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당신과 이별합니다.

by 삐삐오기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오늘만 마지막이라는 말을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어제까지도 아무 말도 없던 후배가 다음 달까지만 일한다고 했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문화 센터 수업이 갑자기 폐강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아쉽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가죽공예를 같이 배우고 있는 후배가 집안에 일이 있어 더 이상 못 다닐 것 같다고 했다. 당장 내일부터 못 온다고 전화로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갑작스러워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세 번이나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때부터였을까? 심장 오른쪽 부근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나를 채우고 있던 것들이 없어진다고 하니 더욱 허전함이 느껴졌다. 언젠가 마트에서 마감 할인한다고 해서 집어 들었던, 어쩌면 싸구려인 와인 한 병을 이틀 사이로 야금야금 먹어 치운 날 느꼈던 하전함과도 같았다. 그때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지만 취한 듯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임을 말했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의 관계,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관계임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마땅한 때를 찾지 못해 우리라는 명목으로 7년을 보냈다. 담담하게 말했던 나만큼이나 이별을 받아들이는 그의 목소리도 못지않게 담담해 마치 와인과 함께 먹었던 크래커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먼저 이별을 말하느냐가 문제였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화를 끊고, 식탁 위 와인잔을 치우고, 샤워를 했다. 다음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을 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하고 가죽 지갑을 만들었다. 그다음 날도 나는 회사 동료와 저녁을 먹으며 그의 사정을 들었고 가볍게 술을 마셨으며 매일이 새로울 것 없는 아무렇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고 했던가.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을 살던 나에게 헐레벌떡 뛰어온듯 한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마음을 헤집기 시작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면서 그와 함께 갔던 합정동 까페 거리에 있던 노란 간판의 커피숍이 생각나 한참을 서 있었고, 점심때 김치를 안 먹는다는 동료의 말에 그도 김치를 싫어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때 서야 나는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전화로 마지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의 뒷모습이라도 바라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간의 아무렇지도 않았음은 온통 상실감으로 바뀌었다. 오후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내 기분은 엉망이었다. 누군가 괜찮냐고만 물어봐도 나는 툭 눈물을 흘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다가올 마지막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도망쳐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닳았다.

휴대폰을 열어 수십 번 문자창을 두드리면서도 나는 이미 흘러가 버린 것들에 대해 후회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결국 창츨 닫아 버렸다. 사랑을 말할 용기도 그렇다고 제대로 된 이별을 말할 자격도 없는 나는 끝내 그 무엇도 고백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은 늘 아쉽고 미련이 남는다. 마치 내일은 안 그럴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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