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인 중학교 1학년. 한국에 있었다면 6학년을 끝으로 교복을 맞춘다고 분주했을 것이고 모든 남학생들은 똑같은 '스포츠' 머리 모양을 하고 학교에 등교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저 길었던 여름 방학이 끝난 새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 큰 설렘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학교 건물 밖, 각자 해당되는 반 이름 앞에 줄을 선다.
처음 보는 동양인 남학생이 맨 앞에 서 있었다. 딱 봐도 한국애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나보다 살짝 작은 키에, 스포츠머리에 쫘악 찢어진 눈에 입체감 없는 콧대...
나는 이 아이에게 다가서서 대뜸 한국말로 물어봤다.
"너 이름이 뭐야?"
"어..? 나 한국사람인지 어떻게 알았어? 난 SK야."
"그냥 딱 봐도 알겠던데? 난 삼오야. 잘 지내보자고. 그런데 넌, 무슨 음악 좋아해?"
"난, 너바나(Nirvana)를 좋아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 친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갖 데뷔하자마자 캐나다로 이민 왔다고 했다. 아, 아쉽게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엄청난 신드롬을 놓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K는 친가 가족, 그러니까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가 다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사촌들도 서로 다 멀지 않은 동네에 산다고 했다. 이런 게 너무 부러웠다. 나도 한국, 온양온천에 살 때는 사촌 동생들, 형들, 누나랑 북적이면서 지냈는데... 확실히 이민 와서 덜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다른 학교에서 새로 오신 분이었다.
외모는 빌 코스비와 모건 프리먼의 딱 중간인 남자 선생이었다.
젠틀하지만 종종 욱(?) 하시는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분이셨다.
6학년 때 칙칙했던 간이 교실을 벗어나 다시 본 건물로 입성했다. 5학년 때 공부했던 교실이라 더욱이 익숙했다.
6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이 제법 보인 동시에 이번엔 유독 신입생 여럿이 보였다.
SK도 이 중 한 명, 첫날이라 그런지 약간 쑥스럽고 어색해했다. 굉장히 온순해 보였지만 왠지 이 얼굴 뒤에는 짓궂고 장난기 가득한 페르소나가 숨어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렇다. SK는 쾌활하며 장난기 많은 아이였다. 그렇다고 사고뭉치의 성향은 아닌 듯했다.
나도 가만히 놔두면 조용하고 그다지 존재감 없는 아이지만 친근한 장난을 걸어오는 SK를 애써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친근함의 표현 아닌가.
SK를 포함, 우리 반에는 유독 장난쟁이들이 많았다. 아니, 많다기보다 한 두 해 지나면서 그렇게 변해간 것 같다. 나도 장난과는 먼 아이였지만 어느새 나도 여기저기 붙어 다니며 장난 대열에 종종 합류하고는 했다.
담임 선생님은 장난쟁이들 전문가인 듯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뿜어내셨던 선생님은 언성을 높이 돼 고함은 지르지 않으며 의자를 종종 걷어 차 돼 (다행히) 학생은 걷어차지 않으셨다. (그랬다간 정말 큰일 나지... 90년대니까 한국이었으면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짓궂은 아이라 하더라도 어느 선은 넘지 않았던 거 같다.
SK는 금방 적응을 잘했고 밝은 성격에 금세 모두와 친해졌다.
별 다를 게 없었던 어느 날 아침, 수업 시작 전 교실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첫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교실 스피커에서 SK를 교무실로 오라는 소환 명령이 떨어졌다.
SK를 바라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 30분쯤 지났을까? SK가 다시 교실로 왔다. 완전 쫄아서 나갔는데 얼굴 표정이 밝았다.
눈빛을 보냈다.
'야, 무슨 일?'
'이따 얘기해 줄게.'
쉬는 시간 시작하기 무섭게 SK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새로 온 한국 학생이 있는데 우리랑 동갑이고 같은 반 될 건 가봐. 이름은 DK야. 한 글자 빼고 내 이름이랑 같네. 캐나다는 며칠 전에 와서 영어를 아예 몰라. 그래서 나보고 통역하라고 부른 거였어. 덩치는 좀 크고... 뭐랄까... 농촌에서 소 몰고 다닐 것처럼 생겼어."
SK는 나보다 더 어릴 때 캐나다로 왔기 때문에 한국어 표현이 때론 독특할 때가 종종 있다.
정말 싫어, 많이 싫다를 "꽤 싫어"라고 한다든지... 하여튼 특이했다.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DK가 합류했다.
매우 순박해 보이고 착해 보였으나 왠지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약간, 고릴라 같은 느낌도 있고... 아기 고릴라?
DK의 이니셜은 이때 한 참 잘 나가던 닌텐도 게임인 'Donkey Kong'의 약자이다. 자연스럽게 DK를 누구는 Donkey Kong이라 불렀고 누구는 고릴라라고 불렀지만 대부분 그냥 이름을 불렀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된 DK는 모든 게 신기하고 어리둥절한 듯했다. 내가 캐나다 처음 왔을 때를 보는 것만 같았다.
DK도 나름 온순하고 쾌활한 성격에 우리 셋은 금방 친해졌다. 나와 SK는 영어, 한국어를 섞어 사용하지만 DK는 우리에게 모르는 영어 단어를 항상 물어보고는 했다. 하도 '저 건 뭐야?'라는 말을 많이 해서 애들 사이에서 한 때 별명이 '거 뭐야'였던 적도 있다.
DK는 평소에는 착하고 순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답이 없는 성격이었다. 말 그대로 불 같았다. 한 번은 어떤 녀석이 DK를 놀리고 괴롭혔는데 참을 만큼 참았던 DK는 이 녀석을 제대로 응징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녀석이 한 번 더 그러자 엄청난 괴성과 동시에 책상을 번쩍 들어 올려서 이 녀석을 그대로 찍어버릴 셈이었나 보다. (책상과 의자가 일체형이라서 무겁고 부피도 상당한데 아무렇지 않게 흔들어 댔으니, 그 모습은 가히 공포스러웠을 거다.) 다행히 선생님이 말려서 상황은 종료되었고 그 후로 DK를 함부로 (종종 앞에서 까불 거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하는 녀석은 없었다.
나: 야, DK. 넌 한국 어디서 살다왔어?
DK: 제주도.
나, SK: 진짜? 와! 신기하다. 제주도 사람이다.
DK: 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그냥 사람 사는 동네구먼.
나: 아니,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티브이에서나 봐가지고...
DK: 너희들은?
SK: 난, 서울. 신사동. 강남 아니고 은평구 신사동.
나: 나는 서울이랑 온양온천 왔다 갔다 했어.
SK: 온양온천? 그럼 목욕탕 많은 동네야?
나: 응. 목욕탕도 많고... 흠, 물이랑 시설도 좋아.
SK: 삼오 너는 형이나 동생 있어? 나는 누나 하나 있는데.. 아 저번에 봤지?
나: 나는 꼬맹이 남동생 하나 있지. 이 학교 유치원 다녀. DK 너는?
DK: 누나가 하나 있는데, 한국말을 잘 못해. 여기서 태어나서 그런가 봐.
나: 너 캐나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누나는 여기서 태어났다고...? 부모님은?
DK: 부모님도 옛날에 캐나다로 왔지. 나는 제주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어.
SK: 나도 아빠랑 둘이 살다가 엄마랑 누나가 얼마 전에 왔는데.
(다들 뭔가 사연이 많은 듯했다. 하긴, 나도 나름 사연이 있지만.)
우리는 같이 어울리면서 점점 더 선생님의 레이더망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딱히 무슨 사고를 친적도 없고 그냥 이 나잇대의 아이들처럼 행동하고 놀고 그랬다. 다만 저번 DK의 괴성을 동반한 책상 사건 때문에 주의 대상에 오른 게 아닐까 싶다.
셋이 운동도 자주 했고, 가끔은 공부도 했는데 DK가 우리의 수학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한국 학교에서 선행으로 배워왔으니 한 단계 더 앞서 나가있었다. 반대로 나는 수학 빼고 영어 관련 모든 것을 도와줬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공부에 큰 흥미는 없었다. DK는 수학을 제외하면 그냥 자기가 이민올 때 들고 왔던 한국 소설들을 읽거나 했다. 아직은 '깍두기' 모드이니 선생님은 크게 개의치 않으셨다.
큰 사고나 사건 없이 시간은 흘러 벌써 7학년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
"얘들아. 나 이사가. 그래서 딴 학교 다녀야 돼."
그렇게 SK는 우리 학교에 1년만 다니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연락처는 알지만 꽤 먼 동네로 이사를 가니 잘 보지 못할 것 같았다.
SK는 이사를 가고 자주는 못 봤지만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어찌어찌하다가 SK와 나는 고등학교 때 같은 아파트에도 산 적도 있었다.
DK와는 쭈욱 같은 학교를 다니며 졸업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입학했다. 같은 수업도 들으면서 여러 추억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다 DK는 자퇴를 하며 본인의 길을 갔지만 연락은 꾸준히 하였다.
인연이 끊어질 듯하면서 끊어지지 않고, 서로에게 멀어지려고 할 때 알 수 없는 중력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이 들과의 인연이 없지는 않나 보다.
이 둘은 철 없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SK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여전히 캐나다에서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고 DK는 몇 년 전 한국에 아예 들어와 인생의 단짝과 함께 잘 지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