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거야. 어떤 날 어떤 그대가 나를 떠나며 말했다. 그때 나는 우습게도 카페 안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오만과 체면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유령처럼 다시 되살아났다. 이럴 때는 사라사테 같은 비련에 어울리는 곡이 흘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생각과 생각 사이로 파리가 한 마리 날아다녔고 그대가 먼저 나간 뒤 나는 한동안 그 카페에 앉아 이별과는 상관없는 잡생각들을 했다. 커피를 한 잔 더 마신 후 일어서다가 나중에 발견한, 그대가 놓고 간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은 어떤 메시지를 포함한 의도였는지 아니면 뜻밖의 유실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가만히 노래를 듣는다. 거미줄처럼 위태롭고 약하게 짜여져 금세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수척한 감정의 결들을 들여다보며 무심코 무작정 짠해져만 간다. 한껏 애절해진다. 영화나 노래에 심사를 섞는 일, 그러니까 시청각적 이미지와 심상에 자기 마음을 대입하는 일은 때때로 치명적일 수 있지만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들으면서는 일말의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처음 이 노래를 들은 건 친구가 노래방에서 흠흠 목을 풀면서 뻔하고도 생소한 제목의 노래를 선택했을 때였고, 나는 적당히 느긋한 자세로 앉아 천천히 하이네켄을 마시며 그럴듯한 멜로디를 타고 퍼져 나오는 노랫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곤 이내 친구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완성되는 노래의 속풀이에 술이 깨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조금 놀란다. 혼자인 여자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남자가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도 있다. 남자가 묻는다. 여자는 도통 말이 없다. 다만 혼잣말만 울려 퍼질 뿐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혼자가 아니에요. 사랑쯤은 이미 하고 있어요. 남자는 눈치 없이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겠지만 외로움이 엿보이는 여자는 점점 더 가슴이 아파온다. 차마 말을 할 수 없지만 속마음은 몇 곱절 더 큰 소리로 자기의 순정을 항변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비밀 같은 일이기에 입밖에 낼 수는 없지만 그 사람 바로 당신이라고. 내가 조금쯤 놀란 것은 노랫말이 가진 반전의 서사와 모두가 지나왔을 서글픔의 팩트 때문이기도 했지만 찌질한 속앓이를 하면서도 욕심내지 않겠다며 그냥 혼자만의 사랑 쪽에 서는 쓸쓸한 체념이 완성해 가는 서글픈 자학의 다정함 때문이다. 꼭 숨겨 둔 사랑, 자신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 자기 마음을 인내하며 바라보기만 하는 애틋한 연정이 마치 혈관을 타고 돌듯 내 마음을 가렵게 한다. 노래가 가려운 건지 쏟아내지 못하는 내면이 헛헛한 건지 점점 알 수가 없어진다. 다정한 마음과 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그러나 기대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꼭꼭 숨은 다정이 아차 하면 다시 또 누군가를 천천히 죽일 것도 같다.
다정이 나를 / 김경미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계절의 징후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누군들 안타까운 외사랑 한 번 없었으랴, 누군들 지난날 아무도 모르게 피고 지던 슬프고 다정한 마음 어디 없었으랴. 가녀린 여자의 떨리는 입김이 느껴지는 속앓이는 이은미의 질그릇 안을 휘돌고 나오는 음색으로 혼자 하는 사랑을 조금 더 꿋꿋하게 만든다. 노래 이후 제법 따라 부른 이들이 많지만 그녀의 애인 있어요만큼 나를 매번 진탕 시키지는 못한다. 멋진 애인 내 속에 있지만 가지려 욕심내지 않는 하나의 지극한 마음이, 교직 하지 못하고 발만 구르는 숨죽인 온기가, 슬프지 않다며 끝내 속울음만 터뜨리는 역설과 반어 때문에, 자기 욕심만 등에 지고 막무가내로 사랑해 달라 졸라대던 내 미숙한 떼보심보 위로 차분히 내려앉고 또 쌓여가는 쓸쓸한 복음 같다.
https://youtu.be/Of9r7ZLcLz8?si=04_a8Lu1JwM522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