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와 은석의 이야기 10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은수와 은석은 문득 할머니도 비를 맞겠거니 싶다. 은수가 마루 밑에서 팽개쳐지듯 아무렇게 놓여있는 우산 하나를 찾아내어 은석이와 함께 채마밭에 있는 할머니에게 갔다.
할머니의 채마밭은 작지만 알찼다. 열댓 평 남짓한 땅덩이에 없는 게 없이 심겼다. 고추가 한 고랑, 가지 서너 포기, 단단히 땅에 꽂아놓은 막대기를 타고 오르는 오이와 수세미가 대여섯 포기씩. 그리고 딱 고만큼의 토마토. 열무와 토란, 양파와 무, 배추, 마늘 등이 시간 속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머니의 채마밭에서 꽃처럼 자랐다. 할머니의 작물들은 마치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처럼 대오를 잘 갖추어 흐트러짐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낙오되지 않고 제 몫을 다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이랑마다 여름 내내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자란 고추며, 가지, 오이 등속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고랑 사이로 수건을 두른 할머니의 머리가 떠올랐다 사라지자 은수와 은석이 경쟁하듯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가 허리를 일으켜 반갑게 손을 흔들어 아이들에게 화답한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들 우째 왔누. 비도 오는데 집에서 놀지 않고.."
"응, 할머니 비 맞을까봐 왔지." 은수가 자랑스럽게 대꾸한다.
할머니는 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위해 흙이 묻은 거친 손을 몸빼 바지에 닦다가 말고 이마를 은수의 이마에 맞대고 부빈다.
은수가 할머니에게 우산을 받쳐주려 하자
"아서라, 할미는 수건을 쓰고 있어서 괜찮다. 할미는 저짝 고랑까지 마저 풀을 뽑아야 하니께 어여 은석이 델고 집으로 돌아가 있거라. 여름 고뿔엔 약도 없느니라" 할머니가 손사래를 친다.
"할머니, 나 저거 잘라주면 안 돼?" 은수가 토란 잎을 가리키며 할머니를 바라본다.
"아이고, 인석.. 이제 봤더니 저걸로 우산을 받고 싶어 왔구먼!" 할머니가 그럼그렇지 하는 푬정으로 웃는다. 할머니가 선선히 토란대가 심긴 고랑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은수와 은석이 쫄래쫄래 뒤를 따른다.
구슬 같은 빗방울이 토란 잎의 우묵한 데로 굴러 떨어진다. 토란 잎 위를 뒹굴던 빗방울들이 제멋대로 달라붙어 커지고 흔들리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떨군 토란 잎을 타고 조르르 흘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토란 잎 아래서 비를 피하던 엄지손톱 만한 청개구리가 놀라 펄쩍 뛰어 도망친다. 은석은 토란잎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맑고 투명한 구슬을 잡으려고 애쓰지만 은석이 구슬을 잡는 순간 구슬은 사라진다.
할머니가 토란잎 한 잎을 잘라 은수에게 주자 은수가 저의 뒤에 서 있는 은석에게 건넨다. 은석이 머리에 쓴 토란 잎사귀 위에도 빗방울이 구슬이 되어 뒹군다. 은수가 은석이 쓴 토란잎의 가장자리를 밑으로 훑자 빗방울들이 후드득 쏟아진다. 할머니가 또 한 잎을 잘라 은수에게 주었다. 은수와 은석은 토란잎을 머리에 받친 채 서로를 바라보며 까르르 웃는다.
그때였다. 은석이 토란 잎을 떨구고 쭈뼛해져서 어쩔 줄을 몰라한 건. 은수가 눈이 동그래져서 은석에게 물었다.
"은석아, 왜 그래? 괜찮아?"
은석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몸이.. 몸이 너무 가려워. 근데 어디가 가려운지 모르겠어.."
은석의 손과 팔 위로 크고 작은 여러 모양들이 붉고 선명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은수가 다급하게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 은석이가 가렵대요, 팔에 뭐가 막 생겨나요"
할머니가 깜짝 놀라 은석이를 바라본다.
할머니가 두 손으로 은석이의 손과 팔을 잡고 바라보다가 은석의 셔츠를 올려 배와 등을 살핀다. 할머니는 은석이 앞에 등을 내밀고 앉는다. 은석이 풀썩 할머니 등으로 쓰러지듯 업히자 "아이고.. 아가.. 내 니 토란 옻이 오를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 미안하다. 아이고.. 어쩌면 좋누.." 할머니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은석이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은수가 그 뒤를 따라 뛰었다.
할머니는 은석을 샘가에 앉혔다. 마중물을 부어 여러 번 펌프질을 하자 물이 달려 올라왔다. 할머니는 은석에게 여러 번 물을 마시게 하고, 차가운 물에 적셔 짠 수건으로 은석의 몸 이곳저곳에서 울퉁불퉁 뻘겋게 돋은 두드러기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할머니는 곧 은수에게 이 일을 맡기고 부엌으로 들어가 솥에 서너 바가지의 물을 붓고 불을 피웠다.
비가 멈춘 걸 아는지 닭이 먹이를 찾아 가볍지만 신중하게 발을 옮기며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물이 끓는 사이 닭을 잡으려고 할머니가 뛰어다녔다. 시뻘게진 얼굴로 닭보다 더 푸드덕거리는 할머니를 피해 닭이 영문도 모른 채 후다닥 달아났다. 닭은 할머니에게 잡힐 듯 말 듯 요리조리 내빼다니다가 닭장으로 쫓겨들어갔다.
마침내 조그만 닭장 안으로 닭을 몰아넣는 데 성공한 할머니가 닭장에 팔을 집어넣어 닭의 날갯죽지를 움켜쥐었다. 닭이 꼬꼬댁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할머니는 펄펄 끓는 물에 닭을 튀겨 털을 뽑았다. 닭털을 뽑은 물이 어지간히 식자 이번에는 그 물에 수건을 적셔 은석의 벌겋게 부풀어 오른 피부를 닦아주었다. 은석이가 등이고 팔이고 긁고 싶어 들썩일 때마다 "아가야, 긁으면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고 더 긁고 싶어지는 벱여. 조금만 참자, 알겄지?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할머니가 주문을 외듯 은석이와 눈을 맞추고 은석이의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은석이 울지도 못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은석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누칠을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살살살 한참을 문지르고 나서야 깨끗한 물로 헹구기를 거듭거듭 되풀이했다.
닭의 털을 뽑은 물이 효험이 있었던 건지,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건지 은석의 피부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다시금 은석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은석이 가려움이 조금 견딜만해졌는지 눈물 그렁한 눈에 여린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조상님 고맙습니다. 신령님 고맙습니다." 할머니가 은석을 꼭 끌어안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고맙다는 말만 되뇌었다. 옆에서 괜히 은수의 코 끝이 시큰해졌다. 할머니의 품에 안겨있던 은석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