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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주 Oct 18. 2024

내 인생의 커튼콜

(그림책: 「나의 쓸모」)

   달덩이처럼 둥그렇고 탐스러운 항아리가 표지 그림에 등장한다. 많은 것을 품고 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풍만한 몸체. 그러나 표정은 밝지 않다. 항아리 입구의 작은 벌어짐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균열이 그간의 노고를 대변한다. 눈으로 그려진 작은 다이아몬드 모양은 그것이 가로로 눕혀진 형태일 때 슬픔과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생소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무표정 안에 상심을 담고 있는 얼굴, 항아리의 모습이다. 상단에 적힌 ‘나의 쓸모’라는 제목은 항아리가 자신에게 묻는 물음 같다. ‘이러한 모습일진대 나의 쓸모는 여전히 가능한가’라고.


   온갖 꽃을 담으며 공간을 밝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화병은 이가 빠지는 상처를 겪은 뒤, 냉정하게 버려진다. 쓰레기더미들에 나란히 놓여 새벽이 올 때쯤 수거될 것이며 이후의 향방은 알 수 없다. 항아리로 태어나 화병으로 살던 삶은 이제 끝났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져 쓰레기장을 벗어난 이후에도 마냥 기쁠 수만은 없다. 어떤 연유로 선택되었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화병의 삶으로 충만했던 항아리에게 그 이외의 쓰임은 존재의 전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망갈 수도 없는 현실. 항아리는 그저 몸을 새로운 주인에게 내맡긴 채 다른 쓰임으로 거듭나기 위한 수모를 겪는다. 물세례로 씻기고 닦인 후, 밑바닥이 못질로 구멍 뚫린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흙덩이가 몸 안으로 꾹꾹 눌러 담긴다. 깨끗한 물과 향기로운 꽃만을 품었던 항아리에게 이 낯선 경험은 도무지 그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어두운 터널 같다. 흘린 밥알처럼 자잘한 것들이 몸 안에 흩뿌려지고 다시 한번 세차게 물벼락을 맞은 뒤, 항아리는 거실 밖 베란다로 내쳐진다. 이제 즐겁고 행복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항아리는 체념한다. 항아리로 태어나 화병으로 살았던 화려한 인생은 되돌아갈 수 없는 먼 과거가 되어버렸다.



   

   항아리의 두 번째 쓰임이 시작된다. 항아리 자신은 인정하기 힘든 화분으로서의 삶이다.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있고 어떤 노력이 필요하며 그 뒤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은 무엇일지 짐작되지 않는다. 몸 안에 담고 있는 것이 내세울 만한 향기로움이나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은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사실상 집의 밖인 베란다가 삶의 자리가 되었다는 데 서글픔이 밀려든다. 주변의 화분들이 모두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삶의 모습도 변해 간다. 쿰쿰한 흙냄새만 풍기던 몸 안에서 어느 날 꼬물꼬물 싹이 올라오고 키가 자라더니 초록 잎 사이사이 노란 꽃을 피운다.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화병의 삶이 짜릿하게 스쳐 가며 화분은 꽃을 항아리 가득 따뜻하게 품는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만을 품었었던 화분에게 꽃이 진다는 경험은 낯설지만 슬프지 않다.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열매를 통해 그동안 감내해야 했던 수고로움이 비로소 해소된다. 화분으로서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아니 이전에는 담아보지 못했던 열매를 품을 수 있어서 충만한 삶이라고 작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눈이 말한다. 다이아몬드 모양은 세로로 바뀌어 있고, 길쭉한 모양이 주는 날렵함과 경쾌함은 긍정의 감정 표현으로 읽힌다. 화분의 눈이 웃고 있다. 




   삶의 무대에서 내 의지로 혹은, 여타의 이유로 내려오거나 막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무겁게 드리워진 커튼은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다. 나를 쓰고자 하는 부름이 커튼콜로 이어져 무대 위 재기를 꿈꿀 수도 있다. 나의 쓸모를 여전히 호평해주니 반갑고 고맙다. 그러나 영원한 쓸모란 존재하지 않으며, 마르고 닳도록 쓰인 다음의 나는 새롭게 거듭나지 않는 한, 다시 쓰일 여지를 잃게 된다. 나는 늘 쓰임새가 있는 가치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림책 뒤표지에서 ‘당신의 쓸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읽게 된다. 여전히 쓰일 곳이 있음에 위안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쓸모있는 존재로 살아남기 위해 또다시 고군분투해야 하는 삶에 벌써부터 지쳐버린다. 나의 쓸모를 타인에게 일임하면 안 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깨닫는다. 스스로를 가치로운 존재로 여기되 세상의 잣대가 나의 쓸모를 이리저리 재단하지 않도록, 그리고 동요되지 않도록 내가 가진 가치를 진정으로 아껴야 함을 생각한다. 


   항아리의 두 번째 삶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비록 자신의 선택은 아니었으나 쓰임을 알아봐 주는 혜안을 가진 이의 도움이 있었고 갖은 역경을 참아내는 인내가 있었으니 살아볼 만한 삶이 또다시 전개될 수 있었다. 


   이 그림책은 두 가지 관점으로 읽힌다. 항아리가 화병으로서의 인생 전반부를 살고 난 후, 버려질 뻔하다가 개조되어 화분으로서의 인생 후반부를 살게 되었다는 인생 이모작의 실현이라는 관점이 그 하나이다. 이는 ‘아프니까 인생이다’라는 모토로 절망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내가 설 자리는 반드시 생긴다라는 교훈적 메시지와 연결된다. 그리고 가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생각의 전환으로 나의 쓸모를 새롭게 발견한다는 것이 또 다른 관점 하나이다. 어떤 관점으로 읽히던 중요한 건, 삶의 무대에서 나를 소환시키는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커튼콜은 남이 불러주는 것이 아닌, 내가 등장할 수 있을 때 서는 무대여야 한다. 떠밀리듯 불려 나온 무대에서 두 번째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삶이라는 문제에 자신있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 흐뭇하게 덮을 수 있었던 첫 만남에서, 다시 펼쳤을 때는 고개를 모로 갸웃거리게 되는 이 그림책을 독자들도 읽고 자신의 생각은 어떤지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될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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