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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할머니 의사선생님

by 정가을

점심때 먹은 해산물이 잘못된 건지 배가 살살 아팠다. 밤 비행기를 타기 전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음식점에 갔지만, 배가 아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 잠시라도 누워있고 싶었다. 나는 배가 아파서 음식을 먹지 못하겠다고 가족에게 말하고 음식점 밖으로 나왔다. 잠시 누울만한 곳이 있는지 이리저리 살폈으나, 주변은 온통 모래밭이었다. 필리핀 보라카이의 화이트 비치였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호텔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이미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모든 짐을 프런트에 맡긴 상태였다. 그때 내 눈에 손님이 없이 텅 빈 해변에서 마사지가 눈에 띄었다. 모래밭 위에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간이침대와 의자들을 놓아두고, 그 위에는 햇빛을 가려주는 천막이 쳐져 있었다. 7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계셨고, 나는 얼른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마사지를 받겠냐며 마사지 종류와 가격이 적혀있는 안내문을 보여주셨다. 나는 아픈 배를 움켜쥐며 마사지는 받지 않겠다고 손을 휘저었다. 배가 아프니 잠시 누워있어도 되냐고 손 짓 발 짓을 해가며 물으니, 흔쾌히 알았다고 하셨다. 안도의 숨을 쉬고, 누워서 계속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셨는지, 어느새 할머니는 내 옆에 오셔서 옷을 올리라는 시늉을 하셨다. 그러더니 민트향이 나는 크림을 내 배에 바른 후 배를 문지르며 마시지 해주셨다. 그리고 다시 엎드려 누워있으라는 제스쳐를 보여주셔 엎드리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있으라고 하셨다.


20~30분쯤 있으니, 식구들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도 누워있던 마사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탈이 단단히 났는지 통증은 계속 있었지만, 그래도 누워서 좀 쉬었더니 한결 나아진 거 같았다. 할머니에게 “땡큐, 땡큐!”라고 여러 번 말하며 100페소를 건넸지만, 할머니는 받지 않으시고 인자한 미소로 나를 보내주셨다.


얼마가 지나 일기장을 다시 들춰보니, 나는 즐거웠던 스노클링과 너무나 아름다웠던 화이트 비치의 일몰은 기록도 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할머니 마사지사에 관한 내용만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는 8월의 필리핀이었다. 이런 날씨에 내가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배를 문질러 주시고 돈도 받지 않으신 할머니를 보고, 자연스레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훨씬 덩치가 큰데도, 무거운 짐을 절대 못 들게 하시고 직접 드신다. 내가 할머니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데도 음식점에 가면 항상 나를 밀치고 얼른 계산하신다. 그런 우리 할머니와 필리핀의 마사지 할머니가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마사지사 할머니도 손녀가 떠올라 나에게 그렇게 해주신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와 손녀 사이는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뛰어넘어, 내가 귀찮고 손해 보더라도 더 주고 싶은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햇살에 어둡게 그을린 피부, 그동안의 고생이 묻어나는 자글자글한 주름들, 긴 세월이 느껴지는 새 하얀 머리카락, 후줄근한 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이방인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어준 나의 필리핀 할머니 의사 선생님. 아마 오늘도 나 같은 이방인을 보고 할머니의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인자한 미소로 그곳에 앉아계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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