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임종_은수와 은석의 이야기 13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늘 집안에 계셨지만 할아버지의 존재는 서서히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런데도 막상 할아버지의 부재를 눈앞에 맞고 보니 숭숭 뚫린 뼛 속으로 바람이 새어드는 듯이 모든 게 허하고 시렸다. 그동안 할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산과 같은 존재였음을 새삼 깨닫고 만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어려워지고 자리를 보전하게 되면서 그리고 점점 입에서 말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정신이 들었다가도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마는 일들이 잦아지면서 이미 이승보다는 저승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복을 누리며 병치레 없이 오래 살았기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몇 년을 누워계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호상이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호상이란 너무 힘들게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고통을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 호상이라 했던 거 같다. 처음에 할아버지는 곧 병을 극복할 거라 믿었고, 금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병에 차도가 보이지 않고 병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절망했다. 할아버지는 절망이 극에 달하고 체념의 단계를 지나면서 '내가 얼른 떠나야 하는데.. '하고 되뇌곤 하였지만 할아버지의 원대로 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가늘고 길게 병과 사투를 벌였다.
할아버지에게서 살이 빠져나가고 호흡이 붙어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자 윗뜸의 김 영감이 자주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의 허리 밑에 손을 넣어보고는 척추 뼈가 아직 내려앉지 않은 걸로 보아 바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다. 김 영감은 할아버지의 살이 짓무르고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음에도 아직은 돌아가실 때가 안되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아이고 이렇게 고생을 하느니 그만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며 눈물을 찍어냈다.
은수네 집 마당에 마치 잔치라도 치르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네 남자들은 마당에 멍석을 펴고 천막을 치느라 분주했고, 여자들은 한쪽에서 음식을 장만했다. 할아버지가 기거하시던 방 안에서 슬픔이 터져 나오고 은수와 가족들은 삼베로 된 상복을 입었다.
은수는 누나들과는 다르게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도 말수가 적었지만 은수한테 만큼은 예외였다. 할아버지는 외출했다 돌아오시면 은수 입에 엿한가락이라도 물려주셨고, 할아버지가 짐짓 아무것도 사 온 게 없다는 듯 꺼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은수는 할아버지에게 매달려 기필코 주머니에서 주전부리를 찾아내 신이 나서 돌아섰다.
은수의 삼촌, 고모와 친인척들이 허둥지둥 마당을 들어서면서부터 황망해하며 곡을 시작했다. 은수는 사람들이 애간장이 녹을 듯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면 이상하게 조금은 슬픔이 누그러진 표정이 되어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생전에 일만 하다가 병을 얻어 가신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사실만큼 사셨고, 살아서 남에게 야박하지 않게 덕을 베풀었으니 좋은 곳으로 가실 거라고 은수네 가족을 위로했다.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침통해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임종 전 가끔씩 할아버지에게 모든 걱정 다 내려놓고 그만 편히 가시라는 말을 건넸고 그 말이 할아버지를 위한 거라고 믿었지만 그 말이 자꾸 맘에 밟혔다. 할머니는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례를 치르고 정을 붙이고 의지하며 살았던 할아버지와의 지난 시절이 마치 하룻밤 꿈인 것만 같다. 요령소리에 맞춰 꽃상여를 타고 이 승에서의 낡고 오래된 옷을 훌훌 버리고 떠나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짓무른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