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등산 골짜기에서 있었던 유년의 이야기입니다. 국민학교 육 학년을 막 올라선 3월 초 이야기이다.
나와 같은 마을에 살았던 A는 셋 중에 싸움도 가장 잘했고 특히 달리기를 잘했다. 또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리더 역할을 했었다. B는 우리 중에 키가 가장 작았으나 지혜가 많았고 지혜를 제공하는 덕분에 일을 같이 저지르고도 언제나 혐의가 가벼웠었다.
나는 이쪽저쪽을 잘 눙치며 잘 웃기곤 해서 나중에 입으로 밥을 벌어먹을 놈이라고 했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아버지가 일 학년 때 돌아가셔서 집안일하느라 셋이 노는데 참여가 저조했고 조금 못된 거사를 감행할 땐 배후 조종처럼 뒤에서 망보기라든가 그런 걸 주로 했었다. 겁이 많았다. 이유는 어머니께서 내 잘못된 거사들이 들통나면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소리를 듣고 살아갈까 봐 지독하게 싫어하셨다. 많은 겁이 많은 척해야 했었다. 그때 이미 세상살이를 눈치로 제법 습득한 처지였었다.
당시 우리 시골은 도시락 반찬도 변변찮은 벽지에서도 상급 벽지였고 학교에서는 건빵으로 급씩을 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인기 있는 먹거리였었다. 나 같은 경우엔 공부를 하러 가는 게 아니고 건빵을 타러 가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건빵을 삼십 개씩 특권 가득한 반장이 나누어 주면 삼분지 일은 아껴가며 먹고 나머지 일은 집에 싸 가지고 갔고 나머지 일은 교실 바닥에서 지금의 바둑 알까기처럼 손가락 튕겨서 따 먹기를 했는데 거기에서도 실력에 따라 딴 아이들은 집에 가져갈 몫이 많았고 잃은 아이들은 "내일은 다섯 개로 값을 테니까 세 개만 빌려줘라"를 연발하면서 두둑한 놈을 따라다니곤 했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 식량문제가 워낙에 심각해서 나의 두 동생들을 건빵 때문에 한 학기씩 빠르게 입학시키고 다음 해에 정상으로 복귀시키셨었다. 그만큼 건빵은 두메산골의 살림까지 거드는 식량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마을에서도 산 꼭대기에 자리를 잡아서 산판길 도로처럼 길이 엉망이었다. 산을 깎아서 만든 길이라 경사도 심했고 따라서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눈으로 빙판이었고 초봄에는 언 땅 표면이 녹으면서 길이 연한 찰떡처럼 질척이고 미끄러웠다. 꼭 그 무렵에 건빵을 싫은 차가 학교에 왔는데 경사길에만 접어들면 바퀴가 헛돌며 땅을 파 놓아서 결국은 육 학년 덩치들 불러내어 차를 뒤에서 밀어야만 올라 챌 수 있었다.
A가 셋이 함께 모인 겨울방학 어느 날 고픈 배를 어루만지며 건빵을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는 거사를 제안했는데 음흉하고도 기대되는 일이었다. 즉시 우리 셋은 치밀한 모의에 들어갔고 실행의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었다. 빨리 방학을 끝나기를 기다렸다. 드뎌 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드뎌 언 땅이 녹기 시작하던 어느 날, 5교시 종이 끝나자마자 선생님께서 덩치 큰 다섯 명만 지원해서 건빵 싫은 차를 밀고 올라 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우리 삼총사 하고 두 명이 더 지원했었는데 당시 우리들과 친한 애 들어서 거사 진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날따라 행운의 도래처럼 짐차에 따라오던 조수도 없었다. 조수가 있으면 그르칠 공산이 컸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았었다. 트럭뒤 짐칸에는 건빵이 몆십 포대 정도가 실려 있었다.
우리는 뒤에서 영차영차 큰소리로 트럭을 밀면서 B를 차 짐칸 건빵포대 위로 올려 보냈다. B는 운전수 몰래 세 포대나 마른풀과 솔보디기(잔 소나무) 많은 산 쪽으로 날렵하게 집어던졌다. 순식간에 감쪽같이 던져서 같이 밀던 두 녀석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A와 나는 그 두 놈 옆에 바짝 붙어서 정신 못 차리도록 큰 제스처를 펼치며 차를 밀고 올라갔었다. 간 덩어리가 컸던 관계로 무려 세 포대나 길옆 숲으로 던져놓았다.
그리고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둠이 들 때까지 왜 그렇게 시간이 더디던지. 당시에는 서리가 무슨 성장과정에 거쳐야 할 의식이었고 또한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도둑질이란 죄책감 따위는 없었던 게 그 당시의 정서였었다.
어둠이 먼산 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올 때쯤 우리 셋은 만나서 건빵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참으로 기대에 찬 시간이었다. 한포대식 나누어서 혼자 몰래 먹으면 한 달가량은 먹을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있어야 할 건빵이 제자리에 없었다. 셋이서 눈을 씻고 길 둑 옆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고 없었다. 솔나무 틈새에도, 마른풀 수북한 곳에도 없었다. 분명 세 포대를 던져 놓았었다.
그렇다고 셋 중에 한 명을 의심할 처지도 아니었다. 학교에서부터 줄곳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모를 일이어서 함께 차를 밀었던 녀석들 집까지 찾아가 어둠 속으로 불러내어 은근슬쩍 떠 보기도 했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다음날 등교를 하니까 건빵분실 사고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혐의를 우리셋에게 두고 담임께서 추궁을 하셨지만 우리는 완강하게 부인을 했었다. 먹어 보지도 못한 건빵이어서 벌을 받기에 억울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운반에서 사고인지 하룻밤 보관에서 사고인지 확인불가여서 혐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못 믿는 눈치였었다. 그러나 건빵을 배급받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건빵생각이 떠 올라 오래도록 쓰게 웃었다.
그렇게 멋진 도둑질을 해 놓고도 건빵 구경을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인데 동네 농사짓는 형들이 멀리서 우리들이 훔치는 광경을 다 보고는 우리가 수업을 끝내고 오는 사이에 형들이 우리들의 획득물 세 포대를 홀랑 싹쓸이해 가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말하며 홀연히 사라진 건빵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었다. 나중에야 형들 짓임을 알고 쓰게 웃었다.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이 있다는 속담을 뼈저리게 학습한 사건이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자랐다.
참으로 유년의 시절은 즐거웠던 같습니다. 닭서리를 하다가 똥통에 빠지고 오줌 세례를 받던 일, 겨울날 토끼몰이 하다가 총을 들고 사냥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고 놀래서 간첩으로 신고하던 일, 봄만 되면 새 새끼들을 길러 날려 보내던 일, 여름이면 계곡 웅덩이에서 목욕하는 누나들의 옷을 감추던 일, 쥐고기와 고양이 고기를 토끼고기로 속여서 친구들에게 먹이던일......
그 많은 이야기들이 속속들이 떠 오르네요.
참으로 아름답던 시절이랍니다~~~
오늘은 금요일 서울을 서둘러 버스 타고 갑니다. 어젯밤엔 새벽 두 시에 귀가를 했지요. 고객이 부르면 은하까지 갈 겁니다. 오랜 습관의 결과랍니다.
버스에서 생긴 한 시간 삼십 분을 사색과 밀린 글쓰기를 합니다. 사실 너무나 세파에 휘둘려 밥조차 먹을 시간 없이 밤 자정까지 빡빡하게 살아내고 있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유튜브와 블로거의 힘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정쩡한 글들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버스로의 이동에서 나를 돌아봅니다. 잔잔한 서정의 감동과 깊은 가을 속의 향연은 잠시 미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