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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Dec 04. 2024

백석과 나타샤와 힌당나귀 3

3/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삿 : 삿자리, 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    

한방 : 냉랭하고 쓸쓸한 방

쥔을 붙이다 : 주인집에 세들다

딜옹배기 : 질옹배기, 아가리가 벌어진 작은 질그릇

북덕불 : 짚이나 풀이 뒤섞여 엉클어진 뭉텅이에 피운 불

턴정 : 천장

나줏손 : 저녁

바우 섶 : 바위 옆



일전에 모 신문사에서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알아본 결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 1위가 이 시라 하고, 공동 2위로는 미리 감상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으로 조사되었다는데 인기야 당최 물색 없는 거니까 여기서는 논외로 하련다. 다만 나도 그러한 것은 차마 부인하지 못하겠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1948년 남쪽 문단에 발표된 마지막 시로, 기거하던 곳의 주소를 제목으로 하여 서간문 형태로 쓰였다. 화자는 처음부터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집도 없으며 가족과도 멀리 떨어진, 그야말로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곤고함을 토로하며 지식인으로서 참기 힘든 무료한 일상을 '어느 사이에'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자아의 상실과 연결시키는데, 남루한 심정의 골목 사이와 모퉁이마다 반복적인 쉼표를 사용하여 그만의 내재율을 잃지 않고 이어간다. 백석은 어느 겨울쯤 남신의주 유동에 살던 박시봉의 집에 잠시 얹혀 산 적이 있는 모양이다. 삿자리를 깐 방에서 화자는 자신의 우울한 형편을 돌아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한다고 적는다. 이러한 처지의 감정들은 곧바로 이런저런 일을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슬픔과 회한으로 이어진다. 세 들어간 작고 초라한 방 한 칸, 그 습하고 춥고 눅눅한 방에서 글자 하나 쓰기 위해 손을 쬐가며 곱은 손을 펴야 하는 허탄한 생각의 되새김질을 여과 없이 보이면서, 지난날의 경로들이 가져온 작금의 화자를 둘러싼 슬픔이자 어리석음인 것을 쓸쓸히 회억하고 있다. 다름 아닌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누추한 현실이 주는 번민과 고통에 대한 비가와 같다. 화자는 그러나 낙담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민족의 고난과 함께 유랑의 비애를 안녕과 희망에의 의지로 전환하여 강한 의지로 넘어서려 한다. 상실의 시절을 넘어 자아의 지난한 삶을 똑바로 응시하며 더 크고 높은 것을 향한다. 슬픔이나 한탄처럼 가라앉는 것들을 화로와 무릎과 바우 섶의 상정적 기척을 통하여 결국에는 갈매나무라는 백석시 전반의 의연하고 굳센 다짐으로, 그러니까 춥고 고달픈 시련에도 화자의 진솔한 자아가 걸어가야 할 희망에 도달하는 것이다. 


                 

모던한 멋쟁이 백석은 심각한 결벽가였다. 기질 탓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도 185cm 정도의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뒷받침하듯 옷에 대한 까탈은 당연했고 양말 하나까지 신경 쓰던 그는 너저분한 식당엔 일절 출입도 하지 않았는데, 전화를 받을 때도 깔끔하게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쌌다고 한다. 주위의 눈길이 곱지 않을 때에는 여러 사람의 손과 입김이 닿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 둘러댔으며 최고급 구두와 양복을 좋아했다. 심지어 남들이 20전짜리 양말을 신을 때 그는 1원이 넘는 것만 신었다 하니, 하여튼 스타일이 여간한 모던보이가 아니었다고 문학평론가 백철은 '1930년대의 문단'에서 회상했다. 사실 백석에게 조선일보의 2년여는 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자신의 첫 시집을 펴냈고 그로 인해 당대의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문학에 관심을 보이던 김기림, 허준, 임화, 오장환 등 많은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근대문학사에서 1930년대 중반은 기존의 프로문학에 대항하여 시문학파인 정지용, 김영랑 등이 시집을 출간하며 순수시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중 정지용과 유치진, 김기림, 이효석, 이태준 등은 다시 구인회를 결성하여 순수문학 지향의 집단적인 문학운동을 조선문단의 본류로 이끌던 시기였다.     


더불어 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카프계는 해체되어 가던 시절이기도 하다. 뒤집어 보면 당시의 지식인과 문인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특정한 시류에 편입되기 쉬웠다는 말이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백석은 가파른 문학사적 격변기 속에서도 혼자만의 우직한 시 쓰기에 몰두했는데 이것이 천상 외톨이의 징후인지 아니면 그의 시처럼 외롭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김수업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백석은 토박이말을 귀신처럼 알맞게 부려 썼다고 하는데, 역시나 그는 시문학파나 생명파가 아닌, 그렇다고 청록파도 아닌, 단지 귀신같은 경계인 백석이었던 것이다. 백석 시에 있어서 고독의 풍경이란 고향이나 여성상으로부터 이탈된 자가 운명론적 정조를 간직하는 풍경이다. 또한 고독이란 인간 실존의 불가피하고도 중심적인 현상, 곧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석은 모더니즘 계보에 속하는 시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조선일보에서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자리를 옮겨 생활하는 동안 백석은 동료 교사나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유창한 영어실력과 더불어 서구문물을 다양하게 접한 지식인으로, '사슴'을 펴낸 문학적 재능과 열정의 시인으로, 무엇보다 호감을 주는 매끈한 인상의 모던보이로 말이다. 영생고보에서 보낸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약 2년여 기간 동안의 생활이 백석 문학에 어떤 구체적 영향을 주었는지는 뚜렷한 사건이나 곡절 같은 것이 없지만 짐작을 하기에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슴' 이후의 문학적 고심의 결말과 새로운 시세계의 출발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함흥 이후에 발표되는 백석의 시세계가 함흥 이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인데, '사슴'이 대상과 외부세계를 숨은 듯 바라보며 형상화하고 조용히 읊조리는 편에 가까운 시편들이었다면, 함흥 영생고보 이후 시절의 작품들은 대상과 세계에 대한 자기감정과 반성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까닭이다.     


함흥에 머무르는 이 기간 동안 백석은 구체적이고 중요한 개인사를 겪는다. 권번 출신의 김자야(김영한)라는 여자를 만나 동거를 하게 되는데, 비록 3,4년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백석의 생활과 그의 문학에 무진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자야의 입장에서 자야의 시선과 감정으로 출간된 '내 사랑 백석'에 대하여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나중에 자야가 밝힌 내용에 따르자면 백석은 자야와 실질적인 부부생활을 하면서도 부모들의 권유와 강압에 못 이겨 두 번이나 봉건적인 중매결혼을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마다 백석은 결혼식만 치르고 뛰쳐나와 자야에게로 달려왔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부모의 강권이 작용했다 하더라도 두 번씩이나 무책임한 결혼을 하고 또 아내를 등한시했는지는 선뜻 수긍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당시에는 동일한 갈등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신여성과 새 삶을 꾸리는 일이 많았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이를 둔 사람의 행사로는 도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백석 평생의 숱한 여인들보다 오직 자야 자신만이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논점에서는 명백히 자야적 서술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그 후 백석은 함흥시절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조선일보 출판부에 재입사하는데, 백석이 왜 영생고보를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자야를 포함한, 무엇인가 개인적인 내밀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그리고 다시 유랑벽처럼 홀연 조선일보를 떠나 만주의 신경으로 간다. 자야에 따르면, 백석이 북만주로 떠난 건 강압적인 부모와의 갈등과 봉건적 관습에의 피난이었으며 그가 떠나려 할 때 자신에게도 같이 가자는 제의를 했다지만 오직 자야의 회고만이 있을 뿐이다. 어쨌든 그때까지도 서로 깊이 사랑했다는 자야는 -함흥시절 대부분의 상황도 그랬거니와- 백석이 두 번째로 결혼한 여자와 살아야 한다는 정서적 연민과 심정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으며, 백석을 피해 다니다 마침내 거절의 뜻을 전했다고 회고했지만 사실 이 부분도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당시의 백석에게는 부모나 관습에의 갈등이나 염증이 폭발할 만한 뚜렷한 계기가 없었으니, 직장과 가족과 문우들을 버리고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마저 버리고 만주땅으로 거처를 옮길 만한 이유가 모호하고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백석은 1940년의 어느날 홀로 북만주의 신경으로 떠났고, 그의 나이 30살의 일이다. 백석은 서울을 떠나면서 고향산천도 함께 떠났다. 백석에게 있어 고향이란 생의 모태이자 삶을 지탱하고 미래를 여는 공간이었지만 오산학교가 있던 정주를 떠나 동경으로, 서울로, 함흥으로, 다시 서울로, 그리고는 중국의 만주로 거처를 옮기면서 백석은 결국 모두에게서 떠났다. 백석은 그동안 어떤 시류에 속해 왕성한 문학을 하지도 않았고,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일제나 관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일도 없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게 떠난 것이다. 그의 유학과 교사 시절과 두 번의 결혼과 자야와의 동거 속에서도 개인사를 뒤집을 만한 거대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그는 젊은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시대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고, 전통의 자물쇠 같은 봉건의 유습에 숨이 막혔을 것이며 글쓰기를 원하는 내면의 문학적 욕망도 참기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면들은 동시대를 살았던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 모두가 겪어야 했던 슬픔과 고통의 전형이었기도 했는데, 그의 삶을 관통하는 외롭고 쓸쓸하고 바람 같은 여정은 자꾸만 그렇게 북녘으로 이어졌다.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날여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여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 귀 혹은 능달 쪽 외따른 산녑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힌 김 속에 접시 귀 소기름 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볓 속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집웅에 마당에 우물 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싸히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 사발에 그득히 살이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 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 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샅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고담)하고 素朴(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멕이고 : 활발히 움직이고

김치가재미 : 김치를 묻은 움막

양지 귀, 능달 : 양지의 한 모퉁이, 응달

은댕이 : 언저리

예데가리 밭 : 산의 맨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 : 산몽아,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

붙을 : 국수를 짜는 분틀

들쿠레한 : 좀 달고 구수하고 시원한 

사리워 : 담겨져서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넝쿨로 짜서 만든 자리

댕추가루 : 당초가루, 고춧가루

탄수 : 식초

아르궅 : 아랫목



1941년 <문장>에 실린 시 '국수'는 고향에 대한 정서가 탱탱한 면발처럼 줄줄이 이어진다. 여기서의 국수는 냉면이다. 이북에서는 냉면이라는 말은 원래 쓰지 않고 국수라고 불렀지만 개화기 이후 남쪽 말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서서히 냉면이란 말도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도 고향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몹시도 물냉면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아마도 평양냉면이겠지. 첫눈 같은 슴슴한 냉면을 생각하며 어머니와 어른들과 동기들과 마을 사람들이, 고향이 그리웠을 것이다. 백석이라고 허구한 날 슬프고 쓸쓸한 시만 썼겠나. 백석 시에 등장하는 음식 종류만 해도 백여 가지가 훌쩍 넘는다고 하니 어쩌면 당대의 먹방을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향에서 백석이 시로 쓴 국수의 맛과 그리움에 대하여는 어딘지 따듯하면서도 짠한 데가 있는데 아마도 시 속의 화자가 국수처럼 부드럽고 소박하고 평화로웠던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마음이 전이되어 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음식과 자연, 그리고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소박한 삶의 정취와 가족을 그리워하며 보여주는 백석 특유의 서정이 깃든 사실적인 묘사는 깊어가는 겨울밤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한 사발 말아내어 우리 앞에 슬며시 내밀고 있는 것 같다. 


함박눈이, 호랑이 같고, 곰 같고, 소 같은 얼굴들이,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가,

주정뱅이 삼촌, 얼굴 얽은 고모, 뻐드렁니 동갑내기가,

승냥이, 여우, 멧돼지가, 구렁이만 한 지렁이가,

가즈랑집 할머니가, 아름다운 나타샤가, 흰 당나귀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함흥 영생교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과 자야





몸살기가 있어 일찍 잠자리에 든 사이 간밤에 있었던 모지리들의 모지리적 비상계엄 행태를 보며 아침 댓바람부터 잠시 어느 목수네 집 춥고 눅눅한 방에 세들어 기거하던 처량한 심정이 된다. 이거 원 울화가 치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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