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시작하게 된 계기
기록은 쓰는 행위다.
십여 년 동안 기록을 하면서 기록의 쓸모나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정작 내가 왜 기록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왜 기록을 시작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기록을 많이 한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기록을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원래 잘 잊어버리고,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메모장을 들고 다니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늘 해야 할 일 중 까먹고 하지 않는 일이 있을까 봐 걱정했고,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잊어버릴까 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소한 걱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친구가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때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려 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 나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당시 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행복한 순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기록을 시작했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이 흘러가버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모든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인데, 이렇게 흘려보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나를 덮쳤다. 나는 그래서 기록을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을 잊어버릴까 봐 너무 두려웠다.
나는 경험한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나 기억도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로 노트에 적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떠오르는 경험과 생각을 붙잡아 두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집중하기도 했다. 마치 날아가려는 물건을 몇 시간 동안 붙잡고 있으면 팔이 아프듯이, 나도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노트에 생각을 쏟아내며 그 고통을 줄이곤 했다.
그렇게 기록을 하다 보니, 기록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느 날, 같은 생각을 일주일 간격으로 반복해서 적어놓은 나를 발견했다. 참 우습다. 기억하려고 기록을 했는데, 정작 그 기록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스마트폰이 생긴 후,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현대인이 되어버린 듯했다.
나중에는 기록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잊어버렸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너무 유치한데?” 하고 노트를 덮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노트를 덮으면서부터였다. 나는 내가 했던 생각들을 연결 지으며, 눈덩이처럼 키워갔다. 그렇게 떠오른 생각들을 다시 노트에 적으면, 같은 내용이지만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생각들이 적히곤 했다.
나는 무형의 생각을 노트에 적는다. 그러면 생각은 유형의 것이 된다. 쓰는 행위는 모든 것을 시각화해준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시각화해주고, 내가 했던 생각들을 시각화해준다. 어제의 하루를 시각화해주고, 오늘의 할 일들을 시각화해준다. 기록은 쓰는 행위이고, 나는 어쩌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보기 위해 기록을 시작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