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야, 강민호! 네 차례야! 어서 나서라고!”
PC방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민호의 귀를 때렸다.
모니터 화면에는 긴장감 넘치는 대전 게임이 펼쳐지고 있었다.
민호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은 채 주저하고 있었다.
“아, 진짜 뭐 해!”
“너 때문에 또 지겠어!”
친구들이 성화를 냈지만, 민호의 손은 떨리기만 했다.
조준은 엉망이었고, 적의 위치를 따라가지도 못했다.
결국, 화면에 커다랗게 떠오른 단어가 모든 걸 말해줬다.
패배
“하...”
민호가 의기소침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친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또 졌어!”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할래? 늘 중요한 순간에 네가 망친다고!”
“됐고, 이제 너랑은 게임 안 해!”
친구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민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내가 잘 못해서...”
민호의 중얼거림에 친구들이 모두 가방을 들춰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은 무슨! 성격은 소심해가지고 게임까지 소심하게 하냐? 이제 너랑 안놀아!”
민호는 아차 싶은 마음에 뒤늦게 가방을 챙겨 따라 나섰지만, 친구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석양이 지는 거리, 긴 그림자가 골목길을 따라 늘어졌다.
한 소년이 축 처진 어깨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민호였다.
오늘도 친구들은 민호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채, 수업이 끝나자마자 신나게 pc방으로 향했다.
소심한 성격에 먼저 말도 못붙이고 친구들이 떠나간 방향만 멍하니 바라보다 바보처럼 발길을 돌린 것이다.
민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들은 뭐 얼마나 잘한다고, 나대다가 죽어버리면 그게 잘 하는거냐? 됐다 그래...! 가서 잠이나 자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집으로 걸어가던 민호는 골목길 한복판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덜컹, 덜컹.
낯선 트럭이 골목길 모퉁이에 멈춰 섰다.
검은색 선팅 창문과 빛바랜 차체, 그리고 지붕 위엔 흐릿하게 깜빡이는 네온사인 글씨가 보였다.
“만물트럭?”
민호는 생전 처음 보는 글씨와 트럭의 분위기에 홀린 듯 멈춰 섰다.
그 순간, 트럭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 틈 사이로 신비로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고, 천막이 거치며 정체를 드러낸 진열장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오래된 나침반, 빛나는 유리병, 처음보는 과자들과 음료수,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의 기계장치들까지.......민호는 물건 하나하나가 순간, 살아 숨쉬며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진열장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형형색색의 미러볼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고개를 돌리려할떄였다.
운전석이 활짝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
금빛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는 우아한 듯 이질적인 모습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어울리지 않게 유치한 알록달록한 패턴의 중절모는 그의 머리 위에 단단히 얹혀 있었고, 모자의 가장자리에는 반짝이는 별 모양 장식이 달려 있었다.
또한 특이한 무늬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재킷의 소매에는 작은 종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어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경쾌한 딸랑 소리가 났고 그의 바지는 무릎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보통 사람이 입기엔 어색했지만 그에게는 완벽하게 어울렸다.
은빛 장갑을 낀 그가 민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호는 그의 모습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삐에로...?”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에로? 그건 뭐하는 거죠?”
남자는 급히 운전석에서 낡은 다이어리를 꺼내 펼치더니, 다이어리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무언가를 열심히 읽어내려가듯 하더니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아! 피에로! 피에로는 얼굴이 하얗군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지구의 인간은 이런걸 좋아하는가 봅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다이어리를 천천히 내렸다.
“어때요? 이게 맞습니까?”
남자의 얼굴은 어느새 하얀 분장에 붉은 코, 그리고 입꼬리가 올라간 커다란 입술이 그려진 피에로로 변해 있었다.
“으아악!”
민호는 놀라 주춤 물러섰지만, 자세히 보니 남자의 표정은 친근하고 익살스러웠다
“정말 삐에로였어요?”
남자는 민호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음, 피에로라는거 나쁘지 않군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변하는 것보다 원래 모습이 편합니다.”
남자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민호는 남자가 어쩌면 TV에서나 보던 마술사일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런 시골 동네에서 저런 낡은 트럭을 끌고 다니는 걸 보면, 그보단 덜 유명한…….
'이 근처에 마술 공연이 있나?'
“구경은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트럭을 가리켰다
민호는 멈칫했지만 남자의 푸근한 미소에 가슴을 진정시키며 트럭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안내에 따라 트럭내부로 들어온 민호는 놀랐다.
트럭 안은 외부에서 보더 것보다 훨씬 넓었다.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어 배치되어 있었고, 세상에 하나 뿐일거 같은 특별한 생김새의 물건들이 잔뜩했다.
남자는 진열장 옆을 지나며 손을 쓸어내렸다.
“이곳은 없는 게 없는 만물트럭이죠. 고객님이 원하는게 무엇이든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묘하게 설득력있는 울림을 가진 목소리에 민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주위를 둘러봤다.
“뭐든지 있다고요? 이 작고 낡은 트럭안에요?"
민호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자,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만물트럭이니까요. 고객님께는 특별히 보여드리지요. 원하는 걸 말씀해보시겠어요?”
민호는 잠시 망설였다.
“제가 원하는 건 살 수 있는게 아니에요. 물건 같은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남자는 물러나지 않고 민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만물트럭이 팔지 못할 건 없답니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민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치 민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해 불편했지만 동시에 작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민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을… 잘하고 싶어요. 단번에 게임을 잘하게 하는 마법 같은 능력도 파시나요?”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민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트럭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좋습니다. 그럼 이걸 추천해드리죠.”
남자는 진열장에서 낡은 게임기 하나를 꺼내 민호에게 건넸다.
게임기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작은 화면과 단순한 버튼 몇 개가 전부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건 같았다.
민호가 실망한 표정으로 게임기를 쳐다봤다.
“제가 잘 하고 싶은건 이런 게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컴퓨터 게임인데…….”
“그건 보통 게임기가 아닙니다. 바로, 판타스틱 픽셀 머신!”
남자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민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게임기를 살펴봤다. 역시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잘만 사용한다면 친구들보다도 더 게임을 잘하게 될겁니다.”
남자의 말에 민호가 잠시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하지만 이건 제가 찾던 물건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실 전 돈이 없거든요. 죄송해요.”
민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애초에 저희 만물트럭의 물건은 돈으로 살 수 없답니다. 그보단 더 가치있는 대가가 필요하죠.”
“대가요?”
게임기를 내려놓으려던 민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런 쓸모없는 게임기에 돈보다 더 가치있는 대가라는 것이 뭘까?
민호의 호기심을 읽었는지 남자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님이 지불하셔야 할 대가는 ‘이야기 값’입니다. 고객님이 이 게임기를 통해 겪게 될 이야기와 결말, 그 경험이 만물트럭이 원하는 대가지요. 고객님의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롭고 특별한지에 따라 고객님이 들고 계신 상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겁니다.”
민호는 그 말을 곱씹으며 게임기를 쥔 손을 내려다봤다.
“대가가 이야기라니, 이건 말이 안되요.”
“말이 되든 안되든, 이제 결정은 고객님 몫입니다.”
남자는 양손을 뒤로 깍지 끼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민호는 고민했다.
'이야기 값? 그게 뭐야? 여기서 장사한다고 소문이라도 내달라는 건가?'
이 게임기가 정말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지만,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 값이라는 말이 왠지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공짜나 다름없는 게임기니 잠깐 가지고 놀다 별로면 버리면 된다는 가벼운 생각도 스쳤다.
“좋아요. 가져갈게요.”
민호가 게임기를 두 손에 단단히 쥐며 말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고객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민호가 나갈 수 있도록 트럭 문을 열어주었다.
민호는 그런 남자에게 목례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멀리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부디 좋은 값을 치러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