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사십을 넘기고도 여전히 부산스럽기만 한 내 안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 그 사이를 정중하게 오가는 방법을 난 아직도 터득하지 못했다. 올 봄과 여름을 지나며 내 가슴은 줄곧 한 사람으로 인해 쿵쾅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A에게 상처를 줬다. 이유는 명확했다. 나로서는 A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A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A는 같은 모임에서 만난 사이다. ‘방향이 같아 모임이 끝나면 종종 함께 집으로 가기도 하고, 우연히 마주치면 알은체하며 기약 없는 다음을 나누는 그 정도의 사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은 A가 다리를 크게 다쳐 한동안 외출을 하지 못하다 한 계절이 지나 봄에 돌아왔다. 그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상대 역시 그러하리라 여겼다. 오랜만에 만난 A는 여전히 나를 반가워했다. 아니 그 전보다 더.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말하고 그 날과 시간은 매번 또 그 언제로 미루는 의례적인 인사려니 했다. 진지한 의도는 없으려니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날을 기다렸나 보다. 자주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내가 가는 곳마다 동행하기를 원했다. 그의 마음이 무거워 뒷걸음질 치는 일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간의 분위기와 태도로 어림짐작하고 있던 A의 마음이 장문의 문자 메시지로 울렸다. 나는 거의 1년 만에 참고 있던 생맥주를 마시며, 남편과 함께 신나게 잔을 부딪던 그 순간에 그 문자를 받았다. 그는 몇 개월간 칩거하며 홀로 감당해야 했던 육체적인 고통과 타인으로 인한 상처를 내게서 위로받고자 했다. 늘 곁에 있는 단짝으로 행동하지 않은 내게 서운해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핑하고 선 하나가 끊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원했던 맥주가 더 이상 한 모금도 넘기기 힘들 만큼 썼다.
나는, 여태 A를 견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받기가 불편했다. 이런 내 마음을 전해야 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지금의 불편함이 미움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떤 단어를 고르고 어떻게 문장을 채워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거렸지만 정답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하더라도 A는 상처받을 테니. 날이 밝고서야 그 사실을 인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단어를 빌려오려는 노력을 멈췄다. A가 보내온 것보다 더 긴 글을 썼다. A가 오해하고 있던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내가 그의 위안이 될 수 없음을 고백했다. 몇 시간 뒤 A는 자신의 감정에 응해준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 다음 날도 A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좋은 구절이 적힌 꽃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왔다. 메신저를 열면서 숫자 1이 사라졌지만, 그전과 달리 말풍선에 어떤 표정도 달지 않았다.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상했다. 발목을 붙들던 관계가 나름 끝을 맺었는데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A에게 보낼 문자를 붙들고 잠들지 못한 밤이 생각났다. 신중하지도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몇 달을 고민했다. 생각할수록 점점 더 괴로웠다. 나에게 솔직해져 보니, 원인이 보였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말을 다듬고 골라냈던 이유는 A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집착이 일으킨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인간관계에 서툴다. 누구에게도 주목받고 싶지 않지만, 아주 잊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깊이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적당히 좋은 사람이기를 즐겼다. 그렇게 잘 유지되고 있다 여겼던 내 안의 균형이 사실은 허울뿐이었다는 걸, A를 통해 각성했다.
그 즈음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인간관계가 어렵다며 칭얼거리는 내게 누군가 말했다. 인간관계의 무게와 소란도 그 안에서 견디고 해결해야 한다고. 그게 무슨 뜻일까 곰곰이 되새겨봤다. 사회적인 상식 안에서는 서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위해 또 서로를 위해 거절할 필요도 있다, 그런 의미로 들렸다. 그랬다. 나는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상대에게 맞추면서 갈등 상황을 모면했다. 나쁜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을 단초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를 A가 흔들었다. 당황스러웠다. A의 눈에 비친 내가 보였다. 나는 A에게 편한 사람이었다. 일방의 배려로 유지되는 관계는 한계가 있다. 이쪽에서 손을 놓으면 언제라도 사라지는 관계이므로.
배려하는 쪽은 기다린다. 상대를 이해하고 품으려고 애쓰며 드물게라도 상대 역시 나를 존중해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대체로 일방의 배려는 당연해진다. 더 큰 마음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을 거절했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 나에게 충실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모두 대체로 상냥하고 때때로 이기적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히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꽉 움켜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도 하고, 잠시 스칠 것 같았지만 내내 머무르는 인연도 있다. A와 나는, 인생의 어느 순간 방향이 같아서 함께 걸었다 다시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인연이었던 까닭이다. 그냥 그랬던 거다. 지나간 시간은 과거에게 돌려주고, 내일을 도모해야겠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독과 고달픔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당당하게 내 몫의 하루를 나를 닮은 시간으로 물들이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