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이 선거와 인간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었다.
어떤 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공략법 같은 게 생긴다. 즉, 어떻게 플레이하면 더 쉽고 빠르게 득점하고 승리하는지 알게 된다. 스포츠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한다. 1988 서울 올림픽 남자 배영 100m 결승에서 스즈키 다이치가 30m를 잠영으로 헤엄쳐 우승했던 사례가 그렇다. 그 이후로 잠영은 15m 이내로만 진행한다는 규정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듯 하나의 게임을 열심히 고민하다 보면 게임의 규칙과 참여하는 사람들 그리고 승리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근데 이 민주주의에도 이런 필승 공략법들이 점차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당연하게도 대의민주주의 또는 간접민주주의로 선거를 통해 정책을 결정을 위임하는 일을 말한다. 필승 공략법은 바로 선거에서 점차 발전이 된다. 정치인들은 오랜 기간 선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학습하면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지를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최신 공략법이 개발되었다. 최신 공략법의 이름은 혐오다.
혐오는 정말 잘 팔린다. 인간은 누군가를 같이 좋아할 때 보다 누군가를 같이 미워할 때 더 빨리 친해진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부정성 편향" 즉, 부정적인 내용에 더욱 눈길이 가고 더욱 깊은 인상을 갖는 심리 특성이 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말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할수록 선거에서 더욱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선거의 결과는 누가 더 좋은가보다 누가 더 싫은가의 싸움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최선을 뽑는 게 아니라 차악을 뽑는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그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니엘 카너먼 교수가 심리학자로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의 경제학 이론의 전제가 되었던 "시장 참여자들은 이성적 논리적 선택을 한다"를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장 참여자들은 매우 직관적 비논리적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돈을 다루는 경제학 분야에서조차 시장 참여자들이 이렇게 직관적 더 나아가 감정적 판단과 선택을 하는데 정치에서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인류 역사상 인간은 늘 감정적, 직관적 선택으로 생존해 왔다. 그것이 단 100여 년 만에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이런 선거기술, 투표선전기술의 발전으로 망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더 좋은 법안, 더 좋은 공략에 힘을 쓰기보다 상대방을 어떻게 하면 더 밉게 혐오스럽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언론은 공략에 대한 기사보다 상대방의 비방거리와 혐오를 유통하는 편이 더욱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혐오의 부산물이 무엇인가? 최근에 있었던 "서부 지방 폭동 사태"와 대통령 지지사의 분신 사건이다. 옳은 소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비방할 대상을 최선을 다해 혐오하고 미워하면 결국 자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번지게 된다. 혐오의 눈덩이는 선거를 거치면 거칠수록 깊어진다. 미워하는 감정은 더욱 오래 남고 더욱 깊어지며 빠르게 전파된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첫 문단에 든 예시 즉, 수영 잠영 제한 사건은 언급한 대로 잠영 규칙이 추가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이렇게 규칙을 추가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비유하자면 정치 참여자 모두가 30m 잠영으로 득을 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혐오라는 칼자루를 서로에게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먼저 나서서 이 칼은 내려놓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에는 이런 규칙을 내려줄 존재가 없다. 이런 식으로 발전하는 민주주의는 무조건 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