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 자리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
주로 사회적인 성공과 리더의 자질을 연관 지어 설명할 때 들어봤음직한 이 말이, 최근 다른 의미로 와 닿은 적이 있다. 나는 늦깎이 초보 운전자다. 40대에 들어서 재수 끝에 겨우겨우 면허를 따고 운전석에 앉게 되면서, 그전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들에 눈길을 준다. 무심하게 지나쳤을 것들에 신경을 쏟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다.
차는 시동을 켜고 액셀과 브레이크 페달만 밟을 줄 알면 저절로 가지만, 자동차 안 그리고 길 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두루 아우를 줄 알아야 했다. 앞이나 옆 차로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전방뿐만 아니라 옆 차로 때론 백미러로 뒤쪽 상황도 훑는다. 우회전을 할 때는 혹시 오토바이나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까,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혹시 차와 차 사이에서 아이가 뛰어나올까 봐 두 눈이 분주하다. 앞만 보고 가기에도 벅찬 초보운전자에게 이래서 운전은 참으로 피로한 일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주차난이 극심하기로 유명하다. 저녁이나 주말에는 이중주차된 차들 사이 비좁은 공간을 비집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아찔한 순간들이 많다. 가장 난도가 높은 구간은 회전 구간. 사선 주차장을 지나면 양쪽으로 이중주차된 차량들이 들어차 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속도를 늦추고 좌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지나가면 크게 무리가 없지만, 마음을 놓을 수도 없다. 게다가 아직 한참 부족한 운전 실력으로는 더 천천히 주변 상황을 확인하면서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조수석에서 속 편하게 운전석에 훈수를 두던 시절과는 다른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예전의 나라면 보지 않았을 각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을 피하려고 잠시 뒤로 물러선 게 아니라, 차와 차 사이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속으로 ‘설마,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하는 걱정이 앞섰다. 서둘러 가까운 빈자리에 차를 세우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도 경찰이나 구급대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는데도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 카메라를 켰다. 열 걸음 전부터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다가갔더니, 아까 본 그 자리에 정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 앞을 걸어가더라도 시선을 두기 쉽지 않을 정도로 외진 구석이라서 그런지, 바로 그 근처에서 아파트 관리원 아저씨가 청소 중이셨는데도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셨다. 만약 그 사람을 못 보고 주변 차가 움직였을 수도 있다 상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한 걸음 거리까지 다가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살폈다. 아, 다행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들숨날숨을 들이쉰다. 살아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제서야 얼큰한 술 냄새도 코끝으로 훅 들이친다. 지난 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렇게 아늑한 공간에 찾아들어 잠이 들었나 보다. 웅크린 다리를 톡톡 건드리며 그 남성을 깨웠다. 미동이 없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다리를 흔들어봤다. 늦잠 자는 자식을 깨우는 부모 심정이 이럴까.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등짝 한 번을 세게 쳐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려는 찰나, 드디어 잠자던 숲속의 미녀가 깨어났다. 다른 의미로 그 사람은 살았다.
‘괜찮냐’는 물음에 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씩씩한 목소리로 ‘물론이죠’라고는 대답이 돌아온다. 맨 정신에 만났으면 무척이나 쾌활하고 싹싹한 성격일 것 같다. 다시 한 번 혼자서 집에 갈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아까보다 더 크게 ‘물론이죠’라고 외친다. 빗질에 몰입하고 계시던 아파트 관리원 아저씨도 이쪽을 돌아본다. 무언의 소통으로 아저씨께 길 위의 미녀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동영상과 함께 조잘조잘 풀었더니, 남편이 파하게 웃는다. 어떻게 내 주변에서만 시트콤 같은 상황이 일어나느냐는 표정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나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꼽자면 그렇잖아도 산만한 성격이 운전을 하며 더 증폭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나무이파리 색을 살피고, 어디선가 꽃향기가 느껴지면 멈춰 서서 킁킁대느라, 길 하나도 그냥 걷는 법이 없다. 그런데 운전석에 앉고 나니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긴장하기도 하고 화가 나는 일도 벌어지지만, 이따금씩 그래도 운전을 시작한 보람이 있다 여긴다. 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에 쏟아진 물건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차에서 내려 일사분란하게 치우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기 갈 길을 가는 사람들, 뒷유리창에 정직한 손글씨로 연수 중이라고 써 붙인 초보운전자 뒤를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조용히 따라가 주는 누군가, 비좁은 길에서 상대 차량이 지나가도록 기다려주자 비상등을 깜빡이며 감사 인사를 해주던 또 다른 누군가, 반사등 앞에서 까르륵거리며 단체로 셀카를 찍다가 이쪽을 발견하곤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고 인사하던 귀여운 아이들, 보행자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는데도 다 건너지 못한 어르신을 지켜주던 차량들. 차가운 철제 너머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다. 운전석에 앉지 않았더라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풍경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