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오소리 한 마리 잡으면 로또 당첨급의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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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동쪽 골짜기 첫 마을이 석천리 곰지기 마을이 있고 절반은 화전마을로 두세 가구씩 듬성듬성 산비탈을 차지한 채 십여 가구가 사는 동네에서 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일 학년 봄에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되었고 화전 농사꾼이 되어 초등 졸업과 동시에 소로 밭을 갈았고 담배농사도 거뜬히 하는 소년 농부였었지요. 겨울이면 굴거리 나뭇짐도 가지런하게 잘해 날랐고 또 동물 사냥도 용의주도하게 잘했습니다. 골짜기 도랑마다 가재와 겨울 개구리를 잡는 건 선수였었고요.
또 겨울에는 산토끼, 꿩도 잡았지만 오소리도 한해에 한두 마리는 꼭 잡았습니다. 당시에 오소리 한 마리의 쓸개는 오소리가 곰 사 춘이라고 해서 귀한 웅담 대접을 받았지요. 충주라는 도시에서 사는 임자를 만나면 쌀 두 가마를 받고 팔았습니다. 농지가 없어 가난하기만 했던 내게 오소리 잡기는 겨울한절의 큰 농사였지요. 쌀 두 가마만 있으면 우리 집 반년의 식랑이어서 나는 오소리 잡기가 논 한 마지기 농사, 이상이었어요.
날이 새는 새벽에 집을 나서서 화전까지 가는데도 달빛에 속아 넘 일찍 올라가다 보면 날이 안 밝아 와 중간에 담배를 피우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오소리 한 마리가 잡힌 날은 덧을 놓은 주변일대가 강한 철사줄 닿는 데까지 반들반들합니다. 나는 긴장하며 손에 든 묵낫을 곶아들고 접근을 합니다. 잡힌 놈은 가장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사정없이 내게 덤비지만 나는 사정거리 밖에서 낫대가리로 수십 번을 인정사정없이 때려야 놈을 잡는답니다. 그놈을 메고 내려오는 아침에는 기분이 당시에 정말 삼삼합니다. 쌀 한 가마니를 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밭 주변의 골짜기들 높은 데까지 뒤집니다, 오소리는 두세 마리가 함께 살기에 반경 1킬로 내에는 굴이 분명히 있고 또 집단으로 한 곳에 변을 보는 습성이 있어 그 변무더기를 찾으면 반경 300미터 내에 놈들의 굴이 반드시 있어요. 첫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첫눈이 소복하게 제법 내려 쌓이면 다시 그 골짜기를 갑니다. 오소리가 들어있는 굴입구는 굴 안의 오소리들 온기로 눈이 녹아 굴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굴 안에 오소리들이 잠들어 있다는 신호입니다. 굴을 찾은 다음날은 일찍 토종고춧대와 풍구, 괭이, 삽을 지게 소쿠리에 지고 점심밥까지 싸들고 올라갑니다.
천등산 줄기의 행병골과 큰 도독골 사이의 높은 골짜기 화전밭에 오소리 미끼용 옥수수를 심으면 초가을 밤에 오소리들이 옥수수밭 알곡을을 대각선으로 먹어 내려 오지요. 밭가장자리를 면밀히 살피면 오소리들은 늘 같은 길로 드나드는 길목이 보이고요. 잡풀들 사이로 길이 반질반질합니다. 그러면 스프링 강한 쇠더을 땅에 파고 알맞은 깊이에 넣고 냄새 안 나게 비닐을 먼저 덮고 흙을 다시 살짝 덮고 검부적지까지 덮어 길처럼 위장을 해 놓지요. 그리고 그 덧을 강한 철사줄로 주변의 굵은 나무에 묶어둡니다.
날이 새는 새벽에 집을 나서서 화전까지 가는데도 달빛에 속아 넘 일찍 올라가다 보면 날이 안 밝아 와 중간에 담배를 피우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오소리 한 마리가 잡힌 날은 덧을 놓은 주변일대가 강한 철사줄 닿는 데까지 반들반들합니다. 나는 긴장하며 손에 든 묵낫을 곶아들고 접근을 합니다. 잡힌 놈은 가장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사정없이 내게 덤비지만 나는 사정거리 밖에서 낫대가리로 수십 번을 인정사정없이 때려야 놈을 잡는답니다. 그놈을 메고 내려오는 아침에는 기분이 당시에 정말 삼삼합니다. 쌀 한 가마니를 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밭 주변의 골짜기들 높은 데까지 뒤집니다, 오소리는 두세 마리가 함께 살기에 반경 1킬로 내에는 굴이 분명히 있고 또 집단으로 한 곳에 변을 보는 습성이 있어 그 변무더기를 찾으면 반경 300미터 내에 놈들의 굴이 반드시 있어요. 첫눈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첫눈이 소복하게 제법 내려 쌓이면 다시 그 골짜기를 갑니다. 오소리가 들어있는 굴입구는 굴 안의 오소리들 온기로 눈이 녹아 굴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굴 안에 오소리들이 잠들어 있다는 신호입니다. 굴을 찾은 다음날은 일찍 토종고춧대와 풍구, 괭이, 삽을 지게 소쿠리에 지고 점심밥까지 싸들고 올라갑니다.
일단 굴입구를 돌로 틀어막고 굴바로 앞에 구덩이를 팝니다. 젤 힘든 노동이지요. 무 구덩이보다 깊게 파야 됩니다. 1미터 50cm 정도 파고는 굴을 막은 돌을 치우고 토종고춧대를 굴속으로 태우기 시작합니다. 연기가 잘 안 들어가면 실패할 확률이 있어 풍구를 돌려 연기를 안으로 불어넣기를 시작합니다. 토종 고춧대 연기가 맵기 때문에 한 시간 가까이 불을 때다 보면 굴 안에서 놈들의 신음소리가 쿨럭쿨럭 들려옵니다.
그때는 파놓은 구덩에서 나온 다음 굴입구에 불 흔적들을 다 치우고 땅을 팠던 괭이를 꼬나쥐고 기다리면 놈들이 견디다 못해 튀어나와 구덩이에 빠집니다. 도망치기 위해 튀어 오르는 오소리를 사정없이 내리쳐야 됩니다. 구덩이에서 나와 달아나면 놓치거든요. 두 마리가 한꺼번에 튀어나오면 한 마리는 반드시 놓치고 맙니다. 그때 오소리들은 매우 사납고도 끈질겨서 머리통이 다 으깨져도 살아서 으르렁 거립니다. 일단 죽이고 나면 낫으로 귀와 꼬리를 잘라 산 쪽으로 놓고 정중하게 절을 합니다. 산신에게 고맙다는 신선한 의식의 고사를 지내는 겁니다. 나의 안녕과 동네의 안녕과 죽은 오소리 영혼의 안녕을 빌어주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잡아가지고 내려와 쓸개는 떼어 처마밑에 걸어두고 고기는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잔치를 한답니다. 그리고 슬쩍 충주시내 나가 건강원 여기저기 타전을 하면 며칠 내로 작은 웅담을 사러 임자들이 옵니다. 잘 팔면 쌀두가마, 못 받으면 쌀 한가입니다. 어쩌면 여름 내내 땀 흘리며 지은 농사보다 더 많은 수확을 건지기도 합니다. 저는 농지가 없어 일손 없는 집의 농지를 빌려 담배나 옥수수, 고추를 심기에 소득은 늘 빈곤했거든요. 나름 겨울의 사냥은 내게 농사의 알찬 연장이기도 했어요. 사실 오소리 농사는, 동물들에게는 용의주도해서 사냥을 잘하시는 동네 형에게서 저대로 배웠거든요. 토끼몰이도, 꿩 싸이 나도 잘하시는 형님에게 배웠거든요. 족제비 잡아 가죽을 벗겨 파는 일까지도 능숙하게 배웠지요. 당시에는 멧돼지가 없었는데 제가 지게를 팽개치고 나온 뒤 십여 년 지나니 멧돼지 출몰 소식을 들었지요.
이제 그 시절은 하나의 리즈시절이 되었고요. 청주에 살던 젊은 날에 산동물 잡는 사냥꿈은 길몽이 되어 꿈을 꾼 날에는 복권당첨 같은 일들이 생기거나 장사가 대박이 기도 했어요. 좋은 징조의 일들만 생긴 거지요. 그렇게 죄의식 같은 거 없이 거침없었는데요. 나이가 들고 세상의 깊은 진리를 알아가면서 생명의 존귀함을 체득하면서 후회가 들기 시작했지요. 그 시절들의 사냥을 꿈꾼 날에는 속죄 의식들이 영혼 깊은 곳에서 생겨 나더랍니다. 무심천이고 미호천이고 정말 고라니나 너구리, 오소리를 만나면 마냥 좋아지고 신기하고 사랑스러워 오랫동안 놈들의 안녕을 비는 진심의 기도를 합니다.
만약 내 젊은 날이 척박하지 않았다면 나는 친구들처럼 도시로 진학을 했을 거고 그 잔인한 사냥에 빠지지 않았겠지요. 지금은 그 시절의 속죄로 대한민국 산하의 유해동물까지도 사랑한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산하에 곧 호랑이가 출몰 하리란 생각을 합니다. 강원도 실길 도로를 탈 때마다 동물영령들의 고운 안녕들을 빌며 다닙니다. 그래서 산길들은 달리지 않지요 로드스킬 하면 안 되니까요. 운전을 50년 가까이했어요. 딱 한 번만 고라니를 치었어요. 절룩이며 산속으로 달아나는 게 전부였어요. 얼마나 다행이었던지요.
그때 그 동물들에게 이 이고백은 꼭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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