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와 은석의 이야기 11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은수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땅치 않았다. 은수는 굳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매일매일이 재미있기만 했다. 은석이와 하루종일 노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지만 은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은수가 학교에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썼을 때 아버지는 사내 녀석이 암사내처럼 놀기만 할 거냐고 호통을 쳤고, 엄마는 학교에 가면 선생님도 계시고 친구도 많이 생겨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엄마와 아버지의 반응은 서로 달랐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똑같이 맺음 됐다. 하지만 은수는 여전히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j읍에 장이 서는 날 은수의 엄마는 은수를 장에 데리고 갔다. 은수가 입학식날 입게 될 새 옷 한 벌과 새 신 한 켤레를 마련해 주었고, 은수가 메고 다닐 가방과 공책, 필통, 연필 같은 학용품을 샀다. 은수는 학교에 갈 날이 가까워질수록 키도 커지고 마치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는 새 옷과 새 학용품 때문만이 아니라 일곱 살과 여덟 살의 차이가 주는 이를테면 취학 가능 여부가 세상을 달리 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은수는 여전히 은석이와 놀았지만 은석이와 노는 시간은 확연히 줄었다. 가방을 쌌다 풀고, 풀었다 싸며 학교 갈 날을 기대하고, 학교생활을 그려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예쁘고 단정하게 깎아 준 연필이 부러질까 조심조심 금을 그어보기도 하고 지우개가 닳아 없어질 까 모서리로 조심조심 지워보기도 했다. 은수가 새 가방과 연필과 공책 같은 거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은석은 은수에게 소꿉놀이를 하자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아침 일찍부터 은수는 새 옷을 차려입고 학교 입학식에 갈 준비로 분주했다.
"우리 손주, 아주 김일(프로레슬링 선수이름, 씩씩하다는 의미로 사용) 답네. 선상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잘 갔다 오너라" 골목길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하는 할머니에게 은수가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대답을 한다. 은석은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새 옷을 차려입고 반들반들 머리카락에 기름까지 바르고 집을 나서는 은수의 모습이 꼴사납다는 생각을 한다.
은수의 뒷모습이 손바닥만큼 작아져 버릴 때까지 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끔 은수의 엄마가 돌아봤을 뿐이다. 할머니는 몸을 돌려 집을 향해 걸었다.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걷던 은석은 괜히 멋쩍은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해서 그런가 은석은 코끝이 찡해 왔다. 옷소매로 코를 한 번 문지리고 울안으로 돌아와 햇볕이 비치는 담벼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았다. 마당에 뒹구는 작은 돌멩이로 언젠가 은수가 가르쳐준 대로 별을 그리다가 그만두었다. 햇살이 다감하게 은석을 감싸 안았다. 은석은 소꿉이 될 만한 걸 찾아와 혼자서 소꿉놀이를 시작했지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 왔는지 할머니가 은석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에 햇살이 속살거리자 눈이 부신 할머니가 가늘게 눈을 뜨고 은석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은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석이가 할머니의 무릎에 옆으로 머리를 기대었다. 은석이의 한쪽 눈에서 나온 눈물이 다른 쪽 눈물과 합쳐져 떨어질 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