 어머님이 돌아가신지가 십사 년이 지났습니다. 전에 썼던 글이지요. 천등산 석천초등 시절, 어머니에게 오랫동안 비밀이었던 이야기 하나를 꺼내 봅니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마음이 잡히지 않아서 쓰기가 힘들었던 이야기였어요. 친구들에게 조차 추억으로 이야기하기 싫은 이야기인데요. 얼마 전 딸들에게 감자전을 정성스럽게 해 주다 보니 다시 생생하게 떠 올라왔어요. 눈물 속에서 써 내려가 봅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쓰기가 너무나 싫었던 이야기지요.
천등산 석천초등학교 육 학년시절 여름 방학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지요. 6월이면 감자와 밀가루가 우리 집의 주식이었어요. 밭도 논도 없고 오직 어머니의 날품으로만 살았던 시절이라서 아침에도 감자를 삶아 먹곤 했었어요. 그때 엄마는 감자를 까서 솥에 넣고 물을 약간만 붓지요. 감자 위에는 밀가루에 베이킹파우더와 소다, 그리고 소금을 넣은 빵 반죽을 올려놓고 감자를 쪄내면 빵도 부풀어 오르게 되고 그야말로 감자와 빵을 동시에 해 주셨지요. 어머니만의 특별한 감자빵 요리이기도 했지요. 삶은 감자와 빵을 함께 으깨어 버무려 먹으면 너무나 맛있는 우리 집 식사 대용이 되었지요. 가끔 학교에 도시락으로도 싸 주시면 나는 아이들 앞에서 절대로 꺼내놓고 먹지 않았습니다. 당시 옥수수 밥까지는 같이 꺼내놓고 먹을 수는 있었어도 감자를 으깬 도시락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혼자 숨어서 먹거나 아니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다가 슬며시 먹어 치우곤 했지요. 이미 나는 고학년이고 집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또 어머니의 처절한 고생도 훤히 알고 있어서 감자도시락 거절도 못 할 때였지요.
감자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간 날 도시락을 친구들과 같이 먹지 못하고 학교건물 뒤에서 혼자 조심스레 먹고 있었어요. 우리 반 여자 A에게 우연히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 A는 내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다른 아이들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를 보냈음에도 곧바로 교실에 돌아가 내 도시락이 감자라는 사실을 발설을 해 버렸어요. 몇몇 짓궂은 친구들이 구경을 와 버렸지요. 그 바람에 나는 도시락을 반도 못 먹고 덮어 버렸지요. 창피함에 약이 바싹 올랐습니다.
점심 먹고 쉬는 시간이 되어 운동장에서 전교생아이들이 모두 나와서 놀고 있는데....... 그 속에 내 감자도시락을 발설한 A가 운동장 한구석에 앉아 공기놀이 하고 있는 게 보였어요. 나는 분이 덜 풀려 있었고 또 뒤끝이 분명하게 있는 아이였었지요. 당시에 가난을 가지고 놀리는 형들이나 힘센 친구들이 있으면 난 지게작대기, 짱돌, 낫 등으로 위협을 해서라도 맞지 않고 앙칼지게 싸웠던 아이였으니까요. 그냥 둘 수는 없었지요. 두들겨 맞고 자란 기억이 없지요. 다만 누굴 때린 적도 없고 남을 놀린 적도 괴롭힌 적도 없었던 그냥 온순한 아이였지요. 짓궂음과 위트는 있어 그래도 친구들은 있었지요. 다만 가난한 우리 집을 놀리거나 업신여기면 자존심이 강해서 그때는 끝까지 싸웠지요. 그런 내게 A친구가 걸려든 것이었어요. 여자라서 그냥 살짝 머리통을 쥐어박는 걸로 앙갚음을 생각하고 주먹을 휘둘렀지요. 그런데 여자 A 친구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정면으로 콧등이 맞았고 금방 코피가 터졌습니다. A는 빨간 피를 보자 크게 울기 시작했고 마침 점심을 드시고 교무실로 걸어가시던 교장선생님과 전교 선생님들도 정신이의 울음에 나의 이유 없는(?) 폭력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절대로 발설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또 그날 무슨 연유였는지 A친구 엄마가 학교에 왔다가 딸의 코피 터진 모양을 보고는 부르르 떨면서 나의 따귀를 먼저 때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멱살을 부여잡고 악을 쓰면서 교장실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치맛바람이 있던 A 어머니였지요. 시골학교 점심시간이 나의 보복 주먹에 의해 정말 헝클어져 버렸고 나는 단단히 걸려들었습니다. A엄마에게 뺨도 서너 대 맞았고 교장선생님에게도 훈시를 들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교장실에 불려 들어갔었고 내가 우리 반교실로 돌아왔을 땐 우리 반 전체가 단체기압으로 책상 위에 올라가서 손들고 있었습니다. 나로 인한 사고 때문에 벌을 서고 있었지요. 담임선생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음을 알았지만 나는 A를 왜 때렸느냐는 그 이유를 절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냥 장난하다고 그랬다고 했지만 선생님도 A엄마도 믿지 않았고 나를 다그치기만 했습니다. 왜 여자친구를 코피가 나도록 때렸느냐고....... A도 다행인 것은 감자도시락 사건은 발설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남자 친구들도 나 때문에 벌을 서는 게 억울한지 선생님에게 추궁을 당하는 나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너 죽었어, 하는 시늉을 선생님 몰래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날 선생님말을 우습게 안다고, 또 이유 없는 폭력을 썼다고 선생님의 단단한 회초리가 다 부러지도록 발바닥을 맞았습니다. 당시 우리 담임은 엎드려 벗 쳐를 시켜놓고 한쪽 발바닥을 들게 하고는 발바닥을 때리시는 분이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그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지막지하게 맞으면서도 도화선이었던 어머니의 감자 도시락 발설 사건은 절대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모독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날 집까지 걸어오는데 발바닥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어머니가 눈치를 채시면 안 되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으킨 사고는 전교를 흔든 사건이므로 학교를 다니던 두 살 터울의 동생들 중 하나가 이미 어머니에게 고해바쳤지요. 내가 교장선생님에게 혼난 일, A엄마에게 뺨을 맞은 이야기, 담임선생님에게 죽도록 맞은 이야기를 소상하게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도 감자 도시락이야기는 절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선생님이 물으셨을 때 바른대로 이야기를 했으면 덜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가난을 파는 일이기에 절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약한 여자를 때린 것은 아들 잘못이지만 A엄마가 뺨까지 때린 것은 너무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드는 게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또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때린 선생님도 못 마땅해하셨습니다.
감자도시락은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그리고 그 친구만 아는 비밀이어지요.
그 뒤로 그 친구는 졸업과 동시에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고 담임선생님은 지금도 천안에서 교편을 은퇴하셨지요. 우리 어머니만 십사 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저는 지금도 감자만 보면 그때의 일들이 떠 올라옵니다. 다만 감자 도시락이 빌미가 되어 그렇게 커다란 일이 발생해서 A엄마에게 뺨과 담임선생님에게 호된 매질을 당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 때문에 단체로 벌을 섰던 반친구들에게도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어머님께서 어린 세 자녀들을 데리고 혼자의 몸으로 살기가 벅차고 막막할 때마다 자살을 시도하시는 것을요. 정확하게 세 번의 자살 시도가 있었지요. 그 뒤로 저는 어머니 가슴에 치명적인 못으로 박힐 일들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고 또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딸들에게 감자전을 부치다가 그때 감자도시락 발설사건이 떠 올라와 이렇게 이제야 편하게 그때 죽도록 맞은 이유를 밝히며 글로 썼지요. 감자만 보면 생각나는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이제는 영면의 깊은 세계에 계시지요. 그 아팠던 비밀을 이제야 이렇게 토해내 봅니다. 아픈 비밀하나를.......
이 감자스토리를 써서 4000명이 있는 독서밴드에 올렸더니 제 초등학교 1년 여자선배님께서 저를 알아보시고 쪽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존재감이 없었던 소년이라 잘 몰랐는데 제가 쓰는 글을 오랫동안 재미나게 보다가 어린 시절의 학교 이야기와 동네 지명이 나오면서 알아보셨습니다. 그 선배님을 얼마 전 만났지요. 사실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것이지요. 특히 그 선배의 바로밑에 남동생은 제 한해 후배인데 우리 학교 생기고 처음으로 서울대를 갔고 그 집 막내도 서울대를 갔을 정도로 천재집안입니다. 나는 그 집과 그 선배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나의 존재감이 그 선배님에게 있다는 사실도 행복했지요. 그 선배님은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있어서 바로 알아보았는데요. 여전히 미인이셨어요. 청주에 사는 고등학교 동기분 한 분을 모시고 오셨는데 그분도 미인이셨어요. 두미인분과 식사를 하니 밥과 반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답니다.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한편을 같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