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문학에서의 행위와 악
제논의 유명한 역설(아킬레스와 거북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라캉은 이렇게 진술한다. 숫자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정도까지, 무한하다. 아킬레스가 단지 거북이를 지나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는 무한에서만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1) 이러한 언급은 '아킬레스의 두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아킬레스의 '사드' 얼굴과 '돈주앙'얼굴 말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아킬레스의 두 얼굴'은, 앞서 우리가 칸트의 행위 이론의 두 측면으로 설명했던 것을 아주 잘 예시한다. 한편으로 신체의 불멸성이라는 (사적) 환상을 요구하는 의지의 신성함을 향한 무한한 접근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언제나 ‘너무 멀리’ 가는, 타자 속에 구멍을 남겨 놓고 그리하여 ‘악마적인 악’의 전형이 되는 '자살적' 행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 행위의 성취를 위해서는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되는 것이거나, 그와 같은 행위를 이미 지나쳐버린 것이거나이다. (욕망의) 대상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이거나, 이미 그 너머로 가버린 것이거나이다. '사드 운동'은 우리가 욕망의 대상 전체에 무한히 접근할 것임을 함축한다. 매번의 단계마다 우리는 그것에 좀더 가까이 가지만 결코 실제로 '전체 거리를 담파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드가 그의 유명한 진술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우리 앞에는 (언제나)한 번 더의 노력이 남아 있다. 사드적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지기 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드의 이야기들은 (아킬레스가 실로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기라도 한 듯) 극도로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나아간다. 그 이야기들은 무수한 ‘세부 테크닉들’과 장황한 지엽들로 과적되어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세상의 시간 전부’를 가진 것처럼 보이며, 다름아닌 쾌락 획득의 지연이 그들에게 최대의 쾌락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또한 우리가 성애적erotic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돈주앙적 운동'이 있다. 너무 서두르는 추구라고 하는 것이 그에 대한 최선의 묘사일 것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을 획득하는 일에 착수하는 매번 우리는 너무 급하게 나아가 곧바로 그것을 추월하게 되며, 결국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사드적 패러다임'은 단조롭다(하지만 서스펜스를 통해 여전히 우리를 매혹한다). 반면에 '돈주앙적 패러다임'은 반복적이다(하지만 모험으로 가득하다). 또한 이 두 접근의 차이는 향유의 대상에 대한 '부분부분'의 접근과 ‘하나하나의 접근’이라는 차이를 가지고서 정식화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 우리는 타자를 부분부분 즐기지만, '조각들을 한 데 모아놓기를 원할 때라도 그것들은 결코 하나의 전체를, 하나를 이룰 수 없다. 두 번째 경우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여럿을 '하나하나' 즐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전부를 즐겼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녀'는, 그녀들 하나하나는, 본질적으로 보다-하나-덜One-less-than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자 당사자인(en cause) 그녀에 대한 남자의 그 어떤 관계에서건, 바로 이와 같은 하나덜(Une-en-moins)의 관점에서 그녀는 취해져야만 한다. 나는 이미 돈주앙과 관련하여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지적했다.......’2) (타자와 ‘부분부분' 혹은 '하나하나' 재결합하려고 하는) 이 두 시도 모두가, 진지하게 착수될 경우, ‘악마적인 악'의 영토에 들어간다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욕망의 대상에로의 이 두 ‘접근들’의 논리를 어떤 근본적 곤궁에 대한―의지와 향유(행위의 실재적 중핵)의 관계를 지배하는 곤궁에 대한―두 가지 응답으로서 상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우리는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주인공 발몽을 사드적 패러다임의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돈주앙을 돈주앙 자신의 패러다임으로서 취할 것이다.
발몽의 경우
『위험한 관계가 들려주는 이야기 전체는 기원적 신화-현재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깨져야만 하는 메르테유와 발몽의 신화적 관계 - 를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관계는 정확히 사랑과 향유가 근본적으로 양립불가능한 한에서 사랑과 향유가 일치하는 일종의 '‘기원적 통일’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이 양립불가능성과 관련하여 소설의 어조는 세미나 『앙코르』에 나오는 라캉의 진술들과 일치한다. 사랑은 동일화와 관련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다'라는 공식에 따라서 기능한다. 다른 편에는 향유가 있으며, 그것은 원칙상 결코 ‘전체’이지 않다. 타자의 신체에 대한 향유는 언제나 부분적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일 수 없다3) 소설 도입부에서 메르테유는 투르벨 부인을 유혹하려는 발몽의 계획에 대해 경고하면서, 투르벨 부인이 그에게 단지 절반의 향유(demi-jouissance)만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관계에서 1+1은 언제나 2라는 것을 (그리고, 1은 ‘전체인', '비-절반인’ 향유에 대한 정의일 것이므로, 1+1은 결코 1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라캉은 이렇게 진술한다.
사드였던 칸트주의자 유형이 탄복스럽게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는 타자의 신체의 일부만을 즐길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신체가 타자의 신체를 그것을 에워싸고 흡수해버리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감싸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것을 조금만 압착하는 것에 한정해야만 한다. 이처럼 팔목이나 다른 무언가를 택해서 말이다 - 아야! (같은 글, p.23)
현실 세계에서' 향유는 언제나 절반의 향유이지만, 메르테유와 발몽의 경우에는 ‘절대적 자기포기'와 '쾌락이 그 자체의 과잉 속에서 정화될 때의 감각들의 엑스터시'가 있었다.4) 이는 메르테유 후작부인의 묘사다. 다른 한편으로 발몽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가 사랑의 눈에서 눈가리개를 벗기고 사랑으로 하여금 사랑의 불꽃으로 쾌락을 비추도록 강요했을 때, 사랑은 우리를 시샘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신화적 관계에서 사랑과 향유의 이율배반은 폐지된다 - 아니면 오히려, 폐지되어 있었다.
처음에 (성공적인) 성적 관계가, 즉 하나의 달성이 있었다. 발몽과 메르테유는 '더욱 중요한 일이 [그들을]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의무가 부르기 때문에, 이 관계를 깨뜨렸다. 그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갈라섰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주변에서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p. 28[26쪽]). 그렇지만 그들의 원래 관계는 그들의 모든 이어지는 사업들에서 하나의 척도로서 남아 있었다. 즉 이 척도와 비교할 때 그들의 다른 모든 파트너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이 나는, 측량불가능한 척도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로써 원래의 하나로부터 어떤 계열이 열리게 된다. 발몽 편에서건 메르테유 편에서건 질투의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균형-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이러한 불균형의 위협이다. 메르테유가 벨르로슈와 관계를 맺게 되자, 발몽은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당신의 호의를 한 곳 이상에 배분하는 한 나는 결코 질투는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연인들은 나 혼자 지배했던 그 거대한 제국을 자기들끼리는 유지할 수 없으니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전부 바치시다니요! 내 권능에 도전하는 것이 한 명의 다른 남자라니요! 이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참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를 전과 다름없이 상대하시든지, 아니면 적어도 두 번째인 연인을 취하십시오”. (p. 48[57쪽])
여기서 작동하는 논리는 이렇다. 단독으로 나 혼자(발몽)이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계열이거나이다. 그리고 이 계열이 크면 클수록 발몽에게는 더 기분 좋은 것이다. 물론 특권적 파트너는 결코 계열의 일부일 수 없다. 후작부인은, 발몽이 그녀에게 투르벨 부인을 성공적으로 유혹한 후에 주기로 약속한 보답을 요청할 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간혹 나 혼자서 하렘의 모든 여자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중의 한 여자가 되는 것에 동의한 적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p. 306[434쪽]). 다시 말해서 한편으로 메르테유 후작부인과 다른 한편으로 다른 모든 여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어떠한 비례도 없다. 발몽 자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후작부인이 (겉으로) 다른 누군가를 (유일한) 하나의 ‘지위’로 승급시킬 때 격노한다. 메르테유는 발몽 자작이 그녀를 다른 여자들과의 계열 속에 위치시키려 할 때 격노한다.
하나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바) 갈라질 때, 우리는 수학자들이 '실수 연속체'라 부르는 것의 논리로 이항된다. 주어진 임의의 두 실수들 사이에 언제나 어떤 실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임의의 두 실수의 차이를 점진적으로 줄임으로써 그 차이를 무화할 수가 결코 없다. 마치 아킬레스가 결코 자신과 거북이 사이의 거리를 계속해서 절반씩 답파함으로써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무한에서만 거북이에게 도달할 것이다. 후작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스니 기사가 표현하고 있듯이, ce n'estpas nous deux qui ne sommes qu'un, c'est toi qui est nous deu [오직 하나인 것은 우리 둘이 아닙니다. 우리 둘인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여기 걸려 있는 것은 우리 둘은 하나다라고 하는 통속적인 사랑 공식이 아니다. 요점은 메르테유가 (그들) '둘 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르테유의 태도는 이러하다: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은 당신이(이미) 둘 다일 때에만 가능하다.
발몽과 메르테유의 사업과 음모의 배경에는, 사랑은 '기계적으로 산출되고 규제될 수 있다는, 사랑의 '불꽃'은 사람 마음에 따라서 타오를 수도 쇠약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이 놓여 있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이 그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기로 결심하며, 전략을 구성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이행한다. 그 어떤 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투르벨 부인은 실제로 그와 사랑에 빠진다. 믈라덴 돌라르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가정은 18세기 유럽 문학의 중심 주제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시 판 투테>5)를 분석하면서 돌라르는 이를 보다 일반적인, 기계에 대한 - 계몽운동의 자율적 주체성에 대한 대응물로서의 I'homme-machine (인간기계), 혹은 '자동기계' 모델에 대한 매혹과 연계시킨다. 이러한 주제설정에 따르면 '가장 숭고한 느낌이라도 결정론적 법칙에 의해 기계적으로 산출될 수 있으며, 실험적이고 합성적인 방식으로 야기될 수 있다'?" 이를 아는 사람(<코시 판투테>에서는, 철학자)은 이 기계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으며, 바라는 어떠한 결과라도 산출할 수 있다.
라클로의 소설에서 이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메르테유 후작부인이다. 예컨대 편지 106에서 그녀는 세실 같은 여자는 'machines a plaisir', 즉 '쾌락을 주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렇게 덧붙인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이러한 기계의 용수철과 동력장치에 금방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기계를 위험없이 사용하려면, 재빨리 이용해서 일찌감치 멈추게 한 후, 곧 부서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p. 254[358쪽]). 그렇지만 이러한 지식은 특권화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 “평범한 지식'이 될 때 그것은 급속하게 그 힘과 효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위험한 관계』의 우주 속에서, 자율적 주체를 자동기계나 쾌락기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메르테유는 또한 이 비주체들을 지칭하기 위해 'espèces"[족속들]라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espèces는 조작될 수 있으며, 또한 다른 것과 등가적이고 대체가능하고 교환가능한 사물처럼 취급될 수 있는 사람-기계들이다. 다른 편에 우리는 메르테유가 scélérats('악한 사람들)이라 부르는 것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8) 오로지 scélérat 만이 대상, 기계 혹은 사물의 지위 너머로 오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 그리고 이는 핵심적인 18세기의 주제로서 간주될 수 있을 것인데 - 자율로의 길은 악으로 통한다, 즉 ('우연적인 악'으로서 뿐만이 아니라)'윤리적 태도'로서의 악, 하나의 기획으로서의 악 말이다. 지식 그 자체로는 충분치 않다. 사실 그것은 우월성의 근거이다. 하지만 이 우월성이 유효하려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요구된다. 악을 위한 결단, 그리고 결과에 상관없이, 심지어는 자신의 안녕을 희생하더라도 그것을 고집하는 힘 말이다. 우리 논의의 목적상 『위험한 관계』의 매우 흥미로운 측면은 투르벨 부인에 대한 발몽의 유혹의 성격이다. 발몽의 목적은 단순히 그녀와 ‘밤을 보낸다'는 의미에서 투르벨 부인을 '정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계획의 부산물일 것이다. 발몽이 투르벨 부인과 더불어 착수하는 기획은 사실상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기획들과 꼭 같지는 않은 것이다. 투르벨은 결혼을 했을 뿐 아니라 '행복하게'결혼했다. 그녀의 정조와 충실은 '진정한’것이다. 그녀의 정조와 충실은 -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의 경우처럼―꾸민 것이 아니며 주어진 사회적 규범과 가치들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발몽은 투르벨을 단지 '하나 더'로서 접근하지 않으며, 발몽의 변덕스러운 식욕을 위한 또 하나의 맛있는 식사거리로서 접근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나아가, 발몽이 실로 발몽이 되는 것은 오로지 투르벨 부인의 유혹을 통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발몽은 단지 돈주앙의 또 다른 판본에 불과하며, 한 여자 다음에 또 한 여자를 '정복'하는 지칠 줄 모르는 유혹자이다. 투르벨 부인을 유혹함으로써 발몽은 유혹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다. '하나하나'(혹은 오히려, 셋셋)의 논리는 '부분부분’의, 즉 조금조금의 논리 - 목표를 향한 무한한 접근의 논리 - 에 길을 내준다.
발몽의 사업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은 투르벨 부인의 고결한 품성 때문만은 아니며 또한 그리고 특히 발몽 자신이 이 기획을 위해 설정한 조건들 때문이다. 그가 말하기를, 승리는 완벽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투르벨 부인이 혼돈스러운 열정의 순간에 그의 유혹 노력에 굴복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뜻한다. 오히려 그녀의 굴복 행위는 반성과 냉정한 결단의 결과이어야만 한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을 espèces의 층위에서, 즉 다른 모든 여자들의 중위에서 쾌락을 위한 기계들의 층위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결정적 한 걸음을 내딛을 때, 이 한 걸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행위의 결과가 무엇일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수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투르벨 부인을 주체로서 원한다.
발몽이 그에게 주어진 기회의 이용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가 투르벨 부인을 '고상한 행위'로'누그러뜨릴 때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투르벨이 자신을 '감시'하도록 지시했음을 알고 있는)발몽은 인근 마을로 가서 어떤 아주 가난한 가족이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도록 ‘관대하게' 구제해준다. 그는 이 일을 메르테유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만일 내가 오래 전부터 품어온 계획을 저버리고 설익은 승리를 거두어서 오랜 시간에 걸친 투쟁의 매력과 공들여 상대를 패배시키는 일의 매혹을 모두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자칫 상실한다거나, 혹은 내가 철없는 욕정으로 산만해져서 투르벨 부인의 정복자가 명부에 이름 하나 추가하는 별볼일 없는 공훈 말고는 자신의 노고에 대해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면,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이 얼마나 약한 것이고, 상황의 지배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입니까. 아! 그녀가 항복하기를, 하지만 싸워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나를 패배시킬 힘은 없다 하더라도 대항할 힘은 갖고 있기를,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을 천천히 맛보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발견한 사슴을 매복해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기습해 죽이는 것은 변변치 못한 밀렵꾼이나 하는 짓입니다. 진정한 사냥꾼은 궁지에 몰아 사로잡는 법이지요”. (p.63[78~79쪽])
여기에 그는 다음을 덧붙인다: Ce projet est sublime, n'est pas? (숭고한 계획이지 않습니까?)이 구절은 몇 가지 점에서 논평할 가치가 있다. 우선 발몽은 한 명의 인간, (욕정에 거의 휩쓸려버리는) ‘정념적 주체'로서의 그 자신과 '전문가'로서의 그 자신의 차이를 요약한다. 발몽이 '투르벨 부인의 정복자', 즉 '전문가'로서의 그 자신을 거의 위험에 빠뜨린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 개인과는 무관한 듯 냉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 '위험'에 대한 그의 정의다. 그는 그가 유혹한 여자들의 '명부에 이름 하나더 추가하는 별볼일 없는 공훈 말고는 자신의 노고에 대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투르벨 부인을 향한 발몽의 의도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결정적인 물음은 그가 그녀를 '가질' 것인가 그러지 못할 것인가가 아니다. 결정적 물음은 그가 그녀를 올바른 방식으로 '가질 것인가이다. 달리 말하자면 : 승리 그 자체는 승리를 위해 충분치 않다. 사슴을 기습해 죽이는 '변변찮은 밀렵꾼'의 승리는 사슴을 궁지에 몰고 기습의 효과를 이용하지 않는 '진정한 사냥꾼'의 승리와 별개의 것이다.
이야기에서 나중에 발몽에게 또 다른 기회가 제공되는데, 다시금 그는 그 기회를 취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메르테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 설명한다. '아시다시피 나는 이제 완전한 승리를 필요로 할 뿐, 우연한 상황에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으니까요'(p.232[327])
다른 편지에서 그는 이와 유사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편지 6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가책의 원인이 되고 이어 그 가책의 치유자가 되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부인을 사로잡은 편견을 지워버리려는 생각은 내게는 추호도 없습니다! 이 편견은 도리어 나의 행복과 명예에 보탬이 돼줄 것입니다. 부인은 정조를 믿겠지만 나를 위해 희생할 것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보고 두려워해도 그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pp. 33~34[35]
편지 70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나의 계획은 그 여자가 나에게 바치는 하나하나의 희생의 가치와 영향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빨리 끌고 가지 않으면서, 그 여자를 천천히 괴롭히면서 정조를 함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음침한 광경을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보게 하는 것입니다. (p. 150[205-206])
이제 우리는 발몽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투르벨 부인이 어떤 한 걸음을 내딛도록 하며, 그런 다음에 그는 멈추고 후퇴하여 그녀가 이 한 걸음의 함축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자신의 위치의 의미를 완전하게 깨닫게 되기를 기다린다. 여느 때의 발몽의 절차가 한 여자를 유혹하여 그녀가 스스로 ‘명예를 더럽히도록’ 만들고 그런 다음에 그녀를 저버리고 (가능하다면)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투르벨 부인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무언가를 시도한다. 그는 그녀의 현실적 파멸 이전에 그녀를 ‘파멸시키려 한다. 다시 말해서 발몽은 투르벨 부인을 ‘두 죽음 사이’의 영역으로 체계적으로 내몬다. 세 편의 18세기 소설-『신엘로이즈』, 『클라리사』, 『위험한 관계』에 나오는 '비극적' 여주인공들에 대한 연구에서 로잰 룬트는 세 여자(줄리, 클라리사, 투르벨 부인) 모두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 모두는, 어떤 지점에서, 산죽은 living dead 것과 연결된다. 과장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단지 『위험한 관계』뿐 아니라 18세기 일반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이 주제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될 수 있으므로, 18세기 너머에서도 마찬가지다. 발몽이 투르벨은 '저 음침한 광경을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보아야 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필시 우리에게 또 다른 이번에는 영화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킬 것이다. 즉 영화 <죽음의 카메라> Peeping Tom 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살해된 일련의 여자들 주위를 선회한다. 그 여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죽은 그들의 눈은 절대적 공포의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단순히 겁에 질린 희생양의 표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얼굴에 있는 공포는 상상불가능한 것이며, 그 살인 사건들을 수사하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수수께끼 같은 표정은 수사의 주요 단서가 되는데, 이는 희생양들이 죽기 전에 본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무엇이 그들에게 그와 같은 공포를 심어주었는가에 달려 있다. 살인자는 일종의 괴물이라든가 괴물 같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이 답이 될 것이라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으로 판명되는바 희생양들은 살해당하고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본 것이다. 살인자의 무기는 두 개의 길고 가위 같은 모양의 칼날이며, 그 끝에 거울이 부착되어 있어서 희생양은 자신을 관통하는 칼날을 볼 수가 있으며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살인자는 직업적인 영화제작자로, 자신의 희생양들을 영화의 일부를 위한 '스크린 테스트’를 하는 척 하면서 적당한 위치로 유인한다. '스크린 테스트'를 하던 어떤 시점에 살인자는 카메라 지지대 끝에서 두 칼날을 꺼내고 희생양을 죽이기 위해 이동해 들어가는데, 그 동안 희생양은 다가오는 렌즈 둘레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희생양이 자신이 죽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훔쳐보는 톰Peeping Tom은 이 모두를 촬영한다. 특별히 희생양의 공포의 표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이다. 그의 강박은 단순히 여자살인 강박과는 거리가 멀다. 발몽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은 '숭고한 계획'의 불가피한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훔쳐보는 톰이 원하는 '전부'는 희생양의 얼굴에 있는 궁극적 공포의 표정을 촬영하는 것이다(그리고 나중에 '평화롭게' 그것을 연구할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의 향유는 타자가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여기서 응시는 말 그대로 그의 환상의 대상이다.
이 시나리오는 발몽의 향유와 그의 투르벨 부인에 관한 계획의 전형을 보여준다. 발몽은 그녀가 죽기 오래 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의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죽음이 그 표식을 살아 있는 유기체에 남기기를 바라며, 희생양이 - 말하자면 - 죽음을 살도록 강제되는 지점에 이르게 되길 바란다. 바로 이것을 발몽은 다음과 같이 외치면서 말하고 있다: ‘가엾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La pauvre femme, elle se voit mourir), 그를 그토록 매혹시킨 것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발몽이 자신의 기획은 '숭고한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사는 것’과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엾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의 배후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외침은 다름아닌 ‘복많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즐기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 ('L'heureuse femme, elle sevoit jouir)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라캉이 파악하고 있는 바로서의 도착적 위치의 전형적 경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도착증자에게 걸려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한 향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즐기도록 하는 것이며, 타자가 결여하는 잉여-향유를 제공함으로써 타자를 완성하는 것이다.도착증자는, 그가 타자의편에서 나타나도록 만드는 향유의 도움으로, 타자가 '완전한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이미 본 것처럼, 타자를 주체화하려는 이러한 의도는 소설 속에 매우 명백하다.
영화 <죽음의 카메라> Peeping Tom , 희생양들은 살해당하고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본다. 촬영자의 향유는 타자가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발몽이 말하는 ‘가엾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의 배후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외침은 다름아닌 ‘복많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즐기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 ('L'heureuse femme, elle sevoit jouir)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라캉이 파악하고 있는 바로서의 도착적 위치의 전형적 경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도착증자에게 걸려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한 향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즐기도록 하는 것이며, 타자가 결여하는 잉여-향유를 제공함으로써 타자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scelerat 만이, '악한 자만이 자율적 주체의 층위에 도달할 수 있는 반면에 나머지 모두는 한낱 기계나 사물에 머문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발몽의 희생양인 투르벨 부인 역시, 어떤 순간에, 한낱 기계 뭉치인 espèces의 층위에서 고양된다.
우리는 이미 espéces와 scélérat에 대한 메르테유의 구분을 언급했다. 우리는 scelerat 만이, '악한 자만이 자율적 주체의 층위에 도달할 수 있는 반면에 나머지 모두는 한낱 기계나 사물에 머문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발몽의 희생양인 투르벨 부인 역시, 어떤 순간에, 한낱 기계 뭉치인 espèces의 층위에서 고양된다. 그리고 그녀를 그처럼 승격시키는 것은 바로 그녀를 고문하는 자이다. 그의 손 안에서, 그가 그녀에게 가하는 고문들을 통해서, 희생양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을 통해서, 그녀는 주체가 된다. 여기서 소설은 투르벨의 '첫 번째 죽음'그녀가 최종적으로 발몽을 선택하고 ‘자신을 내던지는'순간—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라클로는, 발몽의 펜을 통해서, 투르벨 부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 여자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똑같은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을 듣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한 곳을 응시하면서 눈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요'(p. 303[428]). 이것은 콩디약의 조상11), 즉 새로운 (새로 태어난) 주체의 형상으로서 무에서 이제 막 다시 시작하려 하는 조상의 완벽한 이미지이지 않은가?
윤리와 관련하여 여기서 특별히 우리의 흥미를 끄는 소설의 다른 측면은 발몽이 메르테유 후작부인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출현하는 발몽의 욕망과 죄라는 문제이다. 어떤 지점에서 발몽은 후작부인과의 관계 혹은 계약을 배반하고 그리하여 그의 “윤리’와 '의무'를 포기한다. 이야기의 이 측면은 유명한 편지 141에 응축되어 있다. 그 편지에서 메르테유 후작부인은 편지-속의 - 편지를 쓴다. 나중에 발몽은 그것을 베껴서 투르벨 부인에게 보내게 된다. 우리는 모든 생각들이'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ce n'est pas ma faute')라는 구절로 결론이 나는 유명한 ‘수사학적’ 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천사여, 사람이 어떤 일이든 거기에 흥미를 잃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 제 탓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난 4개월 동안 미칠 듯이 몰두했던 연애에 대해 지금에 와서 제가 흥미를 잃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지나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가 당신의 정조와 똑같은 정도의 사랑을 갖고 있다면, 당신의 정조가 사라짐과 동시에 제 사랑이 식어버렸다 해도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얼마 전부터 당신을 속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어떻게 다룰 수 없는 당신의 애정의 강요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런 것이지 제 탓은 아닙니다.
오늘, 제가 미칠 듯이 좋아하는 어떤 여인이 당신을 버리라고 요구하는군요. 하지만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거짓 맹세를 질책하기에 좋은 기회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남자에게 지조를 주고, 여자에게 고집을 준 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제발 제가 다른 정부를 택하듯, 당신도 다른 애인을 택하십시오. 이것은 좋은 중고입니다. 정말 좋은 중고입니다. 당신이 이충고를 나쁘게 생각해도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그럼 안녕, 나의 천사여.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당신과 후회 없이 헤어지겠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되돌아갈지도 모르지요. 세상이란 그런 것, 제 탓이 아닙니다”.(pp. 335~336[476~477쪽])
그건 발몽의 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며, 투르벨 부인 자신이 그가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여자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자연이 남자에게 지조만을 주었기 때문이며, 세상이란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논변의 수사학은, 점차로 논변 자체의 토대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다. ‘제 탓이 아닙니다.(즉, '나는 달리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의 완고한 반복은, 그것이 그렇게 되길 발몽이 원하기만 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투르벨 부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그 무엇이다. 이 편지를 읽을 때 그녀는 자신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추구한 바로 그것을 상실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것은 (윤리적) 주체되기 과정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이 편지는 치명적인 편지이며, 발몽이 말 그대로 투르벨 부인을 살해하는 중상中傷의 편지다.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이 편지는 메르테유 부인이 발몽의 ‘칼’을 이용해서 투르벨 부인을 살해하는 편지다.12)
발몽은 이 에피소드로 인해 완벽한 ‘젖먹이’가 된다. 메르테유는 그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 놓는다.
“그래요, 자작님, 당신은 투르벨 부인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요. 당신은 그 여자를 미칠 듯이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재미 삼아 놀려주니까 당신은 용감하게도 그 여자를 희생시켰습니다. 당신은 놀림거리가 되기보다는 투르벨 부인 같은 여자를 천 명이라도 희생시켰을 거예요. 자존심이란 정말 무서운 거예요. 자존심이란 행복의 적이라고 옛 성현들이 말씀하셨다는데 정말 그 말이 옮긴 옳군요”. (pp. 340~341 [484])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은 후작부인에게도 냉혹한 깨우침으로 귀결된다. 발몽은 단지 그의 '자존심 때문에 그녀에게 이끌리는 것이라는 그녀의 오랜 가정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임이 증명되니까 말이다.
발몽이 투르벨 부인과 진정으로 사랑에 빠져 있음을 메르테유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그 결정적 순간은 어느 곳인가? 정확히 발몽이, 자신의 말대로, 투르벨 부인을 희생시킬 때. 이 희생은, 희생이기 때문에, 투르벨 부인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증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다. 투르벨을 잃은 것은 희생이었다는 발몽의 인정으로까지 이르게 되는 그 게임의 무대에서 메르테유는 투르벨 부인에 대한 그의 실제 감정을 발견할 완벽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녀는 ‘욕망과 죄'라는 등록소에 그를 위한 함정을 놓는다. 그녀의 물음은 둘 모두가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규칙들을 발몽이 '객관적으로' 깨뜨렸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결정적인 물음은 그가 그 규칙들을 ‘주체적으로’, 그의 욕망의 층위에서 깨뜨렸느냐의 여부이다. 따라서 메르테유가 놓은 함정의 요점은 발몽이 투르벨 부인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그가 희생으로 간주하느냐의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다. 물음은 발몽이 '객관적으로' 잘못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물음은 그가 죄를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죄를 느낀다면, 후작부인에게 그는 죄가 있는 것이다. 메르테유는 발몽이 죄가 있을 경우 그녀의 도발에 대해 그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바로 그대로 반응할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발몽이 죄를 느낀다면 초자아의 논리는 그가 그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취하여 그것을 희생하도록 자동적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는 또 다른 ‘뒤틀림’이 있다. ‘그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라는 문구는 원래 메르테유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리하여 여기 나오는 것은 단지 ‘편지-속의-편지에서 베낀 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의 기원에는 또 다른 편지가 있다. 발몽이 투르벨 부인에 대한 ‘성공’이후에 메르테유에게 쓴 편지 말이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끝까지 고집하겠습니다.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요.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 역할을 맡도록 강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p. 328[466쪽]).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라는 표현을 후작부인에게 보낸 발몽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바로 이 문구 때문에 메르테유는 상황의 심각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녀는 어떤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발몽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그 구절에 반응한다. 그 친구는 발몽처럼 계속해서 어리석은 일들을 하면서 나중에 그게 자기 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발몽이 메르테유의 편지에서 베껴서 투르벨 부인에게 보낸 바로 그 이야기, 즉 우리가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그 편지인 것이다.
메르테유는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라는 바로 그 문구가 죄에 대한 인정의 가장 순수한 형식임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어요', '나는 그것을 회피할 수 없었어요', '그건 내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어요' 같은 주장들은 그 기저에 놓인 논리 때문에 주체의 죄에 대한 가장 좋은 증언이라는 것을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주장들은 주체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cédé sur son désir)’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욕망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 그 어떤 것을 정의해보자면, 욕망은 '자연의 법칙'에, 어떻게 '세상이 돌아가는가’에, 혹은 '환경의 힘'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욕망의 논리'를 후작부인과 발몽의(원래)기획에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따라서 메르테유는 발몽이 다름아닌 그녀에게 그처럼 김빠진 구실을 댈 때 그것을 터무니없는 모욕으로 간주한다. 그녀가 발몽에게 보내는 편지 속의 편지(발몽은 나중에 그 편지를 베껴서 투르벨 부인에게 보낸다)는 투르벨 부인의 '가슴을 찌르는 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발몽에게 이러한 종류의 수사학은 자율적 주체가 아닌 한낱 자동기계에게나 어울리는 것임을 상기시켜주는 그 무엇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계적인 인간 피조물인 espèces는 이러한 종류의 ‘치명적 헛소리’로 놀림당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를 자율적 주체라고 믿는 사람이 그와 같은 구실을 또 다른 자율적 주체에게 사용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그 무엇이다. 메르테유의 노여움은 발몽이 감히 그녀에게 '그건 내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 때문에 발몽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 때문에 생겨난다. 그는 단순히 그와 같은 불충분한 구실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또한 그녀가 그것을 '구매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그녀를 과소평가한욕망의 법칙에 관한 이러한 요점은 『정신분석의 윤리』에 나오는 라캉의 설명과 일치를 이룬다.
그것을 묵인한다면, 배신 속에서 무언가가 소진된다. 선의 관념에 이끌려 …… 자기 자신의 주장들을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그래,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우리 입장을 포기해야 해.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지는 않지. 특히 나는 말"이야. 그러니 평범한 길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한다면 말이다. 거기서 당신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양보의 구조라는 것을 당신은 확신할 수 있다. 내가 타자에 대한 경멸과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을 단일한 항목으로 결합시킨 저 경계를 일단 넘게 되면, 돌아올 길은 어디에도 없다.13)
발몽에게 일어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그 어떤 되돌아옴도 없는 길로 발을 내딛는다. 더구나 그는 그것을 (라캉의 설명과 일치하게도) 정확히 선의 이름으로 행한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을 때 발몽은 그의 최후 보루로 필사적으로 후퇴한다. 그는 후작부인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그는 그녀에게 결혼한 배우자에게 쓰는 편지와도 흡사한 질투의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서 그는 그녀와 당스니의 정사를 그와 투르벨의 정사와 같은 층위에 놓으며 말하자면 상호 용서를 제안한다. 후작부인이 이 거래를 단칼에 거절하고 또한 '공간'에 가까운 그것의 합의(당신이 나를 잃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역시 거부한 이후에, 발몽은 또 다른 편지에서 메르테유 또한 '그녀의 욕망에 대해 양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 모두 파멸할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편지 152에서 그는 그녀에게 대강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각각은 상대방을 파멸시키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우리가 우정과 평화를 재확립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그런 일을 하겠나? 선택은 당신의 것이지만, 당신은 부정적 답이 전쟁 선언으로 간주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메르테유의 응답은 이렇다. 좋다, 그건 전쟁이다. 그리하여 후작부인은 끝까지 자신의 의무에 대해 충실하게 남아있으면서 상호 배신에 대한 발몽의 제안을 용납하길 거부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다. 그녀는 그녀의 욕망을 포기하기를 거절한다.
"내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는 것'이라 부르는 것에는 언제나 주체의 운명 속에서 어떤 배반이 동반된다. …주체가 자기 자신의 방식을 배반하거나… 혹은, 좀더 간단히, 주체는 함께 어떤 일을 하기로 맹세한 누군가가 그의 희망을 배반하고 그들간의 협약이 함축하는 일을 그를 위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용한다. 그 협약이 무엇이건, 운명적이건 불운한 것이건, 위험한 것이건, 근시안적인 것이건, 혹은 참으로 반역이나 도주의 문제이건 이는 중요치 않다”.
발몽이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 역할을 맡도록 강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라고 쓸 때 그는 이전까지 하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게임을 시작한다. 우리는 그가 겪고 있는 그 변동을 '도덕법칙'(즉, 그의 주체성을 규정하는바, 그가 자신의 원칙으로서 채택하는 입장에 연계된 법칙)의 관점으로부터 초자아의 법의 관점으로의 변동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동은, 무엇보다도, 그가 후작부인의 편지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가시적이다. 그는 자신의 죄를 전적으로 의식하고는 있지만, 그에 대해 완전히 오산하고 있다. 그는 투르벨 부인의 포기를 그가 자신의 옛 방식을 되찾고 후작부인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로 이해한다. 그는 그가 무엇을 하든 일이 더 나빠지기만 할 뿐임을 보지 못한다. 후작부인은 그가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요점은 이러한 희생이 그의 죄에 대한 궁극적 증거라는 것이다. 그가 투르벨을 포기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는 '기술적 문제'이다. 그가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 무엇을 하건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이거나 너무 적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여기서 우리가 초자아를 다루고 있는 것임을 확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그에게 요구되는 희생을 하며, 그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을 거부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단지 초자아의 덫에 더욱더 얽히게 될 뿐이다. 그가 후작부인에게 투르벨 부인을 다시 손에 넣는 것 그 단 한가지만이 그에게 더 큰 영예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쓸 때 바로 그 만큼은 분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발몽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행위이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한 번 더의 노력'을 (영원히) 해야만 한다.
돈주앙의 경우
돈주앙(여기서는 이 신화의 가장 세련된 판본 중 하나인 몰리에르의 희곡에 초점을 맞추겠다)을 악마적인 악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방탕한 삶, 그의 죄많음이 아니다. 그의 입장의 ‘악마적’성격은 - 악마적인 악에 대한 칸트의 정의에서처럼―그가 대표하는 악이 단순히 선함의 반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리하여 (통상적인)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 이는 물론 '악’에 대한 그의 고집이 항상적이라는 사실에, 즉 그것이 강령의 형식을, (기존의) 도덕규범에 대한 ‘원리화된 비순응’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몰리에르의 희곡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거기서 스가나렐르(돈주앙의 여행에서 돈주앙과 동행하는 하인)는 선을 믿으며 또한 죄를 혐오하고 신을 믿지만 그와 동시에 수많은 양보를 기꺼이 하고 돈주앙과는 달리 즉각적 필요나 편의에 따라서 자신의 원칙들을 굽히는 사람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돈주앙의 입장은 위반과 부정(대립, 반역, 논쟁)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아니오'는 그에게 제공되지만 그가 일관되게 거부하는바 회개와 은총에 대한 ‘아니오’이다. 그의 입장은, 몇몇 해석가의 제안처럼, '그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고 하는 '계몽된 무신론자의 입장이 아니다. 카미유 뒤물리에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정확히, 내 견해로는 무신론자는, 우리가 '진짜 증거'를 그에게 제공할 수만 있다고만 한다면, 실제로는 단지 믿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15) 무신론자가 신성한 존재에 대한 입수가능한 최초의 '물질적 증거를 탐욕스럽게 움켜잡으려' 하고 그리하여 열정적 신자가 되는 것은 무신론자의 태도에 내재하는 것이다. 물론 돈주앙은 이러한 유형의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하늘에 의해 그는 신의 존재를 확증하는 다량의 실체적 증거'(움직이고 말하는 석상, 형태를 바꾸고 시간이 되는 여자의 환영 등등)로 말그대로 폭격을 당한다. 이는 가장 경직된 무신론자라도 납득시킬 증거이지만 이러한 증거에 직면하여 돈주앙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늘과 돈주앙 사이의 '소통'에 기본적인 오해가 있지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돈주앙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가 믿는 전부는 둘 더하기 둘은 넷이고 둘 곱하기 넷은 여덟이다'라는 것이다. 이 유명한 진술은 보통은 그의 무신론과 냉소주의에 대한 가능한 한 가장 분명한 표현으로서 간주된다. 하지만 데카르트적 우주에서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돈주앙의 우주이기도 하다-둘 더하기 둘은 넷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직한 신만이 이 '수학적 진리'가 영원하며 불변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수학의 진리가 불변으로 남아 있는 것이 돈주앙에게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번에는 모차르트의 돈지오반니로서) 중요한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탈리아에서는 640+ 독일에서는 231 + 프랑스에서는 100 + 터키에서는 91 + 스페인에서는 1003. (따라서 Mille e tre[1003], 즉 그 유명한 돈주앙적 숫자는 스페인에서의 그의 정복만을 고려에 넣은 것이다. 그의 목록을 다 더한다면 2065라는 숫자를 얻는다. 총계뿐만 아니라 각각의 나라에서의 '성과’를 고려할 때 우리는 - 키에르케고르가 이미 지적했듯이 그의 숫자 대부분이 홀수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231, 91, 1003, 2065). 결과적으로 이러한 숫자들의 효과를 라캉이 pas-toute [불완전, 비-전체]라 부르는 것과 연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돈주앙이 '완전한' 수(100)로 정복을 이루는 유일한 나라가 프랑스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아주 놀랍게도 돈주앙의 진정한 정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성적 관계'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더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신화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라캉을 기다려야만 했다.돈주앙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 믿는다 (혹은 심지어, 완전하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바로 이것이 그의 입장을 그토록 추문적이고, 참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악마적으로 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건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dramatis personae 가운데 하나인 것이 분명한 하늘을 포함해서) 희곡 속의 모든 등장인물은, 돈주앙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최고 심판관의 존재를 믿지(혹은 알지)못하기 때문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돈주앙이 신의 존재를 깨닫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우주 속에서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누군가가 신을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돈주앙이 체화하고 있는 바로 그 분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그가―그에게 제공된 그 모든 실체적 증거와 은총에도 불구하고―그의 최후의 ‘아니야, 아니야!’를 내뱉는 순간에서야 (공동체에게) 전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이건 어떤 다른 ‘무신론자’이건 죽기 전에 ‘결국 앞에 뭐가 놓여 있는지를 알 수는 없는 일이지. 만약을 대비해서 그렇게 하자'라고 말하면서 뉘우치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하는 진부한 말 너머로 나아간다. 돈주앙은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앎에도 불구하고 그가 뉘우치기를 거부하고 ‘안전하게 놀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요점인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에 따르면, (또 한명의 악명높은 ‘무신론자'인) 볼테르가 한번은 교회를 지나가면서 인사차 모자를 만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나중에 이를 목격한 사람은 볼테르에게 어떻게 공공연하게 무신론자라고 자처한 그가 교회 앞에서 모자를 벗을 수 있는 것인가를 조롱하듯 물었다. 볼테르는 놀란 얼굴로 답했다: '신과 내가 말을 건네는 사이가 아니라는 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인사는 합니다.'이 이야기는 또한 돈주앙의 태도를 묘사하는 것으로서 취할 수 있다. 몰리에르의 희곡에서 돈주앙과 그의 하인 스가나렐르가한 가난한 남자를 만나는 숲에서의 장면은 이와 관련하여 가르쳐주는 바가 있다.
'가난한 남자: 나리, 적선하시는 셈치고 동냥을 좀.
돈주앙 아! 아주 타산적으로 나오는군.
가난한 남자: 나리, 저는 가난한 자로 10년 전부터 이 숲에 혼자 묻혀삽니다. 나리에게 온갖 행운이 있기를 하늘에 빌겠습니다.
돈주앙: 다른 사람의 걱정은 말고 네 옷이라도 한 벌 내려주시라고 기도해라.
스가나렐르: 이봐요, 당신은 나리를 잘 몰라. 이분은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되고, 넷에다 넷을 하면 여덟이 된다는 것밖에 믿지 않으셔서..
'돈주앙· 이 숲속에서 뭘 하고 사나?
가난한 남자. 저에게 뭔가 동냥을 주시는 분들의 번영을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돈주앙: 그럼 너도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가난한 남자: 그런데 나리, 무척 고생하고 있습니다.
돈주앙: 농담이겠지. 밤낮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인간이라면 그 자신의 일이 잘 안 될 리가 없지 않아.
가난한 남자: 정말입니다. 나리, 목구멍에 들어갈 빵조각 하나없는 날이 많으니까요.
돈주앙: 이상한 얘기군, 네 마음씨가 하늘에 통하지 않나 보지. 아! 어디 한번 저주를 해봐, 이 1루이 금화를 줄 테니까.
가난한 남자: 나리! 그런 죄를 저더러 지라는 겁니까?
돈주앙: 그래, 1루이 금화를 버느냐 안 버느냐다. 자, 여기 있어. 네가 저주하면 줄 테다. 자 저주해 봐.
가난한 남자: 나리! ………………
돈주앙: 저주하지 않으면 주지 않겠어.
스가나렐르: 자, 조금만 저주해봐, 별로 나쁠 것 없지 않아.
돈주앙: 자 가져, 이 금화를, 자 가지라니까, 하지만 저주를 해야해..
가난한 남자: 아닙니다, 나리, 굶어죽는 게 낫습니다.
돈주앙: 자, 자, 인류애를 위해 너에게 이걸 준다.
이 에피소드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완전히 대립되는 두 개의 해석을 열어놓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돈 주앙은 가난한 남자와의 조우에서 완전히 패배한 채로 빠져나온다. 가난한 남자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돈주앙이 경멸하면서 믿지 않는 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돈주앙에게 증명해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돈주앙의 마지막 제스처―그가 결국 그 가난한 남자에게 돈을 준다는 사실ㅡ는 창피를 당한 주인이 남아 있는 자신의 존엄과 자존을 구하기 위해 취하는 필사적인 제스처로서 기능한다. 주인만이 그토록 관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며, 누구든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마음에 드는 어느 때건 돈을 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의 장면에서 주인(돈주앙)을 노예(가난한 남자)와 구분시켜주는 유일한 것은 이와 같은 ‘자비’의 제스처인데, 주인만이 그러한 것을 베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동일한 장면은 돈주앙의 승리로, 즉 자기 자신의 태도에 대한 축성祝聖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가난한 남자가 단순히 돈주앙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둘은 동일한 언어를 말한다. 돈주앙은 동등한 맞수와 조우하며, 그의 사진술의 용어로 '양화 positive'와 조우한다. 여기 걸려 있는 것은 '최고선'과 '최고악’의 조우인바, 그 둘은 동일한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섬뜩한 닮음은 돈주앙과 가난한 남자 각각의 주장을 스가나렐르의 권유와 비교할 때 특별히 두드러진다. 스가나렐르는 ‘자, 조금만 저주해봐, 별로 나쁠 것 없지 않아'라고 하면서 권유한다. 이는 그 자체로 (공동)선의 의례적 논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이러한 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고집은 그 무언가가 그 자체로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하는 교란적인 어떤 것으로서 자동적으로 지각된다. 저주를 하는 것은 악하지만, '조금이라도 저주를 하느니’차라리 죽겠다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위험한, ‘불온한’요소를 누설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뉘우쳐야 할 ‘손에 잡히는’이유들을 이혼에 찬성하라는 헨리8세의 압력에 저항한 카톨릭 성인 토마스 모어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족하다 ......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우직함은 '비합리적인 자기파괴적 제스처였으며, 사회체의 직조를 자르고 들어가 왕권의 안정을 위협하고 그로써 전 사회질서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악한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토마스모어의 동기가 명백히 '선한' 것이었다 해도 그의 행위의 바로 그 형식적 구조는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었다. 그의 행위는 공동체의 선을 무시한 근본적 도전의 행위였다.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돈주앙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욕을 하지 않아야 할 그 어떤 '손에 잡히는 이유도 없지만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 다시 말해서 둘 모두는 그들이 똑같은 완고함으로 거부하고 있는 행위가 '손에 잡히는' 일체의 것(돈주앙의 경우는 신이 보내주는 신호, 가난한 남자의 경우는 그와 같은 신호의 부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주앙의 마지막 제스처, 즉 그의 자비의 제스처는 전적으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는 가난한 남자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집 때문에 주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더 이상 자비의 행위가 아니며, 오히려 노예에게서 자신과 동등한 자 - 또 하나의 주인ㅡ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주인의 제스처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상황을 이와 같이 읽는 것과 관련하여, 돈주앙의 태도에서 그토록 추문적인 그 무엇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어느 곳에서 그리고 어떤 편들 사이에서 이 변증법은 희곡 속에 등장하는가? 좀더 면밀하게 조사해보면 그것이 실제로 돈주앙과 신(하늘, 기사장의 석상)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는 특히나 『돈주앙』의 몰리에르 판본에서 그러한데, 그 판본은 으레 이야기의 시작으로 나오는 장면을, 즉 돈나 안나가 아버지의 죽음(돈주앙과의 결투에서 죽은 기사장)을 애도하고 복수를 외치는 장면을 빠뜨린다.
많은 해석가들은 몰리에르가 이 시작 장면을 잘라냄으로써 극작상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어 (돈주앙이 기사장의 석상과 마주하게 되는) 희곡의 결말이 그 본연의 동기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몰리에르가 이 누락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성취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로써 그가 드라마의 중심을 이동시킨 것이라고 말이다. 기사장의 석상은 더 이상 돈주앙에게 복수를 할 개인적 이유를 가진 누군가를 표상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그 끔찍한 석상을 하늘의 특사, 피안의 특사로서 인식한다. 이렇게 해서 또 다른 드라마가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돈주앙과 하늘 사이에서 발생하는 드라마이며, 그 속에서 돈주앙은 역설적이게도 '노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절대주인'인 죽음을 배경으로 한) 주인과 노예의 투쟁은 주인과 (기사장의 석상으로 구현된) 절대주인의 투쟁이 된다. 이러 관점에서 볼 때 돈주앙의 위치는 절대주인(죽음)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또한 실제 죽음과 상징적 죽음(영원한 저주)을 동시에 면할 수 있게 해줄 상징적 계약의 제안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노예의 위치이다. 비록 그가 '타자를 겨냥한 타격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타격이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그의 자세를 고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피안의, 타자의, 신의 히스테리화라 부를 수 있을 어떤 것을 초래한다. 극의 결말은 이러한 '히스테리화'를 가장 명료하게 무대올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의 사자들이 차례로 나타나 돈주앙에게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일러주고 뉘우칠 기회를 제안한다. 그가 고집스럽게도 거부하는 제안. 이 ‘피안으로부터의 개입들’의 의미는 라캉적 질문 'Che vuoi?"("당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뭐지?")를 가지고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의 압력하에 굴복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에 대해 양보하는 것에 대한 돈주앙의 한결같은 거부에 직면해서야 하늘은 무력해지며 주인으로서의 위치에서 추락한다. 이러한 무력함에 대한 최선의 표현은 돈주앙의 추문적 생애에 최종적으로 종지부를 찍는‘히스테리적 격발’이다.(‘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인다. 대지가 벌어지고 돈주앙을 삼킨다. 그가 사라진 구덩이에서 불꽃이 일어난다.) 불꽃, 천둥, 입을 벌려 돈주앙을 삼키는 대지 그 자체… 몇몇 해석가들은 이러한 장관의 희극적 효과에 이미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우리는 이 희극적 효과와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알고 있는 희극적 효과의 연관성을 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교사가 보통의 섬세한 수단으로는 더 이상 학급에서 ‘질서 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때 그 교사는 두려움이나 존중보다는 웃음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돈주앙』에서 천둥과 지옥불과 입을 벌린 대지가 권위의 현시들이라기보다는 권위의 추락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몰리에르의 『돈주앙>의 변별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이 여자들과의 관계를 보는 방식이다. 돈주앙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모든 여자들은 나의 아갈마의 몫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모든 여자들은 내가 그들의 것을 감미하도록 할 권리를 갖는다. 혹은 돈주앙 자신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
“어여쁜 여인들은 우리를 매혹할 권리가 있어. 처음에 만났다는 우월감으로 다른 여인들이 우리의 가슴에 호소하는 정당한 몫을 약탈해서는 안 되는 법.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여인에게 부당하게 대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나는 다른 여자의 매력을 보는 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그녀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바치는 거야. …마치 알렉산더 대왕처럼 나의 사랑의 정복을 넓히기 위해 다른 세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p. 202[18~19쪽])
요컨대 여기서 돈주앙의 추리는 순수 실천 이성의 근저에 있는 추리의, 도덕법칙이라는 보편적 언어의 왜곡이다. 그 왜곡은 그가 보편적 분배의 대상으로서 제공하는 것이 정의상 배타적인 바로 그 하나 – 사랑의 선물' – 라는 사실에 있다. 돈주앙은 라캉이 대상 a라 부르는 것을, 또는 그가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해석에서 아갈마라 부르는 것을 나눌 것을 제안한다. 신비의 보물, 주체가 주체 안에 가지고 있는 타자의 사랑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비밀의 대상을 말이다. 몰리에르의 희극적 천재comic genius는 이'향유의 실체의 보편적 분배’의 논리를 훌륭하게 포착한다. 이것은 희곡의 바로 시작부터 명백하다. 희곡은 담배에 대한 스가나렐르의 칭송에서 시작한다. 담배에 대해 스가나렐르가 말하는 것은,그 마지막 세부에 이르기까지, 돈주앙이 여자들에게 바치는 '경의와 찬사'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돈주앙이 그의 아갈마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는 그것을 주변의 모두에게 분배한다. ‘좌우로 베풀게’되며, 남이 꼭 청'하지 않아도 베푼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돈주앙의 아갈마의 고갈되지 않는 특성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그의 주변에 모여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 행복한 여자들. 그들은 실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다.’19) 키에르케고르는 돈주앙의 '고갈되지 않는 샘’이라는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주인공을 ‘자연의 힘’으로서, 감각성의 원리로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따라서 그는 돈주앙을 하나의 개인으로 보는 자들을 비난한다. 육감성 자체를 한 명의 개인에게 그처럼 응축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주인공에 대한 그러한 지각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돈주앙 신화에 유일하게 적합한 매체는 음악이며 유일하게 수용가능한 판본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몰리에르의 희곡을 전적으로 부적합한 것으로, 심지어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돈주앙을 (육감성의)원리로서 보는 해석이 돈주앙이 지닌 가장 흔동스럽고 추문적이며 '생각할 수도 없는 바로 그 차원 - 원리 그 자체가 돈주앙으로서, 한 명의 구체적 개인으로서 외양한다는 사실 - 을 현실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물음이 떠오른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돈주앙을 추상적 원리로서 이해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일종의 희작burlesque으로 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특히나 그 유명한 mille e tre에 이르러서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키에르케고르 해석의 약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제라고 간주하는 바로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이미 문제의 ‘해결’인지를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희작적 해결이긴 하지만, 바로 그 믿기지 않음을 통해서 그것이 해결하고자 하는 곤란을 증언하고 있는 해결. 다시 말해서, mille e tre는 물음(혹은 문제)이 아니라 답이다. 그것은 어떤 '기획의 결과이지 그것의 원목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과업이 아니라, 이미, 불가능한 과업에 대한 답이다. 그것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그리고 경험적이지 않은 어떤 곤궁에 대한 답이다. mille e tre가 경험적 불가능성이라면 근본적 불가능성은 또 다른 영역에 놓여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만 우리는 많은 관심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주앙 신화에 핵심적인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돈주앙의 신화는 사실상 『돈주앙』의 최초 판본이 나오기 오래전에 별도로 존재한 두 개의 신화의 합성이다. 첫 번째는 죽음과의 식사에 관한 신화 혹은 전설이다. 이 전설의 판본들은 어떤 세부들에서 차이가 있지만 기본 윤곽은 다음과 같다. 한 젊은 남자(보통은, 농부)가 길가나 들에서 두개골을 발견한다. 그는 그것을 묻어주지 않거나, 혹은 그 두개골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상징적 죽음'의 규칙들을 깬다. 그는 두개골을 발로 차며, 농담으로 두개골에게 같이 식사(몇몇 판본에서는 일상적 저녁 식사. 그리고 다른 몇몇 판본에서는 만찬의 일종―예컨대, 결혼 만찬)를 하자고 초대한다. (종종 해골의 형상을 한) 산주검 가운데 하나가 이 식사에 실제로 나타난다. 먹거나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초대를 되돌려주기 위해서, 즉 농부에게 죽은 자와 함께 식사하자고 초대하기 위해서. 두 번째 만찬, 즉 산주검의 만찬은 으레 침입자의 죽음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도덕적 훈계(앞으로는 죽은 자를 존중해야 한다)가 동반된 사면의 통고와 더불어 끝난다.20
두 번째 전설은 우리가 보통 돈주앙과 연관시키는 전설이다. 변덕스러운 유혹자, 귀부인의 남자 혹은 방탕꾼에 관한 전설. 돈주앙 이전에 힐라스21)가 프랑스에서 그와 같은 유명한 주인공이었다.
오늘날 돈주앙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우리가 자동적으로 돈주앙 신화의 이 두 번째 성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에 주목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실로 돈주앙이라는 이름이 어떤 연상을 떠오르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죽은 자에 대한 무시'라든가 '산주검과의 식사'라고 답할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신화의 성분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가려져 없어지는 이유를 탐사하기보다는 이 이중 구조가 돈주앙의 본질적이고도 구성적인 요소라는 것에만 주목하면서 이 구성성분으로서의 전설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종류의 무게를 그것에 부여하도록 하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돈주앙』에서 겉보기에 갈라지는 이 두 이야기들은 어떻게 해서 결합하게 되는가? 이러한 용해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죽은 자에 대한 모독과 여자들에 대한 연쇄 유혹은 무엇을 공유하는가?
우리는 여자들에 대한 연쇄 유혹을 어떤 곤궁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아야만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진정한 해결을 제공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만 진정한 추문-인류의 절반은 실제로 '산주검'으로, 즉 상징계에서 자신들을 적합하게 표상할 자신들의 기표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해결책으로 말이다.
돈주앙이 온갖 종류의 여자들과 잠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금발이건 거무스름하건, 키가 크건 작건, 뚱뚱하건 말랐건, 늙건 젊건, 귀부인이건 농부건, 마님이건 하녀건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를 포함해 어떤 해석가들이 지적했듯이, 이를 '잡다한 메뉴'에 대한 돈주앙의 선호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돈주앙의 태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모든 차이에 대한 그의 무관심이다. 돈주앙의 범례는 다양성이 아니라 반복이다. 그는 여자들 각각에 특별하고 고유한 그 무엇 때문에 여자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
그들이 여자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혹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돈주앙의 지각이 이러한 독해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몰리에르의 희곡에서 그는 '사랑의 모든 기쁨은 변화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변화를 위한 변화의 추구는 반복 강박의 가장 순수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사실 다름아닌 돈주앙 자신이, 그가 추구하는 변화는 새로운 여자가 아니라 '새로운 정복'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 정복 대상의 정체성은 여기서 소소한 중요성만 갖는 것이다. 항구적 변화의 중핵에는 하나의 동일한 제스처의 반복이 있다. 요약해보자. 돈주앙은 여자들을 생김새, '외모'와는 무관하게 즉 상상적 차원의 기준들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정복물들의 상징적 역할들과도 똑같이 무관하게(그들이 주인이건 시녀이건, 결혼을 했건 독신이건, 중요한 남자의 딸이건 누이이건, 아내이건 약혼녀이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유혹한다. 물음은 다음과 같다: 다른 무엇이 남아있지? 그 무언가가 도대체 남아 있는 것인가? 돈주앙의 전술 존재는 무언가가―비록 그 정체가 전적으로 비결정되어 있더라도―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여자(la femme)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악명 높은 진술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 진술의 여성주의적 충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에 토대를 둔 가부장적 태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사회를 '탈구된’ 상태로 던져버리려는 위협을 가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라캉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대는 분명 익숙한 것이다: '라캉의 견해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그가 지지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수천 년간 여자들을 압제해왔기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압제와 이러한 진술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제공하려 하기보다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행해야만 한다.'하지만 - la femme n'existe pas'라는 진술이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추문적이지 않은 것인 양 ㅡ라캉이 이 진술로 겨냥하는 것은 한층 더 추문적이다.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가부장적 사회의 압제적 성격의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결과'인 것이, 즉 이 사실을 처리하고 '극복하려는, 그 사실이 눈에 띄지 않게 통과되도록 만들려는 거대한 시도인 것이 바로 (여자들을 압제하는) 가부장적 사회이다.22) 결국 여자들은 이 사회에서 딸로서, 누이로서, 아내로서,어머니로서 완벽하게 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상징적 정체성들의 이 넘쳐남은 그것들을 생성하는 결여를 위장한다. 이 정체성들은 여자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무엇인지를 또한 명백하게 한다: 이 모든 상징적 역할들의 ‘공통 분모’, 이 모든 상징적 속성들 기저에 있는 실체. 이것은 돈주앙이 나타나서 이 실체를마치 은접시에 놓인 것인 양 23)그 자체로 (딸이나 누이나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로 가지겠다고 요구할 때까지는 완벽하게 잘 기능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야기에서 돈주앙의 행동에 가장 화를 내는 사람이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 희곡의 배경이 시칠리아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곳은 오늘날에도-가부장적 가치의 요람으로 간주된다. 돈주앙이 (명예가 더럽혀진 여자'의) 두 오빠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 역시 우연의 일치인 것이 아니다. 전형적인 '남자 쇼비니스트'에게 모욕을 줄 가장 좋은 방법이 그의 누이들의 성적 행위를 암시하는 것임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자신의 누이가 단지 자신의 누이인 것이 아니며, 그녀의 상징적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 '다른 무언가'는 통상 창녀라는 단 하나의 선택항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단순한 생각으로도 그는 미칠 지경이 된다. 이러한 종류의 모욕과 관련해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비록 내용적 층위에서는 여자에 대한 모욕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그 남자의 가슴을 찌르는 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실로 그러한 모욕들은 언제나 남자에게 가해진다). 모욕받은 남자의 대응을 볼 때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모욕이 그의 존재의 바로 그 중핵에서 그를 건드린다는 직감을 쉽게 얻을 수 있다.
'네 누이(혹은 어머니)는 창녀다'와 같은 모욕들은, 결국,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녀는 '불완전하다거나 '완전히 그의 것(toute à lui)'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속하게 상기시키는 말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24) 그리하여 요점은 '여자는 비-전체다'라는 언명이 여자들이 아닌 남자들에게 가장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의 상징적 역할들 속에 부여된 남자들 자신의 존재의 어느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니까 말이다. 살인까지 이르는 그리고 살인을 포함하는, 이러한 모욕들이 불러일으키는 극단적이고도전적으로 어울리지 않은 반응들이 이를 가장 잘 확증해준다. 그러한 반응들은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한다는 통속적 설명으로는 해명될 수 없다. 이러한 모욕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히 그의 소유물, 그가 가진 것what he has이 아니라 그의 존재, … 그가 (~)인 것what he is이다. 본론에서 벗어난 이 논의를 또 다른 언명으로 결론맺도록 하자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단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남자를 정의할 오로지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의 강의 가운데 하나에서 말하고 있듯이 -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여자다.
자신을 규정하는 상징적 역할 바깥으로 나와서 법(결혼)의 영역 '바깥'에 있는 남자와 비록 잠시 동안이나마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는, 이 상징적 우주 속에서, 하나의 '참을 수 없는 광경'이며, '열린 상처이다. 이러한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단지 두 개의 방법밖에 없는데, 둘 모두는 상징적 등록소에 의존하고 있다. 첫 번째는 헤겔이 das Ungeschehenmachen[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기]이라 불렀던 것, 즉 '소급 무화'의 논리를 따른다. ‘여자의 명예를 앗아간'(즉, 상징계 내에서의 그녀의 자리를 앗아간), 그리하여 '상처를 열어놓은 남자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상처를 치료해야만 한다. 그녀가 그의 '합법적' 아내가 된다면 그들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일'은 법에 의해 소급적으로 포섭되며 불온한 측면을 상실한다. 그가 결혼을 거부하면 그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는데, 하지만 그의 죽음만으로는 '상처를 치료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 상처는 수녀원의 설립을 통해 보살핌을 받는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통상 수녀원은 ‘자신의 명예를 상실한, 상징적 역할들의 주어진 배치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상실한, 그리하여 '갈 곳이 아무데도 없는' 여자들을 위한 유일한 안식처다. 그 상징적 기능에 있어서 수녀원은 장례식과 등가적이다. 두 경우 모두 주된 목적은 '실제 죽음'이 '상징적 죽음'과 일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령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실제 죽음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상징적 참조점들이 실제 죽음에 동반되도록 하는 것이 장례식의 역할이라면, 수녀원의 역할은 그 정반대다. '명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수녀원에 들어가야 하는 여자는, '현실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하더라도,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이미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광경'으로서, 유령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느슨한 여자 - 상징적으로 죽었지만 (즉, 그녀를 규정할 수 있을 그 어떤 상징적 부착물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돌아다니는 피조물 - 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순환에서 제거되어야'(수녀원에 유폐되어야) 한다. '죄를 범했지만' (예컨대 돈주앙과 같이 잤지만) 수녀원에 들어가지 않는 여자는 산주검의, 유령의 일원과도 같으며, 상징계에, ‘이승’에 그 어떤 자리도 없지만 여전히 지상을 걸어다니는 존재와도 같다. 그리하여 (기사장의 석상과 더불어) 몰리에르의 희곡에서 돈주앙에게 찾아오는 다른 피조물은 다름아닌‘베일을 쓴 여인의 형상을 한 유령'이다. 연극의 종결부는 두 '환영들이 차례로 돈주앙에게 찾아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아직 그를 구원하길 원하는) 여자, 그 다음으로는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석상. 몰리에르는 바로 이렇게 신화의 두 성분 - 죽은 자를 모독하는 것과 여자들을 유혹하는 것 - 의 연결을 무대올린다.
물론, 여자들을 '산주검'으로서 노출시키는 것이 돈주앙의 신화에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배치는 18세기의 여러 문학작품에 풍부하게 있다. 2이미 우리는 예컨대 『위험한 관계』에서 그것과 만났다. 하지만 여자들을 이처럼 '산주검'으로서 노출시키는 것이 돈주앙 신화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특별히 돈주앙을 변별시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발몽과 돈주앙의 근본적 차이는 돈주앙이 발몽과는 달리 실제로는 유혹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즉 '그에겐 자신의 계획을 배치할 사전의 시간이 없으며 자신의 행위를 의식할 사후의 시간이 없다'26) 발몽의 경우 유혹의 과정 자체에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것'에, 목표를 향한 그의 끝없는 (그리고 견디기 힘들게 느린)접근에 강조점이 두어진다. 비록 몰리에르의 희곡의 한 지점에서 돈주앙이 발몽에게 어울릴 법한 말들로 유혹 과정을 칭송하지만, 그렇다고 이 때문에 그 어떤 조급한 결론에 이르게 되어서는 안된다. 그 둘 사이의 진짜 차이는 『돈주앙』과 『위험한 관계』 각각의 내러티브 구조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명시적이 된다. 후자에서 내러티브는 방탕꾼과 특권적 여자(투르벨 부인)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모든 것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접근하기 힘든 바로 이 여자를 유혹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돈주앙이 발몽의 원형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이야기의 중심은 실로 수녀원에 살았던 돈나 엘비라에 대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돈주앙은 상당한 노력 끝에 그녀를 유혹했으며 그녀가 수녀원을 떠나서 그와 결혼하게 만들었으며, 그런 다음에 그녀를 저버린다. 하지만 이 ‘발몽적' 제스처는 희곡의 중심 테마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바로 그 시작부터 기정사실(fait accompli)로 나타난다. 희곡 자체에는 유혹의 과정이나 유혹이 산출하는 향유에 대한 그 어떤 강조도 없다.
기정사실이라고 하는 이 측면은 핵심적이다. 심지어 우리는 돈 주앙에게 향유는 언제나 (이미) 하나의 기정사실인 반면에 발몽에게 그것은 언제나 (아직 이루어져야 할 사실 (fait à accomplir)'이라는, 즉 그가 아직) 성취해야 할 임무이며 그가 (아직) 획득해야 할 목표라고까지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발몽에게서 향유는 이 향유의 의식(자각)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인데, 돈주앙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그리하여 우리는 향유가 돈주앙의 행동들의 충동인 반면에 발몽의 경우 충동을 구성하는 것은 향유하려는 의지(la volonté de jouissance”)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발몽은 향유를 자신의 의지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향유와 의지의 틈새를 폐지하려 노력한다. 그 자신이 타자의 향유의 도구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의 경우 이 타자는 투르벨 부인 속에 체현되어 있다. 발몽이‘가엾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이는 물론 그 자신의 노고의 결과이다)라고 외칠 때 그 배후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외침이 다름아닌 '복많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즐기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지요'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발몽은 향유와 의식(혹은 의지)의 틈새를 타자에게 향유를 위임함으로써만 폐지할 수 있다. '발몽과 돈주앙의 차이는 또한 욕망과 충동의 차이를 통해 파악할 수도 있다. 욕망이 만족되지 않음으로써 유지되는 것인 한에서 발몽은 욕망의 형상을 표상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정화'하기 위해서 여자들과 잔다.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여자를 정복해야 합니다’라고 발몽은 쓴다(p. 29[29]). 즉 욕망을 '만족시켜준다고 자처하는 여하한 대상으로부터건 욕망을 분리시키는 틈새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랑은 욕망이 도입하는 구멍, 결여를 메운다고 가정된다. 반대로 돈주앙은 이 행동들의 충동을 구성하는 틈새를 만족 그 자체에서 발견한다. 그의 경우는 욕망의 환유, 즉 (욕망의) '진정한' 대상의 영원한 난포착성의 경우이다. 그는 맞는 여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여자로의 끝없는 이동은 실망이나 결여에 의해, 그가 이전 여자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에 의해 동기화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돈주앙에게 있어 각각의 모든 여자는 맞는 여자이며, 그를 더 나아가도록 충동하는 것은 그가 이전 연인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이 아니라 정확히 그가 발견한 그 무엇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함 없이 만족을 얻는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그의 목적이 ‘순환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닌 한에서만 만족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돈주앙을 충동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이다.27) 그가 아무리 자기 자신을 채워 넣는다 해도 그의 행동들의 충동을 구성하는 구멍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우리에게 식욕(혹은 대상 a)은 먹고 싶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식욕의 만족 (이 만족 자체가 대상이다)을 가리킨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당신이 당신의 입―충동의 등록소에서 열려 있는 입―을 채울 때,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입의 쾌락이다. '그의 눈은 그의 위보다 크다'를 말바꿈한다면 우리는 발몽이 자신의 욕망을 열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의 위 속에 구멍을 유지하는 것에 언제나 유념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욕망과 그것의 '정념적 대상들의 틈새를, 그 후자가 (전적으로)만족스럽지(는) 않다'고 선언함으로써 유지한다. 돈주앙은 동일한 이 틈새를, 이 대상들이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지만 '비전체'(pas-tout)라고 선언함으로써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