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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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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Dec 17. 2024

땔감



온기 혹은 한기에 대하여 어떤 시간들을 건너왔는지 천천히 한 가닥씩 기억의 실밥을 풀어본다. 그렇지. 학교 갈 무렵 할머니 손에 들려있던, 새벽부터 밥물 넘치는 아궁이 부뚜막 위에서 서서히 따듯해진 운동화가 그랬지. 할머니는 내가 아침밥을 먹을 동안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운동화를 이리저리 뒤척이셨지. 그 운동화를 신고 눈 쌓인 마당에 처음 발을 디딜 때의 아득하고 기분좋은 온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식어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때의 온기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지. 또 벙어리장갑도 그랬지. 어머니는 밤새 파란색 낡은 스웨터를 풀고 풀어 털실로 벙어리장갑을 짜주셨을 때, 장갑 양끝에 굵은 털실로 줄을 이어 목에 걸어주던 어머니는 사라진 스웨터 대신 신이 나서 장갑을 끼고 뛰어다니던 내 모습을 보며 웃으셨지. 그땐 눈싸움만 하면 왜 그렇게 손이 시렸는지, 왜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은 그렇게나 금세 젖어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때처럼 춥지 않다. 양말을 두 겹으로 신고도 발이 시려서 두툼한 내복을 껴입고도 움츠러들어서 급기야 코를 흘리고야 말았던 그때처럼은 춥지 않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때처럼 따뜻하지도 않다. 이제 양말은 하나만 신고 다니고 내복은 잘 입지도 않는다. 눈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에 손이 젖을 일도 없고 추위에 코를 흘릴 겨를도 없다. 손도 그리 시리지 않기에 주머니에는 핫팩이나 휴대폰을 넣고 이따금씩만 조물딱거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가 더 따뜻했다.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외롭거나 대체로 행복하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쩌면 가시처럼 품고 있는 쓸쓸한 기억들을 대체할 등가교환물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동안 건너왔던 무수한 이름과 풍경, 아득한 시간, 이것들을 이어나갈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는 동안 어찌 한 번도 없었을까. 때로는 더 살가운 일이 일어났을 것이고 때로는 더 깊은 곳에 묻어둘 만한 이름이 생겨났을 법도 한데 도무지 웅크리고만 살아간다. 스스로 빙점에 서있다. 해빙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리라. 대체로 행복한 이들은 빙점에 서 있되 가슴속의 온갖 것들을 땔감으로도 쓸 줄 아는 마음의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 다만 다른 뿐이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외롭거나 지속적으로 행복하기만 한 생애가 어디 있으랴. 인어공주나 허클베리핀에서나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냉탕과 열탕을 왕복하며 살아내는 것, 쓸쓸하기도 외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행복하기도 한 것이 생의 묘미이자 정해지지 않은 어떤 소실점 같은 것은 아닐까도 싶다. 오래된 농담처럼 희망도 통증도 과거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나는 버릴 수 없는 온기 혹은 기억들이 옹졸하고 부박한 내 삶의 아궁이에 군불을 지필 수 있는 땔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과녁을 맞히려면 과녁 위를 겨냥해야 한다. 모든 경로가 직선일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하면, 늘 생각을 하면, 다습한 상태로 저려오는 그것들을 나는 땔감으로 쓰기 위해 오랜 시간 바작바작 말리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남몰래 훌쩍이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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