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 악의 분노
“으으으~!”
하얀 손수건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정금학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억센 팔이 큰 구렁이처럼 목을 감아버리자,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 간절한 SOS는 얇디얇은 손수건에 가려서 밖에서 들을 수 없었다.
한 블랙맨이 정금학을 제압하자, 다른 블랙맨이 움직였다.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승사자가 발소리를 낸다면 이와 같을 거 같았다.
두 블랙맨이 정금학을 에워쌌다. 그렇게 그녀를 압박했다. 완벽하게!
정금학 앞에 걸음을 멈춘 블랙맨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후드의 그늘과 검은 마스크로 눈 위와 아래를 가렸지만, 마스크 위로 보이는 두 눈에서 넘쳐 흐르는 살기는 감출 수 없었다.
정금학이 살기 어린 두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두 눈을 어디선가 본 거 같았다. 매우 익숙한 눈매였다.
잠시 정금학을 바라보던 블랙맨이 입을 열었다. 검은 마스크 사이로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다. 윤이슬. 이름을 정금학으로 바꿨구나.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냐?
여전히 도도하군. 10년 전보다 더 도도해진 거 같아. 그게 바로 네 매력이었지. 얼음 공주!”
정금학이 그 목소리를 듣고 두 눈이 축구공처럼 커졌다. 블랙맨의 정체를 안 거 같았다.
블랙맨이 말을 이었다.
“네 엄마처럼 너도 유령 의사가 됐구나. 붉은 원의 일원이 됐어. 그래서 못 찾은 거였어. 역시 등잔 밑이 어두웠어. 네가 유령 의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흐흐흐!”
“으으으!”
정금학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차디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10년 전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였다.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아주 달콤했던 목소리였다. 젤라토처럼 귀에 착착 감겼던 목소리이기도 했다.
사랑한다고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잘생긴 애인이 들려주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10년 만에 다시 들렸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으으으!”
정금학이 다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뒤에 있는 블랙맨이 그녀를 꼼작 못하게 제압했다.
차디차면서도 달콤한 목소리를 냈던 블랙맨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후드와 마스크를 차례대로 벗었다. 그러자 그 얼굴이 드러났다.
어두운 거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났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10년 전 멋졌던 얼굴이 아니었다. 흉측한 얼굴이었다.
얼굴의 반이 화상 자국으로 일그러졌다. 왼쪽 뺨과 입술, 턱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반면 오른쪽 얼굴은 피부가 무척 고운 미남이었다. 새하얀 얼굴, 서글서글한 눈매, 높은 코는 그대로였다. 이목구비 중 입술만 흉측하게 변했다.
“흐흐흐!”
흡사 야누스 같은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화상 자국으로 흉측해진 얼굴과 원래의 고운 얼굴이 기괴한 미소를 만들었다.
얼굴 반쪽은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다른 반쪽은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진실과 거짓이 한데 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그 기괴한 미소를 보고 정금학이 몸서리를 쳤다.
화상 자국이 서린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달콤하면서도 차디찬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슬아, 아니 지금은 … 정금학이지. 나야, 이동호. 우리 애인 사이였잖아. 그사이에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 … 이슬아, 여전히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 정금학이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당장 전 애인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블랙맨 중 하나가 정체를 밝혔다. 그는 10년 전 윤이슬의 애인이었던 이동호였다.
윤이슬은 그때 간교한 흉계에 빠졌다. 이동호는 어머니를 죽이고 윤이슬까지 죽이려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녀를 도와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의 스승이자 유령 의사인 백미 노인이었다. 그녀는 백미 노인의 도움으로 불타는 다락방 커피숍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윤이슬은 이동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 붉은 원에 가입해 유령 의사가 됐다.
이후 새로운 신분을 얻어서 정금학이 됐다. 금학은 스승인 백미 노인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금학(金鶴)은 말 그대로 황금을 벌어오는 학이었다. 아울러 그녀의 도도하면서도 고상한 외모를 지칭했다.
이동호는 윤이슬의 어머니를 해치고 그 딸까지 죽이려 했지만, 다락방 커피숍 화재로 큰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가 직접 불을 질렀지만, 오히려 그 불에 당해서 미남에서 흉측한 인물로 변모했다.
그는 윤이슬과 함께 커피숍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백미 노인과 결투를 벌였다. 칼을 들고 동료 둘과 함께 칼부림했다.
당시 백미 노인은 70대였다. 그래서 우습게 알고 덤볐다가, 백미 노인이 휘두르는 메스에 셋이 모두 당해 쓰러지고 말았다.
이동호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려고 할 때
바로 그때! 천장에서 쿵쾅! 큰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폭탄처럼 위에서 떨어졌다.
이동호는 재빨리 움직여 떨어지는 불덩어리를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굴 반쪽에 큰 화상을 입고 말았다. 이후 커피숍에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다른 동료는 무너진 출구에 길이 막혀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라는 세월이 거침없이 지난 후, 이동호가 정금학 앞에 다시 나타났다.
과거의 윤이슬이자 현재의 정금학 앞에 살인마 블랙맨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이유는 똑같았다. 바로 황금새의 딸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정금학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몸서리칠 때
뒤에서도 차디찬 목소리가 들렸다. 원한에 사무쳐 분노가 끓어오르는 목소리였다.
“정금학! 너는 한 사람을 수술 중에 죽였다. 그것도 불법 수술인 유령 의사로 수술하다가 … 소중한 생명을 죽였다. 이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다.
너랑 같이 수술에 참여했던 유령 의사 주미희는 벌써 황천길로 떠났다. 너도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이게 바로 심판이다.”
“헉!”
그 소리를 듣고 정금학이 깜짝 놀랐다. 유강인이 경고한 말이 떠올랐다. 유강인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황수지가 집에서 나가기 전 한 말이 있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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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학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강인 탐정님은 믿어야 합니다. 그분 말씀은 잘 따르게 좋아요. 제가 할 말은 그거뿐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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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지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정금학은 황수지의 말에 따라 유강인을 전적으로 믿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출발한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블랙맨의 손아귀에 놓였다.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 검은 판사다. 악을 징벌하는 악마다! 검은 법전의 이름으로 너를 처벌하겠다.
너는 유령 의사로 불법 수술했고 수술 중에 사람을 죽였다. 이에 유죄다. 살인죄를 구형하고 선고한다!”
“헉!”
사형이라는 말에 정금학의 안구가 눈꺼풀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옛 애인이자 어머니의 원수인 이동준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맨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흐흐흐!”
이동준이 다시 차디찬 웃음을 흘리더니 한 손을 품에 넣었다. 기다란 게 몸에서 나왔다. 그건 밧줄이었다.
그것도 끝부분에 매듭 두 개가 있는 밧줄이었다.
그가 밧줄을 들고 정금학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밧줄이 허공을 가르며 위로 올라왔다.
이동준이 10년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전생에 죽도록 사랑했나 봐. 그러니 금생(今生, 현생)에 이런 모습이지. 우리는 아주 깊은 인연이야.
내생(來生)에는 어떨까? 다시 죽도록 사랑한다는데 과연 그럴까? 금학아, 내생에 다시 보자. 다시 사랑하자.
너는 내 애인이었으니 … 자비를 베풀어 때리지는 않을게. 대신 목이 졸려 죽어야 해. 그게 우리 법칙이야.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아, 안돼!!”
정금학이 다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했다. 여기에서 어머니를 죽인 원수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10년 전과 오늘이 반복됐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10년 전에는 백미 노인이 옆에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이동호의 마수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찾아온 유강인을 애써 무시하고 내쫓았다. 그러다 외통수에 걸리고 말았다.
유일한 희망인 유강인이 옆에 없었다.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어리석음의 결과였다.
“하하하!”
이동준이 호탕하게 웃고 밧줄을 든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옛 애인의 가냘픈 목에 차디찬 밧줄을 척 걸었다.
가시처럼 가칠한 감촉에 정금학의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제 시작이군.”
뒤에 있는 블랙맨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목을 조이는 건 그의 몫이었다.
이동준이 뒤로 물러섰다. 밧줄을 목에 걸고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뒤에 있는 블랙맨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억센 두 손으로 밧줄을 콱 잡더니 정금학의 목을 힘껏 조르기 시작했다.
“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 소리가 무척 작았다. 집 밖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죽어라!”
블랙맨이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오른 무릎이 정금학의 가는 허리를 콱 눌렀다. 정금학의 허리가 활처럼 확 휘어졌다.
“컥!”
정금학이 숨이 막혀서 죽어갈 때!
바로 그 순간!
딩동댕!
벨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쾅! 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앞에 유강인이 서 있었다. 옆에 황수지가 있었다. 황정수는 탐정단 밴에 가서 핸드폰을 충전 중이었다.
유강인이 현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정금학씨, 할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유강인이 탐정단 밴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금학의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입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길고양이, 삼색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았다.
다른 고양이가 따라 나왔다면 고양이들끼리 장난치거나 싸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고양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가 불길했다.
길고양이는 남자 어른을 몹시 경계했다. 아이들하고 놀다 가도 남자 어른이 나타나면 자리를 피하기 일 수였다.
이는 유강인이 많이 겪은 일이었다. 유강인은 길고양이가 반가웠지만, 길고양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에 정금학을 다시 만나야 했다.
쾅! 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젠장!”
“이건 또 뭐야?”
갑자기 들리는 문소리에 두 블랙맨이 당황해 멈칫했다.
그때! 정금학의 두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목을 조이는 밧줄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졌다.
“이때다!”
정금학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움직였다.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건 작았지만, 길쭉하면서 날카로웠다. 반짝이는 물체였다. 작은 칼이었다.
바로 메스였다. 번개처럼 메스를 들더니 목을 조르는 밧줄을 한 손으로 꼭 잡았다. 밧줄을 메스로 쓱 잘라버렸다.
밧줄이 탁! 하며 끊어졌다.
“어?”
블랙맨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나의 밧줄이 순식간에 두 개가 됐다.
블랙맨들이 다시 당황하자,
정금학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스프링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옛 애인의 목을 노렸다. 메스가 허공을 갈랐다.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이동호가 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악!”
커다란 비명이 풍선 터지듯 터져 나왔다. 피부가 갈라지며 선혈이 뿜어나왔다.
“윽!”
이동호가 재빨리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그렇게 주춤했다.
“야아!”
정금학이 고음을 내지르며 방에서 뛰어나갔다. 부엌 뒷문이 열려 있었다. 블랙맨들이 들어온 문이었다.
정금학이 재빨리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유강인이 집에서 들리는 비명과 고음을 듣고 옆에 있는 황수지에게 서둘러 말했다.
황수지가 심상치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누가 집 안에서 비명을 지른 거 같아요.”
“비명이라고?”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다시 현관문을 두드리려고 한 손을 들었을 때
그때! 현관문이 확 열렸다.
한 여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목에 붉은 줄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