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이 이 땅을 떠나 떠돌이가 된 직후 1941년 <문장>에 발표된 '흰 바람벽이 있어'를 들여다본다. 마치 하루에 한 번 지나가는 옛날버스를 타고 먼지 나는 시골길을 덜컹거릴 때 바깥으로 흑백영화의 필름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다. 웃풍이 심할 것 같은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채 좁다란 방구석 안에 영락없이 갇히고 만 심정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화자의 시각적 고백으로 형상화되고 있는데 시네포엠 안에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혼재하는 와중에도 화자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시어들은 가난하고 쓸쓸함에 갇힌 신세를 대변하고 있다. 화자를 가두고 단절시키는 매개로 흰 바람벽을 세우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에 이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괴로움까지 들춰내고 있어 화자의 심정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형이 아닌 진행형의 모티브를 여과 없이 나타내 사랑하는 여자가 지금쯤이면 지아비와의 사이에 아마도 어린것까지 있을 것이란 청승과 궁상이 넘쳐흐르는 다소 참담한 상상을 보여준다. 백석은 신현중과 박경련이 맺어진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실제로 그의 세상에 선명한 상처로 남았다. 삶을 수놓게 될 거라 믿었던 사랑의 변덕은 상실과 좌절로 남았고 그래서 흰 바람벽에 다른 지아비와 함께 저녁을 먹는 여자를 투영하고 있다. 내적 욕망의 슬픈 사랑을 서늘함으로 읊조린 것이다. 이제 거울로 화한 벽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얼골과 글자와 주먹질로 이어지며 생은 외로움으로 점철되고 있으나 화자 자신이 자기 자신과 하나씩 다시 조우하면서 깨단한 성찰과 자각을 통해 내적 고결함을 일깨우고 있다. 외로움과 가난과 좌절 속에서도 순정하고 고결한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로 점점 가득 차고 있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상징하는 작고 빈약한 처지의 허무를 넘어, 나열한 이국의 시인들처럼 어떤 단단한 의미로 갈무리되는 시인의 마음만이 슬프게 빛난다.
겨울길, 눈이 많이 나리고 바람도 예리하게 불어대기만 하여 더욱 춥기도 했던 그 길 위에서 언어와 문학을 생각하는 일상은 다소 비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보다는 오늘 도착할 택배상자나 집에 돌아가 처리할 세탁물 생각, 그것도 아니면 지난주에 도착한 주차위반 고지서의 벌금 납기일 같은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바쁘고 미리 짐작하고 미리 예정된 일들을 말끔히 정돈해 나갈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져서 조금쯤은 열심히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길 사이를 오가는 추운 와중의 나는 20세기 초반으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개정판 김수영 평전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소월이나 동주를 닮은 수수한 이미지들과 백석의 나타샤와 당나귀를 틈나는 대로 되뇌는 것이 더욱 그렇게 만든 것일 게다. 지나간 올드보이들을 회억하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몸에 밴 촌티와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지 싶다. 백석을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장 먼저 그 질박했던 삶의 궤적을 한 걸음씩 따라가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다소 투박하고 성긴 몽당평전을 하나 기록하고자 한다.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여우난골에서 태어났다. 여우가 유독 많았을 법한 마을을 품고 있어인지 아니면 지역의 배산임수 자체가 문학도에게 어떤 거룩한 영감을 주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하니 문화예술계의 비중으로 볼 때 꽤 선명한 자취를 지니는 고장이고 정서적으로는 백석 시문학의 깊은 뿌리이자 전부라 할 수 있는 거대한 토양인 셈이다. 백석은 오산소학교와 오산학교를 거쳐 18살 되는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학창 시절 열 살 선배인 소월을 몹시 흠모했다고 전해진다.
소월이 요절한 탓에 두 사람은 결국 만나지 못했지만 백석이 오산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소월이 벌써부터 조선 문단을 뒤흔들던 기린아였던 점을 생각해 볼 때, 뚝뚝하고 생경하기만 한 서북방언의 빙벽을 애틋한 민족적 정서로 허물며 꽃으로 그리움으로 절절히 피워 낸 소월이야말로 어린 시절의 백석에게 문학적 도전과 교감의 대상이자 횃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한 경로를 지나 자신만의 시세계를 이룬 백석이었기 때문에 후일 윤동주 또한 백석을 깊이 흠모하며 시집 사슴 전체를 필사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시 '별 헤는 밤'에 백석 시의 모티브와 이국의 시인들을 다시 등장시키며 뚜렷한 마음을 적어 넣었다.
오산학교 시절 백석의 성적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불교와 문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고 민족주의 사관이 투철한 모교의 학풍과 더불어 당시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이 그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고 하니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하나 백석이 오산학교를 졸업하는 처음부터 필명을 떨친 것은 아니다. 가정 형편상 진학을 하지 못하고 1년간 집에서 머물렀다는데 아마도 이 무렵이 백석 습작의 잠행기가 아닐까 한다. 한 살씩 나이가 들수록 고향 정주의 풍물과 향토색을 갈무리하며 성장했지만 시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표출될 만한 경로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음 해인 1930년 1월 지금의 신춘문예인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소설 '그 母와 아들'로 당선하게 되는데, 한국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천재적 시인이 이렇듯 소설로 먼저 등단했던 것은 다소 의외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된 백석은 정주의 부자이자 후일 조선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게 되는 계초 방원모의 후원으로 김동명, 염상섭 등이 수학한 일본 동경 소재의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한다. 1930년 봄부터 1934년 봄까지 감리교 재단인 청산학원 교정에서 백석은 이 시절의 영문학을 통해 서구의 시문학과 주변세계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고향 상실의 근원적 절망과 갖가지 소회들이 조금씩 서민들에 대한 연민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겉으로는 무엇보다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전공인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와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까지 두루 섭렵하여 실질적인 수석졸업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기대와 찬사 속에 졸업에 이른다. 이때의 성취는 훗날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회화에 능통한 교사로 명성을 떨치며 외국문학서적 번역에까지 다양한 실험적이고 생산적인 도전으로 이어지지만, 그의 생을 아우르는 시풍 속에는 오히려 토속적인 정감으로 가득하니 도리어 반갑고 허울 없이 느껴진다.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온 1934년 백석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산문과 번역문,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초기의 대표작인 시 '여승'을 쓰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시단 활동을 한 건 신춘문예로 데뷔한 지 5년이 지난 1935년의 일이다. 여름이 끝무렵인 8월 31일, 비로소 조선일보 지면에 데뷔작인 '定州城'을 실어 시단에 나선 후 잡지 <조광>을 통해 山地, 주막, 비, 나와 지렝이, 여우난곬族, 통영, 힌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시인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다. 또 이 해에는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통영의 여인 박경련을 처음 만나기도 하는데 이때의 첫 만남이 누군가의 인생에 치우지 못할 묵지막한 바윗돌이 되어 얹히고 목에 걸려 오래도록 내려가지 않는 칼칼한 가시가 되리란 예상은 서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몽당평전 말미에 나타샤로 대변되는 백성의 사랑과 무수한 억측에 대하여 자야 김영환과 통영 여자 박경련과 그 밖의 숱한 스캔들, 더불어 경성의 모던보이 백석의 희원이자 슬픔의 장본인 나타샤까지 데려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카더라 통신들을 고조곤히 따져 볼 요량이다.
몇 년 전 다시 뭐라도 써볼까 싶은 마음이 들불같이 일어났을 적에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방을 하나 만들고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당시 심사를 거쳐 승인을 받은 작가가 자신이 써놓은 창작글에 대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가격을 정하고 진열해야 하는 일이 내게는 참말이지 고역이고 마뜩지 않았다. 한 달 정액권부터 개별적인 열람비용까지 대놓고 어지럽기만 해서 대부분 무료로 글을 올렸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곳의 시스템을 험담할 마음은 없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처럼 잠시의 고심 끝에 탈퇴를 하고 찾은 곳이 2년 전의 브런치였다. 지금 다시 브런치를 시작하려니 그동안 좋은 것과 이상한 것이 하나씩 생겨있어서 편하기도 희한하기도 했는데 하나는 편하게 답글쓰기 기능이 생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응원하기라는 묘한 것이 생긴 것이다. 이곳은 응원하기를 팍팍 미는 참인지 상단에 고정시키고 잔뜩 치장을 하지만 내가 응원하기를 켜놓지 않는 것은 순전히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체질 때문이다.
1936년, 마침내 백석은 첫 시집 '사슴'을 펴내는데 이것은 일생의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소장용 기념출판처럼 믿어질 100부 한정판으로만 간행했다고 하는데 초짜 시인의 시집 한 권은 꽤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백석에게는 가격을 정하는 것이 그리 고역은 아니었는지 시집의 뒷면에 인쇄된 거금 2원을 두고 호화판 시집, 조선 초유의 고가 시집이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3원이었으니 세상 물정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긴 하다. 백석은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일약 스타가 된다. 고향의 흠모하던 선배 소월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 문단의 문제적 시인으로 도약하며 많은 비판과 시선 속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으니 말이다. 이즈음 백석은 조선일보를 나와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삶은 무성했고 영혼은 빛났으며 열정이 온몸을 휘두르던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다섯이었고 자야를 처음 만난 해였다.
女僧 / 백석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났다
쓸쓸한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설어워젖다
平安道의 어늬 山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女人에게서 옥수수를샀다
女人은 나어린딸아이를따리며 가을밤같이차게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지아비 기다려 十年이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않고
어린딸은 도라지꽃이좋아 돌무덤으로갔다
山꿩도 설게울은 슬픈날이있었다
山절의마당귀에 女人의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날이있었다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에 같이 수록된 여승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속에서 평범한 여인의 삶이 얼마나 기구한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가급적 원문 그대로 싣다 보니 PC에서는 글씨체 변환이 안 되는 것도 있다. 들여 쓰고 띄어 쓰고 붙여 쓰는 것도 시의 일부라 그것도 그냥 살렸다. 화자는 평안도 산골에서 만난 적 있는 비운의 여인을 결국 여승이 된 어느 시점에 다시 만난다. 화자를 보며 합장을 한다. 슬퍼 보인다. 여인과의 재회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고독, 절망과 상실, 촌의 몰락과 가족 해체라는 쓸쓸한 주제를 보이는 대로 펼치고 있는데 지금의 언어로 바꾼다면 아마도 이런 모양일 게다. <산속 절간에서 그 옛날 만난 적이 있던 여인을 다시 만났어요. 여승이 된 그녀는 이미 절밥을 오래 먹어서인지 가지취 냄새가 몸에 배어 있어요. 그녀는 몹시 슬퍼 보였고 나는 어쩐 일인지 서러워졌어요. 옛적에 평안도 깊은 산골 금광 주변에서 파리한 행색의 이 여인에게 옥수수를 산 적이 있는데 그때 여인은 보채는 어린 딸을 때리며 차갑고 서럽게 울었지요. 지아비는 일벌처럼 돈을 벌러 가서는 십 년을 지나도 오지를 않고 그 사이 어린 딸은 그만 죽어 돌무덤엔 도라지꽃이 피었다지요. 산꿩도 서럽게 울던 슬픈 날, 산속 절 마당 귀퉁이에서 머리를 밀고 스님이 되던 날, 머리카락과 같이 떨어진 건 서러운 눈물방울이었어요.> 담담하게 풀어도 슬퍼지고 싶을 만큼 슬프다. 농촌의 몰락을 중심으로 당시 우리 민족의 가족공동체가 붕괴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백석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 중에 여승이 있다.
백석은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의 모습이 처량한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슬픈 것들과 더불어 슬프지 않은 것까지 조목조목 슬퍼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