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직업은 택시기사였다. 오랫동안 일구던 과수원의 주인이었다가 당시 전망이 좋다는 주변의 권유에 홀랑 넘어가 과감하게 시작했던 선과장의 대표이기도 했다가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목 좋은 자리의 중식집 사장님었던 아버지는 택시를 애정했다.
결코 사교성이 좋다거나 영업기술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택시엔 의외로 단골손님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오늘도 객지에서 잘 나간다는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할머니 승객이 깜깜한 빈집의 불을 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운전대를 돌렸고,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온 어르신들이 그날 자신이 어떻게 흥정 실력을 발휘하고 싱싱한 재료를 고르는 안목은 또 얼마나 뛰어났는지 무용담을 쉴새없이 쏟아내는 동안에도 질리지 않고 그저 끄덕끄덕. 갑자기 걸려온 가족의 안부 전화에 직장일로 푸념하는 사회초년생이 탄 택시 안에는 괜찮다고 힘내라고 노래하는 음악이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사연들이었던 걸까. 아버지의 택시는 고해성사를 하듯 날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을 껴안았다.
아버지는 가족에게도 그런 분이셨다.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떼지 못하는 대신 아내의 잔소리를 한참이나 온화하고 잔잔한 미소로 받아내고, 하루종일 과수원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아침저녁으로는 육아에 지친 아내 대신 냄새마저 향기롭다는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의 똥기저귀를 갈아내고 분유를 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은 자기 앞에서 자식들 쪽으로 슬쩍 밀어주고, 학용품마다 한 자 한 자 반듯한 글씨체로 우리 이름을 새겼다. 아버지는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의외로 대범한 가장이었다. 그러므로 IMF 이후 가세는 꾸준히 기울고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마음까지 배고프지는 않았다.
늦은 나이에 낳은 막내딸이 혹여나 늙은 부모님이 창피하지 않을까 싶어, 나의 엄마아빠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눈에 띄지 않은 구석에 숨어 나를 훔쳐봤다. 중학교 3학년 졸업식 날, 친구들이 저마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깔깔거리는 동안 나는 멀찍이 떨어져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교실 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북적거리던 교실의 소란이 가라앉고서야 익숙한 얼굴들이 교실로 들어섰다. 모처럼 아끼던 갈색 코트를 입고 한껏 멋을 낸 엄마가 앞장을 서고, 하루종일 바깥에서 농장 일을 하느라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탓인지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아버지가 엄마 뒤를 따랐다. 엄마 품의 온기를 닮은 꽃다발이 내 품에 안기고, 기분 좋은 향기가 얼굴을 포근히 감쌌다.
반짝반짝 빛이 나네
'아빠가 교실 밖 복도에서 서서 꿈을 꾸는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다, 문득 마음속 소리를 뱉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답지 않은 돌발행동에 놀랐다. 그러면서도 금세 사라질 보물을 붙잡듯 소중히 주워담아 내게 건넸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소녀들 사이에서 아빠는 오직 한 아이만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했다. 그 한 마디로 방금 전까지 한참을 부모님을 기다리느라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마도 가시지 않은 겨울 추위로 교실 안은 냉기가 돌았겠지만, 그날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내 마음에 훈풍이 분다. 인생의 숙제를 끝낸 듯 막내딸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마친 아빠는 그로부터 3개월 뒤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다. 언젠가 우리 가족 모두가 다시 만날 그곳으로. 그러나 아빠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생각했던 만큼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서툰 인간관계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나이만 먹었을 뿐 수시로 미숙함을 드러내는 자신에게 실망할 때,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아빠의 '반짝반짝', 그 한 마디가 마법처럼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된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엔 언제나 세상에서 내가 가장 '반짝반짝' 빛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 남편은 내가 넘어지고 좌절할 때 여기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격려해주는 내 편이다. 돌이켜보면 지독하게 고독하고 삶이 곤두박칠 쳐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나는 늘 깊이 사랑받았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