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여우난곬族 / 백석
명절날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개는 나를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있는 큰집으로가면
얼굴에벌자국이솜솜난 말수와같이눈도껌벅걸이는 하로에베한필을짠다는 벌하나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많은 新里고무 고무의딸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넘은홀아비의 후처가된 포족족하니 성이잘나는 살빛이매감탕같은 입술과 젖꼭지는더깜안 예수쟁이마을가까이사는 土山고무 고무의딸承女 아들承동이
六十里라해서 파랗게뵈이는山을넘어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된 코끝이빩안 언제나힌옷이정하든 말끝에설게 눈물을짤때가많은 큰곬고무 고무의딸洪女 아들洪동이작은洪동이 배나무접을잘하는 주정을하면 토방돌을뽑는 오리치를잘놓는 먼섬에 반디젓담으려가기를 좋아하는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할아버지가있는 안간에들뫃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내음새가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내음새도나고 끼때의두부와 콩나물과 뽂운잔디와고사리와 도야지비게는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저녁술을놓은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하고 숨굴막질을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시집가는노름 말타고장가가는 노름을하고 이렇개 밤이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깊어가는집안엔 엄매는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웋간한방을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화디의사기방등에 심지를 멫번이나독구고 홍게닭이멫번이나울어서 조름이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하며히드득거리다 잠이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 새의그림자가치는아츰 시누이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끄리는 맛있는내음새가 올라오도록잔다
벌자국 : 곰보 자국 / 포족족 : 빛깔이 칙칙하고 파르스름
매감탕 : 엿을 고아 낸 솥을 씻은 단물, 또는 메주를 쑨 솥에 남은 걸쭉한 물
이녀(李女) 승(承)동이 홍녀(洪女) : 아버지 성을 따라 딸은 'ㅁ녀', 아들은 'ㅁ동이'라 부름
오리치 : 평북 지역에서 야생 오리를 잡는 데 쓰는 둥그런 갈고리 모양의 올가미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 저녁밥 / 섶 : 옆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 웋간 : 웃간
조아질 : 공기놀이 / 쌈방이 : 평북의 토속 풍물 / 바리깨돌림 : 주발 뚜껑놀이
제비손이구손이 : 서로 다리를 끼고 노래 부르며 다리를 세는 놀이
화디 : 등잔걸이 / 사기 방등 : 사기로 만든 등 /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추녀 처마끝 / 무이징게국 : 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여우난곬족은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한 후 1936년 1월 백석의 시집 '사슴'에 재수록된 자유시로 산문시 형태로 쓰였다. 명절을 쇠러 큰집에 가는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온 식구들 북적하니 어우러지는 모습을 호흡이 무척이나 긴 문장들을 통해 향토적 어휘와 살가운 공동체의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백석 초기 시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신문기자로 경성과 표준어에 잘 적응했던 백석이 굳이 고향 평안도 방언으로 시를 쓴 이유는 언어적 특성 때문이다. 시 속의 방언들은 표준어에 익숙한 이들에게도 시각적 효과를 주는데 알 듯 모를 듯 이어지는 시어들의 운율로 인해 그 뜻을 더 깊게 고민하고 상상하게 된다. 그것을 낯설게 하기라 하는데 이런 기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시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할만하다. 시는 고향땅 일가 혈족의 공동체적 삶에 배어있는 평안과 풍요 더불어 그리운 정취까지 산문적 서술로 나타내고 있는데, 유년의 화자가 명절 분위기를 관찰자적 시선으로 보편적인 한민족 삶의 원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품이다.
마치 산골 대가족의 명절맞이 다큐를 보는 것 같다. 화자인 나는 엄매 아배를 따라가고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졸졸 줄지어 큰집을 향하는 장면을 상상의 동화처럼 보여주며 서사가 시작되고 이어 명절에 모인 20여 명 일가들의 생김새와 삶의 모습을 회화적인 풍경으로 형상화한다. 다음으로는 안방에 그득히 차려놓은 명절 음식을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데 정감 있는 방언과 화자의 시선을 통한 현재형의 반복적 생동감을 전하고 있다. 친족 일가의 명절 풍경을 아침부터 낮과 저녁, 밤과 아침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기대어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 잊혀가는 민족 전통의 유대와 정서의 회복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데, 이후 백석의 후기 시에서 이러한 모습은 고향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강한 애착과 의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독자들에게도 지금처럼 낯설었다는, 거의 암호에 가까운 평안도 방언을 들여다보며 행간마다 정감과 서정적 마음이 포개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와 새우젓갈로 만든다는 무이징게국 맛도 한번 뜨겁게 호로록 맛보고 싶어 진다.
가즈랑집 / 백석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즘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즘생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께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달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 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한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 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 ‘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깽제미 :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안초 / 구신집 : 무당집
구신간시렁 :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위에 널빤지 선반을 메고 위하였음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제비꼬리 : 회순, 식용 산나물의 이름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둥글레우림 : 둥글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시집 '사슴'의 목차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시가 '가즈랑집'이고 두 번째가 '여우난곬족'이다. 애착의 순서라면 무리겠지만 그만큼 마음이 가던 시들이었을 것이다. 두 편의 시는 모두 유년을 회상하고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투리와 농촌을 매개로 민족적 정서를 깊이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백석의 사투리 구사가 단순히 향토적 색채를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의 연대 의식을 끈끈하게 지탱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서 민족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우리말의 보존이었음을 상기할 때, 백석의 시는 그 누구의 작품보다도 우리네 정서와 한과 삶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가즈랑집은 토속어와 토속신앙이라는 두 가지의 장치가 얽혀있어 조금이라도 이해가 쉽도록 최대한 현대어로 실었다. 화자는 시작부터 '승냥이가 새끼를 낳아 포악해지기 전까지는 쇠메를 든 시커먼 도적이 나기도 했다'는 가즈랑고개를 언급하며 긴장감을 부추기고 있다. 그 깊은 가즈랑고개 밑에 살던, 으슥한 고개보다 조금 더 무섭기도 하고 이제는 그립기도 한 가즈랑집 할머니를 시작으로 시적 화자는 유년의 기억을 가져온다.
이제 급격하게 쇠퇴의 길을 걷는 조선의 무속 신앙을 전근대, 비합리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신장(神將)의 딸인 가즈랑집 할머니를 묘사하고 그리워하며 연민의 정서를 드러낸다. 이는 백석의 어머니가 그의 건강을 기원하며 정화수를 떠놓고 기원하던 토속적 샤머니즘에 비추어 생각할 때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을 시인에게, 마을 사람들의 생사에 개입하고 공동체의 통합에 기여했던 속신(俗神)의 세계는 스산한 거부감이 아닌 다소 친화적인 풍경일 것이라 생각된다. 무섭기만 하던 가즈랑집과 생판 남이었을 마녀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화자의 유년과 만나며 어린 날의 음식들과 놀이와 사소한 걱정들마저 안아주던 누구보다 다정했던 할머니로, 친근하고 아릿하게 저려오는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해주시던 산나물 달큼한 맛도, 도토리범벅도,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고 살구벼락을 맞아 울다가 웃던 것도, 가즈랑집과 함께 화자의 안식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삶을 굳건히 이어가던 할머니의 삶까지 포함해서 후일 백석 자신이 회복해야 할 굳고 정한 갈매나무에 편입되는 것이다.
1940년 1월 만주 신경에 도착한 백석은 시영주택 황씨방의 작고 좁은 골방에 세 들어 살며 만주국 경제부에 취업을 하는데 그의 업무는 측량 보조원이었다. 당시 신경 건설을 위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측량사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특채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당대의 모던보이로 경성을 쏘다니던 백석의 방랑생활은 그야말로 혈혈단신의 헛헛하고 처량한 삶의 잔혹사로 더욱 침잠하고 있었다. 애써 시 쓰는 일과 직장 일을 병행하지만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당시 세 들어 살던 황씨방은 음습한 토굴과 진배없어서 그는 자주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녔다고 한다. 백석이 러시아어를 배웠다지만 통역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러시아 마을에 머물며 꾸준히 배우지 않으면 안 됐다고 한다. 6월부터는 만주 생활 속에서도 '목구',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허준' 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가을에는 자신이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위해 경성에 다녀가기도 했으며, 1941년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발표한다.
1942년 만주 안둥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겼고 해방 후에 신의주로 귀국했다가 본능처럼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그의 삶과 문학의 향방을 결말지을 비극적 분단을 맞는다. 어느 사이에 싫든 좋든 오도 가도 못하는 북한에 속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허준은 백석이 해방 전에 쓴 시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말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었다. 1948년에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는데 이는 언급한 대로 남쪽 잡지에 마지막으로 백석의 흔적을 전하는 시였다.
한용운과 김소월이 1920년대 한국시를 견인했다면 백석과 정지용은 30년대를 특히 인상 깊게 하는 독특한 시세계를 꽃피우던 시인들이라 할 수 있다. 10살 형뻘인 정지용이 동양적 산수시의 진수를 서구적 감각의 고유어를 통해 보여주었다면, 백석은 향토색 짙은 방언과 토속적 정서를 기반으로 인간과 민족문화를 탐색하고 지향했다. 또한 선배들인 소월과 목월, 지용 등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주춧돌 위에 참신하고 새로운 시적 화법으로 단단하고 야무진 기둥 몇을 세워 한국 시의 세계를 넓히는데 기여했으며 다시 후배인 윤동주, 신경림 등으로 흐르게 했다. 화가 이중섭도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그의 시는 토착어인 방언의 한계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투박하지만 정제되어 있고 독특한 운율이 있는 한국적 서정과 시적 내력으로 모국어의 영역을 확장시켰으며, 경험적 자아를 내세워 우리말의 구문이 가지는 무한한 언어의 의미를 자유롭게 했던 것이다.
6.25 전쟁 전후로 후배 고정훈이 백석에게 몇 차례 월남을 제의했지만 백석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로는 고당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하는 일과 월남을 하게 되면 북에 있는 많은 일가친척의 고초가 뻔한 일, 남쪽에 생활 터전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말을 전했다고도 한다.
그의 시 세계에서 가족과 친지, 그리고 고향이 의미하는 바가 남달랐음을 생각하면 그 막다른 벽의 선택이 충분히 짐작이 가기도 한다. 이후 고당의 비서를 그만두고 칩거하며 집에서 각국의 소설과 시를 번역했다고 한다. 소련군과 함께 김일성이 들어오자 환영행사에서 러시아어 번역을 하기도 했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어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집중하며 북한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백석의 시어는 보이지 않는다, 1958년 당의 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강도로 추방되었고 이후 아동문학과 관련하여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 하자'는 주장을 펴다 숙청을 당해 1962년 이후로는 북한 문단 어디에서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다. 1996년 사망하기까지 30년 넘게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늙어간, 빛 나던 시절을 뒤로한 채 외롭고 쓸쓸했던 백석의 연대기는 여기서 멈춘다.
북의 아내 리윤희에 따르면 백석이 사망 열흘 전 감기에 걸려 갑자기 사망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진실을 알 길은 없다. 다만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던 그의 마음만이 겨울 들판을 하염없이 굴러다닌다. 더불어 백석이 죽기 전 빛을 잃은 처연한 눈빛으로 유언처럼 남긴 말이 '지금까지 내가 쓴 원고를 모두 불태우라'는 말이었다니, 이제 영영 백석도 나타샤도 힌당나귀도 감매나무도 여우난곬족도 사라져 간 허공에 체증 같은 것을 울화 같은 것을 실어 보낸다. 그는 월북 시인으로 규정되어 모든 것이 금지당했으나 1988년 해금되며 우리 문단과 학계를 뜨겁게 달구게 된다. 해금 이후 백석 연구 논문만 천여 편이고, '사슴'은 시인들이 뽑은 지난 백 년 한국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이 되었다. 백석에게 고향은 비록 재물이 넘치진 않았지만 안온한 숨쉬기이며 신화 속 풍경이며 유대와 친밀함의 우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서글픔 앞에서 이미 상처 나고 잊힌 기억 속의 궁전이었다. 그의 시가 유년의 향토적 서사를 가지는 것도 이러한 고향과 동족의 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의지이자 슬픈 희망이 아니었겠는가.
이렇듯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뜨거운 정맥은 단지 고향이었다. 단지 그리움이었다. 단지 사랑이었다. 이렇게 쓰고 떫고 맵기도 하여 마냥 서글프기도 하여 당나귀처럼 우리의 두 눈 두 귀를 뎅글하게 만들고 떠나간 이, 한량없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다가 사라져 간 이, 사시사철 이 세상에 눈이 푹푹 나리게 하는 그리운 이름. 어느 겨울의 춥고 쓸쓸한 날, 그 이를 오래 생각하고 생각하며 오래된 연서를 마친다. 그 이름 백석이고 사랑이고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