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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Dec 06. 2024

내 사랑 백석

외전 / 내가 바로 나타샤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1995년 자야의 이름으로 펴낸 산문집 '내 사랑 백석'이 세상에 나왔을 때, 장안에는 지극하고 슬프고 저린 사랑의 회고록에 감동 어린 눈물과 박수가 이어졌다. 백석의 문학과 생의 경로에 대하여 짧고도 길었던 시간을 건너오면서 부러 백석의 사랑 이야기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백석의 사랑이 함박눈처럼 꽃잎처럼 그의 작품에 나타샤로 승화한 것이지 여인 자체로 인해 그의 문학이 넘을 수 없었던 커다란 담장을 넘었다 할 만큼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은 아니라는 개똥철학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아름다운 사랑의 순애보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면 온갖 환상과 착시가 난무하는 것들에 대해 한 번쯤 슬며시 들여다보는 시간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백석의 생을 스쳐간 여인들과 더불어 백석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는 어떤 의미인지 정말 실존했는지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여자는 또 누구인지에 대해 백석의 연애가 들어간 시들과 함께 따로 한 상 차려보기로 한다     


자야는 앞서 소개했듯 권번출신 김영한의 호다.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1932년 여창 명인 김수정의 안내로 16살의 나이에 조선권번의 기생 진향이 되었고 한국 정악계의 큰 별이었던 하규일 선생의 넷째 양녀가 되어 여창 가곡, 궁중무 등의 명인으로, 한편으로는 그 옛날 황진이의 환생처럼 잡지 <삼천리>에 김숙이라는 필명으로 수필 '눈 오는 밤' 등을 발표하기도 하며 `문학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런 자야와 백석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서러움과 그리움으로 '내 사랑 백석'을 통해 뭇사람들에게 알려지자 그녀의 순애보는 많은 이들이게 감동을 주었고, 후일 그녀가 법정스님과 인연이 되어 평생의 재산 천억에 달하는 대원각 요정 전체를 기부하며 남겼다는 '천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던 유명한 일화는 뜻밖의 울림까지 주었으니 이는 길상사 건립과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무대에 올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자야라는 호는 백석이 지어 주었다고 전하는데 이 이름은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으로, 백석이 당시에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신빙성이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자야가 죽기 하루 전에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던 마음만이 처연해진다.    




出아 出아, 인출(寅出) 선생!

엊지다 글은 쓰라고 하시어서 없는 박식 쥐어짜느라 비지자루만 터져버리고 고갈된 창고에 그나마 중언부언 잠꼬대 같이 써놓고 보니 내가 살아온 고난의 생애에 외로웠던 여로 중 돌이킬 수 없는 가장 값진 아름다웠던 청춘을 영상으로 비치어보는 생생한 환상. 뜨거운 정열의 불꽃 튀는 두 청춘. 한데 묶어 뒹굴어보는 이 추억. 늦게 얻은 큰 보물입니다. 소중합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청춘이 그리워 사랑이 그리워 가슴이 터지도록 흐느낄 때 구천에 계신 백석(白石) 선생도 뜨거운 눈물을 지었고 지상에서는 인출(寅出) 선생만이 처절한 두 사람의 흐느끼는 소리 가슴 아파 하시었지요. 그런대로 솜씨 내시어서 잘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본래가 가정교사를 믿고 쓰는 글이 아닙니까. 노고를 빌면서.


노소녀(老少女) 자야(子夜) 서(書) 1994년 1월 8일 인출(이동순의 아명)에게 보낸 편지  



1987년 백석시선집을 펴냈고 이때 자야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 길고 긴 인연으로 이어지다 95년 자야의 이름으로 펴낸 산문집 '내 사랑 백석'을 집필한 시인이자 교수인 이동순은 이렇게 전한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를 할 때, 함흥권번 소속 기생 진향(眞香)과 인연을 맺어 눈 펄펄 오는 북방의 겨울밤, 서로의 하숙을 바래다주며 밤샐 정도로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했다. 따로 떨어진 것이 너무 고통이라 둘은 곧바로 동거생활로 들어갔다. 1930년대 후반 함흥의 20대 청춘의 불타는 사랑, 당돌하고 급진적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청년 시인 백석은 애인에게 팔베개하고 누워서 일본 시집을 잔잔히 낭송해 주었다. 그 다정한 소리를 들으며 님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백석은 애인에게 ‘자야’란 애칭을 썼다.> 절절한 애틋함이다. 물론 이 교수도 많은 연구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렸겠지만, 산문집의 대부분은 자야가 이 교수에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들려주던 물기 어린 회억들과, 수취인은 있지만 받을 이가 없는 회한과 투정의 편지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자야적인 시선과 서술을 보며 역시 그랬었구나 싶을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야의 주장대로 백석 필생의 연인이었다는 말은 상당 부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심지어 백석의 주변인들은 자야의 사랑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하고 있다. 백석은 당시 까탈스러운 모던보이로 요즘의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렸고 그와 관련된 염문은 자연스럽게 장안의 화제로 퍼져나갔는데, 일례로 백석이 박경련(란)을 좋아하던 일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백석이 좋아했던 여자들은 하나 같이 명문학교를 다닌 신여성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일이다. 한편 자야로 인해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고 일정기간 사랑에 빠져 동거를 한 것은 분명하다.  조금 더 냉정하게 보자면 오랜 시간 백석을 연구한 송준은 <김자야를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백석에 관한 그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작은 질문을 해도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며 책에 적었고, 자야가 대단한 부자였음에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했다. 심지어 나중에 이동순 교수조차도 <자야 할머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자기를 노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야 할머니는 나 말고 누가 있겠어라고 말했지만 글쎄, 남자 마음속은 모른다.>며 진짜 속마음을 에둘러 이야기한다. 그 당시는 편지가 주된 소통수단이었기 때문에 백석은 지인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남겼으나, 자야에게는 흔한 편지 하나 지닌 것이 없으며 재력이 흥할 때에도 타향의 곤궁한 백석을 위한 어떤 도움도 움직임도 없었다는 점 등은 주목해 볼 일이다.      

         

조선일보에 입사한 백석은 당시 기자였던 신현중과 친하게 지냈다. 이듬해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이화여고에 재학 중인 박경련(란)을 천형처럼 만나게 되는데 24살의 청년 백석은 18살의 어여쁜 그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백석은 통영을 매우 좋아했다. 바로 통영에 그가 연모하던 란이 살았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통영' 연작시 3편을 썼고 후일에는 시비도 세워졌다. 통영 바다를 보면서는 '바다'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당시 백석의 마음은 주변인 모두가 알 정도였으나 평생의 구원이 되어 줄 것 같았던 란과는 이어지지 못한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동제의 시와 그 밖의 다른 시 '바다' '이렇게 원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을 노래로 만들어 자야와의 사랑을 더욱 애절하게 그렸지만, 시 '바다'만 보아도 통영 바닷가에서 박경련을 생각하며 쓴 연가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착시를 자꾸 부추기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도 매한가지다. 간혹 '바다'가 자야를 생각하며 쓴 시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시기와 상황과 장소를 생각하면 설득력이 약하다.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지중지중 : 걸음걸이를 멈칫 하듯 서지 않고 천천히 걷는 모양새

개지꽃 : 나팔꽃  /  개지 : 꽃나무에 피지 않은 꽃  /  쇠리쇠리 : 눈부시다






통영(統營)1 /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둥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예전에 천희는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라는 뜻, 바닷가의 시집 안간 여자를 천희라고도 불렀음 






1935년 12월의 통영 시에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부분에 백석 심정의 전부가 들어있지 않나 싶다. 일렁이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백석은 몇 차례 통영을 찾았으나 란을 만나지 못했고 청혼도 승낙받지 못했다. 백석이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을 하자 박씨 문중 사람들은 한편으로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었고, 이 무렵의 신현중은 이미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내심 박경련도 좋아하고 있어 백석을 배반하기에 이른다. 요즘 말로 하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와 다름 아니다. 신현중은 박씨 집안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거나 첩의 자식이라고 백석을 헐뜯으며 본인이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다 애원하였고 그녀의 어머니 서씨와 외삼촌이었던 독립운동가 서상호의 믿음을 배경으로 마침내 자신의 약혼녀와 파혼을 하고 백석이 그렇게 염원하던 그녀와 짝이 되었다. 백석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고 후일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온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굳이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는 허탄한 심정을 쓰기도 했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는 박경련을 향한 야속한 마음과 더불어 친구 신현중에 대한 서늘한 심사를 적고 있다. 백석이 실재하는 인물을 이렇듯 구체적으로 반복하며 되뇌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포근한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事)'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따디기 : 한낮의 뜨거운 햇빛 아래 흙이 풀려 푸석푸석한 저녁 무렵      






통영(統營)2 / 백석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이렇듯 뜻하지 않게 박경련이 친구였던 신현중과 결혼한 후에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제자인 김진세의 여동생을 마음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징글징글한 그놈의 사랑, 잘난 사람에게는 참 끊임없이 샘솟듯 마르지가 않는다. 어떤 모지리의 사랑시를 보면 밤낮없이 퇴짜만 맞던데. 아무튼 그 김진세의 여동생은 널리 인근까지 소문난 미모의 여인으로 함경남도 영흥에 살았으며 집안 또한 지방에서는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어느 날 작심을 하고 정식으로 청혼도 했지만, 박경련 때와 마찬가지로 백석이 함흥의 기생 자야와 동거한 것이 청혼을 거절당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또한 소설가 최정희와 더불어 시인 노천명, 모윤숙과도 자주 어울렸는데 그녀들은 평소에도 백석을 사슴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최정희는 백석에게 대놓고 열렬하게 사랑을 구하지만 백석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2001년 '문학사상'에는 최정희가 백석에게 받은 편지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힌 편지도 받았다고 하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라며 은근한 내심을 전하지만 자야를 비롯해 이 시를 받았다는 여성이 더 있기 때문에 애매하고 모호하다. 여기까지가 백석이 시인으로 활동할 당시 알려진 주변 여인들로, 모두 그럴듯한 신여성들이다. 이후 시간이 가면서는 나도, 나도, 하며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여인들이 더러 나오기도 한다. 

              

백석은 평생 구원이 될 나타샤를 찾지 못하고 모두 네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언급한 바 각각 고향 정주와 충북 진천의 여인으로 하나 같이 얼마 가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데, 첫 번째 결혼은 와전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 후에 신현중은 친구를 배반하고 박경련과 결혼을 한 일말의 미안함과 서먹함을 풀고자 백석을 가회동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는데, 그때 박경련은 너무 놀라 옆집으로 달아나 버렸고 백석은 그로부터 얼마 후 두 번째 파경을 맞이한 탓에 그 이면에는 박경련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들도 있다. 

  

1940년 안둥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염상섭이 백석을 안둥세관에 소개를 해주어 백석이 그곳으로 옮겨가는데 그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난 문경옥과 1942년 평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안둥에서 살림을 시작한 것이 세 번째 결혼이다. 평양의 유명 변호사인 문봉의 서녀로,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으나 급작스러운 유산과 더불어 고부갈등이 심해 다시 이혼을 한다. 이때의 처제 문경랑의 일화를 지인인 작가 김자림은 '부르지 못한 이름 당신에게'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집에 놀러 갔는데, 형부가 지금 건넌방에서 주무시니 웃음소리도 크게 내서는 안된다고 하며 '말 마, 얼마나 신경질인데. 가랑잎에 불이야. 시인은 다 그렇대나. 우리 언니가 가엾어. 저런 병적인 남자하고 어떻게 사누. 나 같으면 하루도 못살아. 빽빽 파랗게 소리만 자르고.' 그나마 얼마 후 언니가 이혼을 했다며 시인에게 심한 욕을 퍼부었다. 그 후부터 '시인은 병적인 신경질'로 단정해 버렸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심히 매우 몹시 괴팍하니 무안한 마음에 큼큼 헛기침만 나오지만, 아무튼 백석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그 후 해방 무렵 만난 리윤희와 네 번째 결혼을 했으며 3남 2녀를 두고 50년 넘게 해로했다. 마지막 정착인지 진정한 반려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윤희와 평생을 함께한 백석은 숙청당한 1962년부터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일절 펜을 꺾은 채 삼수군 농장의 농부로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들려오는 소식도 없이 잊힌 듯 살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농부로서의 백석 



백석을 만나고 교류했던 여성들은 어김없이 스스로 백석의 나타샤가 되어 가슴을 여미는 순간을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여러가지 상황과 사실적 토대를 염두하여 굳이 말을 하자면 나타샤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백석이 마지막까지도 시에 적어가며 그리워했던 통영의 란 박경련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나타샤가 김여인이든 박여인이든 하다못해 최여인이든 그것이 어떤 중차대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러시아 문학에서의 나타샤는 우리의 순이와 영희처럼 보편적 여성을 대변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백석이 이루지 못한 구원적 존재로서의 상징을 나타샤라 칭하여 이상향을 표현했다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백석의 문학은 그처럼 찬연하게 빛나고 아름다웠지만 이야기를 맺는 지금 백석의 사랑도 문학처럼 오롯이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다. 이제와 생각하면 혹여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해로한 마지막 아내가 백석에게는 어쩌면 알려지지 않은 나타샤의 현신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 시인이 나고, 사랑을 하였으며, 오직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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