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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호근 Sep 19. 2024

어른의 사춘기 2화. 풋내음

S는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 옆 동에 산다. 같은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서로의 이름 정도는 알고 지냈지만, 오며가며 마주쳐도 고개만 갸웃하고 어색하게 지나치던 사이. 그러던 우리가 열 살 가까운 나이차를 극복하고 부쩍 친해지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그날 코트를 입었던 걸로 보아 아마도 겨울과 봄 사이였나 보다. 모임이 끝나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 여러 주제를 고루 두드려보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반려동물이 화제로 올랐다. 나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고양이 남매와 각각 18년과 17년을 살았었고, S는 ‘초코’라는 이름의 13살 푸들을 키우는 중이었다.      


S는 몇 년이 지난 뒤에도 휴대전화 첫 화면에 그대로 둔 내 고양이들 사진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짐작했고, 나는 S를 통해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그립고도 슬픈 시간을 소환했다. S는 초코를 더 가깝고 오래 지켜보기 위해서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을 찾는다고 했다. 동물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S를 응원했다.      


인형처럼 예쁘고 감당 못할 만큼 건강했던 어린 시절은 쏜살같이 흐른다. 나이 든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또 언젠가 헤어진다는 건, 나보다 어린 자식이 나보다 빨리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뜻이다. 매일이 소중하고, 1분 1초라도 더 곁에 있어주고 싶다. 어차피 떠나보내야 한다면 남은 동안만이라도 좋은 기억들만 새겨주고 싶다. 한 번이라도 더 내 반려동물과 눈을 마주치고,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집까지 나란히 걷다 누군가의 집에 다다랐을 즈음 끝나리라 여겼던 대화는 서로의 집을 바래다주기를 반복하다 점심식사로 이어지고, 배가 부르니 커피 한 잔을 마셔야겠다는 핑계로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또 한참 계속되었다. 고령의 반려동물들이 보호자라는 공감대로 엮인 두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주었다. 다 큰 어른들이 100미터 밖에서도 서로를 발견하면, 까치발을 들고 두 팔을 빙빙 휘저으며 반가워할 만큼.      




그날도 함께 집으로 가던 길, S가 갑자기 내 팔짱을 끼고 방향을 틀었다. ‘이리 와. 어두운 데서 할 얘기가 있어.’ 누가 봐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나 역시 '아이고, 예예'하고 무서운 척 응하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가로등 불빛이 어슴푸레 빛나는 골목에서도 달처럼 밝은 얼굴, 얼마 전 S는 작은 텃밭을 분양받았다고 했다. 텃밭은 쭈그려 앉은 자세로 주춤주춤 한두 발짝 게걸음을 옮기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왕복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였다.     


S는 그 작은 밭에 빈틈없이 상추와 깻잎 씨앗을 뿌리고 고추모종과 씨감자를 심고 좋아하는 꽃씨도 살포시 묻었다. 매일 아침 오며가며 출근하듯 자기 밭에 들른다.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흙을 고르고 잡초를 뽑고 물을 뿌리는 일에 그는 온통 마음을 뺏겼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당연한 정직함이 반가울 만큼 삭막하게 살아왔던 탓일까. 정성을 들인 만큼 식물들은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고 꽃과 열매를 맺어주었다. 가족과 초코에게 들이는 정성 못지않게 애정을 듬뿍 실어 키운 수확물들을 S는 자기가 없더라도 언제든 들러 양껏 걷어가라 했다. 하지만 어찌 주인 없는 밭에 도둑처럼 숨어들 수 있을까.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 후로 나는 S의 텃밭에 걸음하는 일이 없었다. 길에서 S를 마주치는 일도 드물었다.    


 오늘 너무 예쁜 풋고추가 있어서 몇 개 챙겨뒀어


대신에 그 후로 얼마 뒤 S의 편지가 우편함에 도착했다. ‘오늘 너무 예쁜 풋고추가 있어서 몇 개 챙겨뒀어’ 텃밭에 나왔다 내 생각이 났다는 S와의 통화를 끝낸 직후, 서둘러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풋고추 3개가 귀엽게 서로를 의지하며 켜켜이 쌓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그날 저녁 칼칼한 된장찌개 양념이 되고, 나머지는 쌈장과 함께 식탁 중앙에 자리 잡았다.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세금고지서나 광고물만 맞아들이던 우편함도 얼마나 신났을까. 그날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풋풋해진다. 나는 잘 지내니 그대도 잘 지내라고, 계절을 들여 써내려간 따뜻한 편지를 받았다. 유독 푹푹 찌던 지난여름은 그래서 내게 싱그러운 초록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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