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J,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사람에게 다가가고 나를 열고 그렇게 사람과 사귀어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첫 학기의 공기가 생경했던 교실이 떠오른다. 지난 한 해 동안 겨우 가까워진 옛 친구들과 헤어졌다. 그 중에 몇몇은 같은 반이 되기도 했지만, 나는 홀로 다른 반으로 배정되어 새로운 교실과 새로운 얼굴들 속으로 들어갔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빈자리를 찾아 앉고서 주위를 둘러봤다. 삼삼오오 모여 벌써 무리를 아이들도 있었고, 어색함을 누르고 서로의 이름을 물으며 의자를 당겨 앉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 작은 교실 안에서는 멈춰선 나와 다른 시간이 흘렀다. ‘오늘 점심은 혼자 먹어야겠다.’ ‘이대로 표류하다 보면 또 1년의 시간이 닳겠지.’ 턱을 괴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던 그때, 나와 똑같은 교복 치마가 앞에 섰다.
우리 괸당이네
내 머릿속의 소란을 끊어낸 한 마디. J였다. ‘괸당’은 제주말로 ‘친척’이라는 뜻이다. 친척? 우리가?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그때 J가 또 말한다. ‘우리 같은 성씨잖아.’ 아, 그런 의미였구나. 친구를 사귈 줄 모르는 내게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준 친구. 그렇게 얼떨결에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J는 지금도 단짝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
학창시절 J는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도 등록금 부담이 적은 대학의 취업이 잘 된다는 과에 들어갔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가정형편에 바로 위의 오빠와 자기 대학등록금까지 모두 감당하기에는 무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더니 갑자기 방송통신대 영문학과를 들어가겠단다. 어디서 탄력을 받았는지 그간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서는 영어를 익히러 연수를 떠났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곧장 대학원에 들어갔다. 예전에 하던 일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공부를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유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지도 교수님의 연구원으로 일하다, 이제는 또 석사전공을 살려 한국 주재 해외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됐다. 스스로 평가했을 때 남들에 비해 부족한 학력이나 경력을, 그는 끈기와 노력으로 메웠다. 대사관 근무 당시 그런 J를 눈여겨보던 외국계기업에서 이직을 제안했다. 해외 본사에서 알게 모르게 겪은 타국에서의 서러움을 견딘 끝에 몇 년 전부터는 한국지사를 맡고 있다. J는 참 열심히 살았다.
J는 ‘난 참 운이 좋다’는 말을 즐겨한다. 워낙에 호탕하고 구김살이 없는 성격인 탓에, 모르고 들으면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고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평탄하게 살았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J는 살면서 무엇 하나 쉬이 얻은 적이 없었다. 분명 사는 동안 여러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고 속으로 삼킨 아픔도 있었지만, 늘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 중에서 좋은 것과 감사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J에게 인생은 늘 신이 난다. 하고 싶은 일투성이다. 매일 매일이 최고의 날이다.
몇 년 전 그 날도 J의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전철역 스크린도어에서 누군가의 시를 발견하고는, J가 떠올라 펑펑 울어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힐끗거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행’이라는 제목의 시 속에 분명히 내 친구가 있었다. 몇 대의 전철이 지나가는 동안 내게도 어쩌면 자기 자신도 다 보이지 못하고 묻어뒀을 쓸쓸함과 때론 씁쓸했을 순간들이 다가왔다 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는 늘 자신의 삶에 당당하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 여긴다. 수많은 불행들 중에서 다행이라는 이름의 씨앗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심어 뿌리내리고야 마는 사람이다. 이렇게나 멋지고 강한 사람이 내 친구다.
J는 기꺼이 내게도 자신의 운을 나눠준다. 정말 사소한 문제를 해결했을 때나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늘 J는 ‘넌 천재야’ ‘넌 역시 대단해’라고 나를 추켜 세워준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20년 넘게 그저 함께 있었을 뿐인 나를 자기가 붙잡은 여러 행운 중의 하나로 끼워준다. 내 인생에 J가 있어 나 역시 다행이다. J에 대한 내 마음도 내 친구 모르게 울었던 그날도 아직 비밀이다. 그게 아무래도 아주 조금 많이 쑥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